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생수가 팔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로 30년입니다. 생각보다 역사가 짧죠. 관련 안전기준이 처음으로 개선됩니다. 지금까지는 등록제로 관리되어 왔습니다. 생수 수질에 관한 기준은 있지만, 실제 검사는 업체가 자체적으로 진행해 통보합니다. 생수 업체가 모여 만든 한국샘물협회가 ‘먹는샘물 품질 인증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걸 손봐 국제 수준에 맞추겠다는 겁니다.
국내 해썹(HACCP, 위생 관리 시스템)을 바탕으로 취수, 제조, 유통 전 과정에서 국제 표준(ISO) 22000을 충족시킬 수 있는 평가 및 품질 인증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의 생수 소비자들에게도 득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런 인증이 생기면 생수를 수출하고자 하는 기업에 좋은 기회가 되죠. 이번 안전기준 개선은 소비자보다 기업을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달라질 부분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유통 과정에서 보관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겠다는 내용입니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가 직사광선에 오랫동안 노출될 경우 용기에서 아세트알데히드 등의 유해 물질이 생수로 녹아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반면, 미세 플라스틱에 관한 규제는 국제적인 논의 상황을 지켜본 뒤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의 위해성과 규제에 관한 국제적인 동향을 봐 가면서 결정하겠다는 것인데, 선제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국제 시장에서 한국 생수가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준을 맞추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장벽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 생수 업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바로 ‘플라스틱’입니다. 생수를 수출할 경우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유럽 지역이 꼽히는데,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플라스틱 생산에 재생 원료 사용을 2030년까지 30퍼센트 수준까지 확대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추세를 따라가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재생 원료 사용 도입이 늦어지면서 재생 원료 시장 자체가 아직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폐플라스틱은 품질 보증이 되지 않아 재활용에 한계가 있습니다. 배출할 때 아무리 잘 분류해도 폐플라스틱 회수 과정에 다시 섞여버립니다.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다시 선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폐플라스틱 재활용에 있어 정확도가, 효율이 떨어지는 겁니다. 관련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SK케미칼이 1300억 원을
투자해 중국에서 페트병을 조달해 올 정도니, 상황이 꽤 심각하지요.
유럽의 생수는 석회질과 미네랄 함량이 꽤 높은 편입니다. ‘경수(硬水, hard water)’라고 하죠.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해외 생수, ‘에비앙’의 경우 유럽에서는 다른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네랄 함량이 적어 부드러운 맛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세기, 에비앙 지역의 온천수만 마셨더니 신장 결석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처음 상품화되었던 계기도 비교적 낮은 미네랄 함량 덕분이었고요.
반면, 우리나라의 물은 미네랄 함량이 낮은 ‘연수(軟水, soft water)’입니다. 에비앙과 비교해도 더 가볍고 깨끗한 맛이 납니다. 에비앙의 물맛이 뭔가 풍부하게 느껴지거나 약간 느끼한 까닭은 미네랄 함유량의 차이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깔끔한 맛의 한국 생수가 유럽 시장에서 가능성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다만, 이 재생 플라스틱의 장벽을 넘어야 본격적인 진출이 가능하겠죠.
귀족의 음료
사실, 플라스틱 페트병은 생수가 가지는 계급성을 무너뜨린 시대의 발명품이었습니다.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어 페트병이 보편화하기 이전까지 생수는 유리병이나 도자기 병에 담겨 판매되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좋다는 물을 길어 와 판매하는데, 엄청나게 무거운 병에 담기기까지 했으니, 운송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수는 귀족만의 음료였습니다.
사실, 물은 자연에서 나는 것이며 공공재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한강 물이 누구 것인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물은 돈을 내고 쓰는 자원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물론, 가뭄이 들거나 깨끗한 물이 귀한 곳은 예외였지만 말입니다. 그런 물을 일부러 고급스러운 병에 담아 비싼 값으로 팔았으니, 부자가 아니라면 생수를 사 마실 이유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수는 일종의 고급 재화이며 계급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경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엄청나게 비싼 생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실 테지요. 페리스 힐튼이 강아지를 먹인다는 생수, ‘블링H2O’는 한 병에 5만 원 정도입니다. 순금으로 정수했다는 ‘엑소시아 골드(Exousia Gold)’는 1리터에 300만 원을 호가하고요. 이쯤 되면 고급 생수 영역은 합리가 아닌 욕망의 영역입니다. 가격이 오르는데 수요도 오르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유한 괴짜들만을 위한 시장은 아닙니다. 고급 물의 맛을 견주고 비교하는 서밋(Fine Water Summit)도 개최됩니다.
올해 서밋에서 참가자들은 노르웨이 빙하로 만든 생수와 안데스산맥의 화산 지대에서 솟아난 생수의 맛을 비교했습니다. 체코에서 온 빙하기 시대의 물도 선보였죠.
정부가 없는 곳에
인간은 물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물의 계급성은 다른 어떤 재화보다도 더 직설적으로 느껴지죠. 우리나라에서 생수 시판이 금지되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시는 물을 돈 주고 살 수 있게 되면 ‘계층 간 위화감’이 커질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생수 회사가 있긴 했지만, 주한 미군이나 88년도 서울 올림픽을 찾은 외국인 등에게만 한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었죠. 저도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께 유럽에서는 물을 돈 주고 사 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함께 여행했던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물 마시는 데 돈을 낼 수 없다’라며 생수를 그냥 가져다 마셨다는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하셨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절도에 해당하겠습니다.
2025년의 상식으로는 계층 간 위화감을 우려해 생수를 팔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당연한 규칙이었을 겁니다.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마시는 물을 돈 받고 판다는 발상이 오히려 낯설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 상식을 뒤집어엎는 일이 발생합니다. 1989년, 수돗물에서 중금속이 검출된 겁니다. 1990년에는 발암물질 트리할로멤탄이 검출되었고 급기야 1994년에는 두산전자에서 유출된 폐수가 영남 지역의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사건이 터집니다. 이른바 ‘페놀 사태’입니다.
상수원 관리라는 정부의 역할에 실패가 발생하면서 여론은 생수를 합법화하자는 쪽으로 기웁니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확대하면서 법과는 관계없이 이미 생수 판매가 묵인되고 있기도 했고요. 결국 1994년 3월, 생수 판매가 합법화합니다. 금지되었던 생수 광고도 2013년부터 허용되고 있고요. 봉이 김선달이 희대의 사기꾼에서 역사적 사업가로 재탄생한 겁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생수 시장은 3조 원대 규모로 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