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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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우리는 집을 구독하게 됩니다.

주거의 미래

2025년 5월 1일

월세의 시대

월세가 대세가 됐습니다. 주택 임대차 계약을 맺는 세입자 열 명 중 여섯 명이 월세를 택하고 있습니다. 올해 1~2월 전국 신규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최초로 6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2021년만 해도 월세 비중이 41.7퍼센트였는데, 올해 2월 기준 61.4퍼센트까지 올랐습니다. 4년 만에 20퍼센트포인트가 상승한 겁니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전세는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드문 한국 특유의 주택 임대차 방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로도 한국말 그대로 ‘Jeonse’로 표기합니다. 외국에서도 집을 빌릴 때 보증금을 내지만, 한국식 전세처럼 매달 임차료 없이 거주하다가 계약 만료 시 보증금을 돌려받는 방식은 없습니다. 전세는 고성장, 고금리 시대와 금융 시스템의 미비가 결합해 만들어 낸 한국식 사금융입니다.

전세는 1970년대로 접어들며 보편화됩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대거 서울로 올라왔죠. 당연히 집이 필요합니다.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정부는 북유럽 복지 국가처럼 공공 임대 주택을 지을 여력이 없었죠. 그래서 그 수요를 민간에 떠넘깁니다. 주거 문제는 민간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거죠.

그런데 당시엔 지금 같은 가계 금융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대출은 수출 기업이나 받는 것이지, 개인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제도권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대기업도 명동 사채를 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민간인이 목돈을 만들려면 계 모임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집을 사려는 사람이 부족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집을 전세로 내주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임대인에게 전세금은 무이자 대출이나 다름없었죠. 임대인은 갖고 있던 돈에다 임차인에게 받은 전세금으로 집을 사고, 남은 돈은 은행에 예치하거나 사업 자금으로 썼습니다.

당시만 해도 은행 예금 이자가 연 2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임대인은 부동산을 잠깐 빌려주는 대가로 임차인에게 사실상 ‘무이자 대출’을 받고, 그 돈을 은행에 넣어 두기만 해도 3년 반쯤 지나면 원금이 두 배가 됐습니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는 시대였습니다. 매달 월세를 받는 것보다 집값 상승으로 얻는 시세 차익이 더 컸습니다. 임차인에게 받은 전세금을 종잣돈으로 다른 집을 또 사고, 집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전략이 자산 가치 극대화에 유리했습니다.

임차인 역시 다달이 나가는 돈이 없는 전세를 선호했습니다. 월세는 자금 축적 기능이 없습니다. 월급에서 월세 빼고 생활비 빼면 남는 게 없죠. 그래서 한번 월세는 영원한 월세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세는 계약 기간 동안 돈이 묶여 강제 저축 기능이 있습니다. 원금 손실 우려도 없고요. 전세는 소형 평형에서 시작해 중형 평형으로 옮기고 그러다 내 집 마련에 이르게 되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전세가 월세로 바뀌는 근본적인 원인은 주택 공급의 감소입니다. 공급이 줄어드니 매매가가 오르고, 전세가도 덩달아 오릅니다. 게다가 지금은 저성장, 저금리 시대입니다. 임대인으로선 전세 보증금을 은행에 예치해 박한 이자를 받느니, 월세를 받는 게 더 이득입니다. 또한 전세 보증금 말고도 임대인이 금융권에서 목돈을 만들 방법도 많아졌고요.

임차인도 전세보다 월세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정부가 가계 부채를 줄인다고 전세 대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또 최근 몇 년 사이에 집값보다 전세금이 높은 깡통 전세와 전세 사기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임차인의 리스크가 급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증금 떼일 걱정이 덜하고 설사 떼인다 해도 인생이 끝장나지는 않을 월세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죠.
 
이렇듯 임대인과 임차인의 수요가 맞물리면서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하는 세입자가 늘고 있습니다. 월세 전환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지금 같은 저성장 고위험 시대에 전세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전세가 아예 사라지진 않겠지만, 월세가 임대차 시장의 대세가 될 겁니다. 이제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매매로 넘어가는 패턴은 끝났습니다. 지금 집을 보유하지 않은 젊은 세대는 앞으로 월세이거나 자가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될 겁니다.
서비스로서의 주거

요즘 전·월세 전환율이 6퍼센트쯤 됩니다. 전세로 1억 원 하는 방이 있다면, 이 방을 월세로 돌리면 연 600만 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월 50만 원이죠. 임대인이 이 방을 전세로 내놓고 1억 원을 은행에 예치하면 이자 수익은 연 250만 원 내외입니다. 월 20만 8300원입니다. 제가 집주인이래도 월세를 택하겠죠.

