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디아노의 맛

bkjn review

우리는 친트럼프 연합에 서게 될까요, 반트럼프 연합에 서게 될까요.

캐나디아노의 맛

2025년 4월 30일

참 오랜만에 전 세계가 캐나다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4월 28일 치러진 조기 총선 결과 때문입니다. 집권당이 그대로입니다. 진보 성향의 자유당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놀라운 결과입니다. 지난 1월 트뤼도 전 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한 직후 자유당은 완전히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에서 먹고 살기가 점점 팍팍해지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던 차였습니다. 사람들은 원인을 트뤼도의 이민 정책에서 찾았죠. 이민자를 너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사회 보장 제도는 흔들리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겁니다. 2024년 4분기 기준으로 GDP 대비 가계부채율 전 세계 2위 국가는 한국이었습니다. 약 91퍼센트에 달했죠. 1위 국가는 캐나다였습니다. 100퍼센트를 넘겼습니다. 주거 비용 때문에 온 국민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데,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 집값을 올린다는 반감이 힘을 얻은 이유입니다.

여기에 트뤼도 특유의 진보적인 정책들도 문제가 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탄소세인데, 주유소나 도시가스 기업에 탄소세를 물린 후 이를 다시 가계에 환급해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화석 연료의 가격을 높이는 겁니다. 그런데 에너지 가격이 높아지면 나중에 환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가계에는 부담이 됩니다.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 있어도 가난해지는 상황에, 2024년에는 탄소세를 인상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트뤼도의 지지율은 16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트뤼도가 총리직에서 내려오겠다고 선언했을 때 대부분 정권 교체를 예상했습니다. 드디어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캐나다가 우회전하게 될 것이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트뤼도의 사임 발표 직후 보수당을 향한 지지율은 46퍼센트, 자유당은 20퍼센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26퍼센트 포인트라는 격차가 불과 3개월 만에 뒤집힌 겁니다. 이 역전극을 써낸 주인공이 바로 마크 카니 신임 총리입니다. 

캐나다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총선을 통해 최대 의석을 확보한 당이 집권당이 되고, 집권당의 당대표가 자동으로 총리가 됩니다. 즉,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총리 선출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죠. 이번 선거에서 자유당에 다시 표를 준 캐나다 유권자들은 카니 총리를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진심으로 반색하고 있고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캐나다 유권자들이 왜 카니 총리를 선택했는지를 살펴보면 대통령 선거를 34일 앞둔 우리 정치에 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미국은 제국이 아닙니다. 한국도, 일본도, 캐나다도, 유럽 각국도 미국과 대등한 국가입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2.0 행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버는 국가에는 관세를 매기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린란드의 자원이 탐나니 미국 영토에 편입하자고 합니다. 캐나다를 향해서도 마치 미국의 속국이라도 되는 양 고압적인 자세죠.

캐나다의 굴욕은 2024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트뤼도 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자택까지 찾아가 몸을 낮췄지만, 25퍼센트의 관세 위협과 함께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어떻겠나”라는 조롱만 돌아온 겁니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 캐나다는 분노했습니다. 본격적인 반미 정서가 형성된 겁니다. 현지에서는 2019년 우리나라의 ‘노 재팬(No Japan)’ 불매 운동을 뛰어넘는 분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스하키 경기에서는 미국 국가 연주 중에 야유를 퍼붓고 커피숍에서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 대신 ‘캐나디아노(Canadiano)’라는 글씨가 적혔습니다.

