한덕수의 마지막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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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미 FTA 협상 타결 전날처럼, 시간을 포함해 우리에게 주어진 지렛대를 모두 활용해야 합니다.

한덕수의 마지막 소명

2025년 4월 24일

오늘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2+2 통상 협의’가 열립니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무역, 통상 이슈를 협의합니다. 협의 장소는 미국 재무부 청사입니다. 백악관 근처에 있는 건물이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회의장에 깜짝 방문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4월 2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트럼프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불공정하게 다뤄서 무역 적자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국가에 보편 관세 10퍼센트를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57개국에는 상호 관세를 추가하겠다고 했는데, 한국은 15퍼센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에 총 25퍼센트의 관세를 물리겠다는 겁니다.

트럼프가 관세 폭탄을 투척한 직후 뉴욕을 포함한 전 세계 증시가 급락하고, 미국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달러 가치도 약세를 보였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 자산을 팔아치우는 ‘셀(sell) 아메리카’ 현상이 일어났죠. 그러자 트럼프는 말을 바꿨습니다. 보편 관세는 그대로 시행하되, 상호 관세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엔 90일간 유예한다고 했죠. 즉, 7월 9일부터 시행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각국을 향해 서둘러 미국과 협상하라는 조언도 건넸습니다. 7월 9일이 오기 전에 ‘알아서’ 미국의 무역 적자를 해소할 방안을 들고 오라는 겁니다. 미국에 투자를 늘리거나, 미국산 제품을 더 사겠다는 제안을 하라는 거죠. 출발은 일본이 끊었습니다. 일본 측은 16일 워싱턴 DC에서 1차 관세 협상을 가졌습니다. 이달 중에 2차 협상을 하기로 했고요.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미국과 먼저 협상하는 국가가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가게 될 것”이라며 협상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7월 9일까지는 아직 두 달이 더 남았지만, 미국은 한국, 일본, 인도, 영국, 호주 같은 주요국과는 가능한 한 빨리 협상을 매듭지으려 합니다. 불확실성을 줄여 셀 아메리카를 멈춰 세워야 하니까요. 또 4월 30일은 트럼프 2기 출범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관세 협상이 진전되는 모습을 성과 중 하나로 소개하고 싶겠죠.

이런 상황에서 최상목, 안덕근 장관이 미국에 갔습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 매긴 10퍼센트의 보편 관세는 어쩔 수 없지만, 추가로 부과될 예정인 상호 관세 15퍼센트를 좀 깎아 보려는 거죠. 말은 관세 협상이지만, 실은 그냥 미국 무역 적자를 줄이는 협상입니다. 미국은 관세는 물론이고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같은 비관세 장벽, 알래스카 LNG 개발 투자, 주한 미군 방위비 등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전망입니다. 

한덕수 대행의 마지막 소명

한덕수 대통령 권한 대행 국무총리는 4월 14일 국무회의에서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언급하면서 “저에게 부여된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간의 통상 경험을 바탕으로 관련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겠다는 말도 있었죠.

그렇습니다. 한덕수 대행은 통상 전문가입니다. 한 대행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냈습니다. ‘FTA 전도사’로 불릴 만큼 자유 무역을 강조해 왔죠. 한국과 칠레의 FTA, 한미 FTA 체결에도 한덕수 대행이 깊이 관여했습니다. 공직을 잠깐 떠났을 때는 김앤장에서 고문으로 일하며 통상, 무역 분야에 조언을 하기도 했고요.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어려움을 없애 줬다는 공로로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암참)의 공로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대행의 대권 출마설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후보자로 확정될 인물과 단일화해 범보수 후보로 나설 수 있다는 관측입니다. 출마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2주 전만 해도 총리실 간부들에게 “대선의 디귿 자도 꺼내지 말라”며 출마설을 일축했는데, 이제는 출마도 불출마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고에 들어갔다는 얘기죠.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는 한 대행의 대선 출마 가능성을 70~80퍼센트로 내다보면서 그가 대선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대행이 3년 과도 정부로 개헌을 하겠다고 하면 자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도울 수 있다고도 했죠.

한 대행이 이번 대선에 출마하려면 대선일 30일 전인 5월 4일까지 총리직에서 사퇴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트럼프는 4월 30일에 집권 100일을 맞고요. 만약 한 대행이 외부에 공표하진 않았지만 내심 출마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면 관세 유예 90일을 꽉 채우고 싶진 않을 겁니다. 마침 트럼프도 협상 조기 타결을 밀어붙이고 있고, 한 대행 역시 총리직을 내려놓기 전에 대선 출마의 명분과 성과를 만들고 싶을 테니까요.