월세 전환이 빨라지면서 주택 임대차 시장에 기업이 뛰어들고 있습니다. 사실상 수익률 0퍼센트로 집을 빌려주던 전세 상품이 사라지고 — 다시 말해 가격 경쟁력이 있던 경쟁자가 사라지고 — 그 자리를 수익률 6퍼센트 혹은 그 이상의 월세가 차지하니, 기업들로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겠죠.

국내 임대차 시장은 개인이 개인에게 전·월세를 놓는 민간 개인 임대가 공공 임대 주택을 빼면 99퍼센트에 달합니다. 집주인이 동네 아저씨, 아줌마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기업형 임대 사업은 임대인이 개인이 아니라 법인입니다. 집주인이 회사인 거죠. 북미와 유럽에선 주거를 상품과 서비스로 다루는 기업형 임대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세가 월세로 옮겨가면서 이 시장이 막 열리는 단계죠.

이런 기업형 임대용 건물을 ‘Build to Rent(BTR)’라고 합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지었다가 임대로 전환되기도 하는 기존 부동산과 달리, 애초에 임대를 목적으로 설계하고 건설된 대규모 주거 단지입니다. 대규모로 월세 놓으려고 만든 건물이죠.

북미와 영국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BTR 모델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런던에선 사모 펀드가 운영하는 BTR이 신규 주택 공급의 5분의 1을 차지합니다. 이 모델이 인기를 끄는 데엔 요즘 세대의 인생관도 한몫을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내 집 마련’을 인생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직업 이동, 도시 이동이 빈번해졌고, 안정적 삶보다 유연한 삶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연금 고갈 등으로 불확실한 미래보다 지금의 행복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BTR은 이런 삶의 방식에 딱 맞는 상품입니다. 계약 기간도 한 달부터 6개월, 12개월 등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고, 기본 가구도 제공합니다. 공용 라운지, 피트니스센터, 코워킹 스페이스를 갖춘 곳도 많죠. 주거를 서비스화(Living as a Service)해서 관리, 수리, 보안, 커뮤니티 서비스를 패키지로 제공합니다. 입주자는 주거와 생활, 커뮤니티를 ‘구독 서비스’처럼 소비합니다. 집을 빌린다기보다 삶을 구독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속한 건 역시 대형 기관 투자자입니다. 연기금, 보험사, 리츠, 펀드가 안정적인 장기 수익원을 찾다가 기업형 임대 주택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토지와 주택 자산을 헐값에 매입한 펀드들이 이를 임대용으로 운영해 지속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주거가 장기 수익형 투자 자산이 된 거죠.

국가의 실패도 이런 변화를 거들었습니다. 뉴욕, 런던, 토론토 같은 대도시에 고용이 집중되고 인구가 몰리는데, 주택 공급은 부족했습니다. 정부는 직접 공급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고, 결국 민간 기업이 BTR 방식으로 임대 주택을 대규모 공급하게 됩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코리빙하우스 ‘더 콜렉티브 올드 오크’
토지의 현금화 솔루션

세계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영국, 캐나다에만 기업형 임대 시장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깝고 집에 대해 비슷한 정서를 지닌 일본만 해도 이 시장이 활발합니다. 우리만 전세 제도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기업형 임대 시장의 발전이 늦었죠. 다만 일본의 기업형 임대 시장은 앞서 소개한 북미, 유럽과는 성장 배경이 조금 다릅니다.

다이토켄타쿠는 일본 최대의 임대 주택 기업입니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3층짜리 소형 임대 주택을 짓고, 임대 관리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영미권 임대 기업과 달리 다이토켄타쿠는 토지를 매입하진 않습니다. 토지 소유주가 회사에 토지를 맡기면 회사가 그 땅에 건물을 짓고 세입자를 모집해 월세를 놓습니다. 회사는 최장 35년의 장기 임대 계약을 통해 토지 소유주에게 매달 안정된 임대료 수익을 보장합니다. 세입자 모집과 운영 리스크는 회사 측이 떠안고요.

다이토켄타쿠가 현재 관리하고 있는 임대 주택은 123만 호입니다. 일본 내 임대 주택 관리 호수 기준으로 27년 연속 1위입니다. 현재 인천광역시의 주택 호수가 123만 호입니다. 인천에 있는 전체 주택을 민간 기업 한 곳이 관리하는 겁니다.

왜 일본에선 기업형 임대 시장이 발달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1990년대 버블 붕괴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 일본 경제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1년 사이 도쿄 땅값이 세 배가 뛰기도 했죠.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다 1991년 거품이 터지면서 땅값이 30년간 하락합니다. 땅값이 10분의 1로 떨어진 지역도 있었습니다. 방치된 건물도 속출했죠.