이 분위기에 카니 총리는 제대로 올라탔습니다. 트럼프를 비판하고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 전제로 경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카니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경제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2025년 1월까지 카니는 본격적인 정치 경험이 없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76퍼센트의 응답자가 카니의 사진을 보고도 이름을 대지 못했을 정도죠. 하지만 평생을 걸쳐 어떤 정치가보다도 설득력 있는 경력을 쌓아 왔습니다. 하버드와 옥스퍼드를 거쳐 골드만삭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부터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맡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돌파했고 2013년부터는 영국의 영란은행 총재를 맡아 브렉시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에 기여합니다. 한마디로 카니는 ‘경제 위기 탈출 전문가’입니다.
마크 카니 총리는 한 토크쇼에서 실질적인 정계 진출 선언을 했습니다. 모범생 이미지에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카니의 이미지가 단번에 호감형으로, 게다가 신뢰할 수 있는 경제 전문가로 올라선 계기였죠. 출처: The Daily Show
캐나다는 다시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인플레이션만으로도 벅찬데 25퍼센트 관세를 물리는 트럼프라는 악재까지 겹친 겁니다. 캐나다 국민은 정치 베테랑이 아니라 ‘경제 베테랑’을 선택했습니다. 비호감도가 하늘을 찔렀던 자유당에 다시 기회를 준 겁니다. 단순히 ‘인물’을 보고 말이죠. 대선을 앞둔 우리나라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들을 놓고 봤을 때, 우리의 선택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묻게 되는 지점입니다.

Captain Canada

캐나다와 멕시코를 향한 관세율을 확정한 후,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국과 적성국을 가리지 않고 주요 무역국을 향해 이른바 ‘상호 관세’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경제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현재 90일간의 유예 기간을 갖고 있지만, 전 세계의 언론들은 트럼프가 공멸의 길을 선택했고, 그마저도 불확실성의 기간을 늘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죠.

우리는 어떤가요. 일본보다는 못하다, 중국보다는 낫다는 식의 계산을 합니다. 이건 상대 평가로 줄 세워 1등부터 5등까지 통과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1등이든, 50등이든 트럼프의 경제 실험으로 무조건 타격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대비되어 있느냐에 따라 부상의 정도가 달라질 뿐입니다.

한국 언론이 사랑하는 경쟁자, 일본의 경우를 볼까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협상장에 나타날 만큼 미국이 신경 쓰고 있는 협상국입니다. 미국은 일본과 관세 합의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밝혔지만,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트럼프 대통령,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 측의 발언에 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놓고 ‘근거를 모르겠다’라는 발언이 언론에 흘러나올 정도니까요.

중국은 사활을 걸었습니다. 리창 중국 총리는 이시바 일본 총리에게 관세 대응에 협력하자는 친서까지 보냈죠. 일본 정부는 신중한 반응이지만, 얻을 것이 있다면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시진핑 주석은 동남아 순방을 하면서 ‘내 편’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각국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일단 시간을 끄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어차피 곧 다음 정부가 출범합니다. 지금 일을 진행시켜도 뒤집힐 수 있는데 섣불리 움직여 봤자 정치적인 오해만 쌓입니다. 현재 우리 경제 관료들 개개인의 처지에서 최선의 선택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정도입니다. 한국은 90일 간의 유예 기간을 허투루 흘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멈춰선 동안 전 세계는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카니 총리에 대한 각국의 관심과 환영도 카니 총리가 ‘반트럼프 진영’의 새로운 얼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실제로 카니 총리는 영란은행 총재로 재임하던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글로벌 성장 둔화를 야기하고 있다’라는 취지로 발언한 바 있습니다. 그것도 미국 금융 시장의 축제와도 같은 잭슨홀 미팅에서 말이죠.

경제를 볼모로 한 협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MAGA에 대항할 ‘캡틴 캐나다’로서의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여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서 2030년까지 GDP의 2퍼센트 수준으로 국방비 지출을 늘리겠다는 약속이나, 북극 항로 이슈로 주목받고 있는 캐나다 북부 지역에 대한 투자 약속 등도 국제 사회에서 캐나다의 위상을 다시 보게 만들죠. 마침 올해, 캐나다는 G7 정상 회의 의장국입니다. 

우리는 친트럼프 연합에 서게 될까요, 반트럼프 연합에 서게 될까요. 불행히도 그런 문제는 현재 대선 이슈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지금 필요한 이슈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질문하고 답을 요구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시대의 의제가 정치인들 손에 달렸다는 생각은 순진합니다.

캐나다 유권자는 반트럼프 진영을 선택했습니다. 카니의 능력치에 따라 국제 질서 재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몇 년 만에 캐나다 정치가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재미있게 즐기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비전을 캐나다와 비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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