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전 세계가 캐나다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4월 28일 치러진 조기 총선 결과 때문입니다. 집권당이 그대로입니다. 진보 성향의 자유당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놀라운 결과입니다. 지난 1월 트뤼도 전 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한 직후 자유당은 완전히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에서 먹고 살기가 점점 팍팍해지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던 차였습니다. 사람들은 원인을 트뤼도의 이민 정책에서 찾았죠. 이민자를 너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사회 보장 제도는 흔들리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겁니다. 2024년 4분기 기준으로 GDP 대비 가계부채율 전 세계 2위 국가는 한국이었습니다. 약 91퍼센트에 달했죠. 1위 국가는 캐나다였습니다. 100퍼센트를 넘겼습니다. 주거 비용 때문에 온 국민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데,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 집값을 올린다는 반감이 힘을 얻은 이유입니다.
여기에 트뤼도 특유의 진보적인 정책들도 문제가 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탄소세인데, 주유소나 도시가스 기업에 탄소세를 물린 후 이를 다시 가계에 환급해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화석 연료의 가격을 높이는 겁니다. 그런데 에너지 가격이 높아지면 나중에 환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가계에는 부담이 됩니다.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 있어도 가난해지는 상황에, 2024년에는 탄소세를 인상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트뤼도의 지지율은 16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트뤼도가 총리직에서 내려오겠다고 선언했을 때 대부분 정권 교체를 예상했습니다. 드디어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캐나다가 우회전하게 될 것이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트뤼도의 사임 발표 직후 보수당을 향한 지지율은 46퍼센트, 자유당은 20퍼센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26퍼센트 포인트라는
격차가 불과 3개월 만에 뒤집힌 겁니다. 이 역전극을 써낸 주인공이 바로 마크 카니 신임 총리입니다.
캐나다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총선을 통해 최대 의석을 확보한 당이 집권당이 되고, 집권당의 당대표가 자동으로 총리가 됩니다. 즉,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총리 선출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죠. 이번 선거에서 자유당에 다시 표를 준 캐나다 유권자들은 카니 총리를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진심으로 반색하고 있고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캐나다 유권자들이 왜 카니 총리를 선택했는지를 살펴보면 대통령 선거를 34일 앞둔 우리 정치에 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미국은 제국이 아닙니다. 한국도, 일본도, 캐나다도, 유럽 각국도 미국과 대등한 국가입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2.0 행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버는 국가에는 관세를 매기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린란드의 자원이 탐나니 미국 영토에 편입하자고 합니다. 캐나다를 향해서도 마치 미국의 속국이라도 되는 양 고압적인 자세죠.
캐나다의 굴욕은 2024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트뤼도 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자택까지 찾아가 몸을 낮췄지만, 25퍼센트의 관세 위협과 함께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어떻겠나”라는 조롱만 돌아온 겁니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 캐나다는 분노했습니다. 본격적인 반미 정서가 형성된 겁니다. 현지에서는 2019년 우리나라의 ‘노 재팬(No Japan)’ 불매 운동을 뛰어넘는 분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스하키 경기에서는 미국 국가 연주 중에 야유를 퍼붓고 커피숍에서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 대신 ‘캐나디아노(Canadiano)’라는 글씨가 적혔습니다.
이 분위기에 카니 총리는 제대로 올라탔습니다. 트럼프를 비판하고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 전제로 경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카니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경제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2025년 1월까지 카니는 본격적인 정치 경험이 없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76퍼센트의 응답자가 카니의 사진을 보고도 이름을 대지 못했을 정도죠. 하지만 평생을 걸쳐 어떤 정치가보다도 설득력 있는 경력을 쌓아 왔습니다. 하버드와 옥스퍼드를 거쳐 골드만삭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부터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맡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돌파했고 2013년부터는 영국의 영란은행 총재를 맡아 브렉시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에 기여합니다. 한마디로 카니는 ‘경제 위기 탈출 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