이런 상황에서 땅을 보유하고 있으면 고정자산세, 도시계획세 같은 세금을 매년 내야 하고, 그렇다고 땅을 팔자니 사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떨어지는데, 사는 사람으로선 지금 사면 바보니까요. 그렇다고 땅에 건물을 세우자니 건축비가 부담스럽습니다. 손실만 누적되는 딜레마 상황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땅을 가진 단카이 세대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었습니다. 땅을 그냥 뒀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자녀들이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 할 수 있습니다. 땅은 수익을 못 내더라도 시장 가치 기준으로 과세가 되니까요. 일본은 상속세 최고 세율이 55퍼센트입니다. 돈도 벌리지 않고 팔리지도 않는 땅을 갖고 있다가 세금 폭탄을 맞을 수 있죠.

이런 시기에 다이토켄타쿠 모델이 등장한 겁니다. 다이토켄타쿠는 토지 소유주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고객님 땅에 임대 주택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건축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사와 함께하는 금융 파트너사가 대출을 지원해 드립니다. 임대 주택이 완공되면 당사가 최장 35년간 임대 관리를 해드립니다. 세입자 모집부터 응대, 수선까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공실이 발생해도 저희가 책임집니다. 고객님께서는 땅을 빌려주는 대가로 매달 안정적인 고정 수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팔 수 없는 토지를 현금 창출 자산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거죠.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혔습니다. 일본 전역에 걸쳐 다세대 소형 임대 주택이 급속히 퍼집니다. 다이토켄타쿠, 다이와하우스, 미쓰이부동산, 레오팔레스21, 세키스이하우스 같은 대형 임대 기업이 성장합니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엄밀히 따지자면, 토지를 거래했다기보다 토지의 ‘현금화 솔루션’을 판매한 겁니다.

집주인이 모건스탠리

미국, 영국, 일본처럼 한국도 이제 이 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세가 주춤하니까 월세 장사가 기업도 뛰어들 만한 비즈니스가 되는 거죠. 100조 원이 넘는 자산을 굴리는 미국의 부동산 개발업체 하인스(Hines), 글로벌 투자 은행인 모건스탠리 등이 국내 주거용 임대차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전세 사기 같은 임대 시장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민간임대주택법을 개정해 외국 자본이 임대 목적의 집합 건물을 공급하는 것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모건스탠리 같은 회사가 세입자의 보증금을 떼먹을 일은 없을 테고, 개인 공급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국내 기업이든 해외 기업이든 법인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앞서 살펴봤듯 한국 주택 임대차 시장의 공급자는 공공 임대를 제외하면 99퍼센트가 개인입니다. 저성장 저금리 시대의 사회 구조상 앞으로 미국, 영국, 일본처럼 법인 임대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외국 기업들이 한국 월세 시장에 기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속속 뛰어들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10년 내로 일본처럼 특정 회사가 주택 몇십만 호를 관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국내 기업의 진출도 활발합니다. KT 자회사 KT에스테이트는 최근 서울 광진구에 ‘리마크빌 이스트빌’이라는 기업형 임대 주택을 오픈했습니다. 벌써 7번째 건물입니다. 지하 7층에 지상 34층, 282가구 규모입니다. SK 자회사 SK디앤디도 ‘에피소드’라는 브랜드를 운영합니다. 코리빙 아우스 ‘맹그로브’를 운영하는 엠지알브이(MGRV)는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에 공동으로 서울 중심에 1500실 규모의 1~2인용 주거 시설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이런 곳들은 일반적인 원룸이나 다세대 주택과 확연히 다릅니다. 입주민을 위한 라운지는 물론이고 공용 음악, 영상 감상실을 갖춘 곳도 있습니다. 오락, 운동, 휴식, 업무를 할 수 있는 편의 시설도 있죠. 방은 좀 좁을 수 있지만, 혼자라면 꿈도 못 꿀 고급 공용 시설과 장비를 내 것처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대신 비쌉니다. 지역과 브랜드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대개 1인실이 월 100만 원 수준입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내외 대기업들이 왜 한국 월세 시장에 뛰어들까요? 일단 사회 구조적 변화가 있습니다. 국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5퍼센트, 2인 가구가 29퍼센트를 차지합니다. 1~2인 가구를 합하면 64퍼센트입니다. 당연히 작은 집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게다가 인구는 줄어드는데, 가구 수는 늘어납니다. 임대 기업으로선 고객이 증가하는 셈입니다. 작은 땅에 높은 건물을 올려서 다닥다닥 붙은 방을 월세로 놓을 수 있으니 수익률이 올라가는 가구 구성입니다.