한국과 미국의 정치 일정이 이렇다 보니, 졸속 협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한 대행이 협상 기간을 넉넉하게 활용하지 않고 5월 4일이라는 공직 사퇴 시한에 쫓겨 협상을 진행하면 우리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대체로 협상은 서두르는 쪽이 지니까요.

한미 FTA 협상 타결 전야

2007년 4월 2일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됐습니다. 같은 날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한덕수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대행을 총리로 지명한 건 한미 FTA 때문이었습니다. 한 대행은 총리 지명 전에 한미 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었죠. 한 대행이 경제부총리 시절에 착수했던 한미 FTA 협상을 잘 마무리하고 농업 등 피해 산업 대책을 마련하는 중책을 맡긴 겁니다.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기 전날이었던 4월 1일, 밤 11시쯤에 한 총리는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전화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자동차 시장 개방 등 미국의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죠. 이 조건을 수락하면 협상이 타결되고, 그렇지 않으면 결렬이라는 미국의 최후 통보였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로선 받을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거절하기로 합니다. 10개월간 극심한 사회 분열을 일으켰던 한미 FTA 협상이 결국 빈손으로 끝날 위기였죠.

그런데 자정이 지나 새벽 1시쯤 미국이 돌연 양보하기로 합니다. 세 가지 요구 조건을 한국이 수용하지 않아도 FTA를 체결하겠다고 하죠. 한미 FTA에서 우리도 양보한 부분이 물론 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은 협상이었다는 평가가 중론입니다. 그러니 부시 이후 미국 대통령들이 계속 한미 FTA를 재협상해야 한다고 했죠. 한국의 경제 지도를 바꾼 한미 FTA는 수년간의 사회적 논의와 10개월간의 한미 협상 끝에 극적 타결됐습니다. 당시 변양균 정책실장의 증언입니다.

“정작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 전까지 내세울 만한 업적이 별로 없었다. 국내 정치는 엉망이고 대외 정책에서도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한국 정도 되는 큰 나라와 FTA는 하나도 못 했다. (...)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면 사실상 빈손으로 임기를 마쳐야 했다.”

한 대행이 출마하든 출마하지 않든, 그건 개인의 선택입니다. 출마하기로 했다면 법정 시한 전에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대선 후보 등록을 해서 투표로 유권자의 심판을 받으면 됩니다. 본인이 선출직 공직자로 나서겠다는데, 이걸 두고 하라 마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관세 협상과 대선을 연결 지어서는 안 됩니다.

거래의 기술

1987년 트럼프가 쓴 책 《거래의 기술》에서 트럼프는 11가지 사업 원칙을 공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렛대를 활용하라”입니다. 유예 기간 90일을 굳이 다 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도 없습니다. 장기적 국익이 걸린 문제라 대통령 권한 대행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며 시간을 끄는 것도 작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급한 건 셀 아메리카를 멈춰야 하는 미국이니까요.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협상장에서 미국은 사전 의제에 없던 주일 미군 주둔 비용 증액을 요구했고, 일본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협상장에 방위성 간부를 보내지 않았거든요. 관세 협상이니까 관세 얘기만 할 줄 알았던 겁니다. 게다가 트럼프가 협상장에 직접 등판해 협상 주도권을 확 틀어쥐었고요.

한국도 국방부, 외교부의 주한 미군 방위비 관련 담당자를 워싱턴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방위비 이슈가 나올 게 분명한데, 일부러 데려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로선 곤란한 의제니까 ‘그 문제는 지금 관계자가 없어서 답변하기 어려우니 귀국한 뒤 검토해 답하겠다’는 식으로 일단 넘기고 시간을 확보하려는 전략이겠죠. 일본의 우선 협상이 없었다면 아마 한국 협상단에는 국방부 관계자가 포함됐을 겁니다. 그럼, 무역과 안보가 얽혀 북핵을 이고 있는 우리로선 더 불리한 협상이 됐겠죠.

한국은 일본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고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먼저 협상에 나서라고 등 떠밀지도 않았는데, 일본이 먼저 나서 줬습니다. 미국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알아낼 좋은 기회입니다. 그 좋은 기회를 우리가 굳이 날려버릴 필요가 없죠. 2007년 한미 FTA 협상 타결 전날처럼, 시간을 포함해 조선업, 원전, 배터리 등 우리가 가진 지렛대를 모두 활용해야 합니다.

한 대행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 소득이 250달러일 때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그 가난하던 나라가 국민 소득 3만 달러를 뛰어넘는 나라가 되는 과정을 직접 겪었습니다. 한 대행은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정부의 공복으로 일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마지막 소명”이 대선 출마를 위해 관세 협상을 지렛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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