자산 부동화도 임대 기업에는 기회가 됩니다. 한국도 일본처럼 토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개발 능력이 없는 개인이 늘고 있습니다. 땅만 있고 통장에 잔고는 없는데, 나이는 듭니다. 증여세와 상속세 문제가 불거집니다. 땅을 팔거나(하지만 살 사람은 없고), 땅을 굴려 돈을 벌어야 합니다. 임대 기업에 땅을 맡기는 것도 좋은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의 공공 임대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민간 주도의 소형 임대 시장을 활성화할 가능성도 크고요. 기업으로선 뛰어들 만한 비즈니스가 된 겁니다.
SK디앤디의 에피소드 성수 101
주택의 금융화

집주인이 개인에서 기업으로 바뀌어 가는 흐름은 단순히 임대차 계약서의 임대인 이름이 바뀌는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와 경제 구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변하는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전세에서 월세로의 전환, 개인 임대인에서 기업 임대인으로의 전환은 부동산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상식을 뒤엎습니다.

과거 땅과 집은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소유하고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부동산 가치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개인이 관리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엔 매매가 70억 원이 넘는 25평 아파트가 이미 등장했습니다. 자산의 대형화, 복잡화, 기관화로 부동산도 이제 전문 비즈니스의 영역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집이 생계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비트코인 같은 투자 상품이 되어 갑니다. 물론 과거에도 집은 투자 상품이었지만, 그때는 집 한 채 가지고 세를 놔 먹고살거나 차익을 실현하는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집의 유동성이 훨씬 커졌습니다. 기업형 임대인은 단순히 임대료만 따지는 게 아니라, 공실률과 운용 비용, 리스크 헤지, 매각 이익까지 계산합니다. 집이 단순 자산에서 운용하는 자산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가속하면 토지와 주택은 더 이상 사서 묻어 두는 게 아니라, 운용하고 참여하는 자산이 됩니다. 최근 ‘주택의 금융화’라는 말이 학계에서 회자하는데요, 금융 부문이 주택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택 금융화가 더 진전되면 주택은 거주 공간이나 차익 실현 정도를 거두는 자산이 아니라 금융 상품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파생 금융 상품처럼 복잡성을 지닌 투자 상품이 됩니다.

주택 금융화와 기업형 임대 시장이 본격화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선 임대차 계약이 사적 네트워크에서 시장 기반 관계로 바뀔 겁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집주인과 세입자는 이웃처럼 개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월세가 좀 밀려도 며칠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러나 기업형 임대는 계약과 규정, 시스템으로 관리됩니다. 개인 간의 유연함은 사라지고, 계약서대로 합니다. 월세를 1초만 밀려도 1층 출입문이 열리지 않으며 “결제 실패로 키 카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커뮤니티 매니저에게 문의 바랍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오겠죠. 신뢰-관계 사회에서 계약-시스템 사회로 이행합니다.

거주권에 대한 인식도 바뀝니다. 지금까지도 소유는 가장 안정적인 거주 방식입니다. 집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죠. 하지만 기업형 임대가 보편화하면 소유가 아닌 임대(구독)가 일반적이고도 지속 가능한 거주 방식으로 채택될 수 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MS오피스를 정품 CD로 구입해 썼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죠. 소유하지 않고 구독합니다. 집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도시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개인 임대는 —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 지역별로 개성을 지니지만, 기업형 임대는 표준화된 건축과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기업형 임대는 도시를 더 균질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획일적이고 무표정하게 만듭니다. 동대문과 합정과 쌍문동의 모습이 비슷해지는 겁니다. 도시는 더 효율적이지만 덜 인간적인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집은 더는 정서적 기반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포트폴리오 중 하나가 되어 있고, 이웃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와 고객 관계로 변하고 있고, 거주는 삶이 아니라 구독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을 겁니다. 주택의 금융화는 인간관계의 계약화, 삶의 서비스화를 촉진합니다.

변화를 가속하는 것들

주거 시장의 변화는 홀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AI와 자동화의 고도화, 정치·경제·사회 변화, 인간 심리의 변화까지 모두 맞물려 복합 가속합니다.

AI는 주거를 초개인화합니다. AI는 입주자의 데이터를 분석해 그 사람에게 맞는 집을 자동 추천합니다. AI 기반 스마트홈이 집마다 있는 가스보일러처럼 보편화하면 집이 서비스화됩니다. 조명과 온도 조절, 보안 관리까지 AI 시스템이 자동으로 관리하고, 시설 관리부터 입주자 민원 처리까지 AI 에이전트가 담당하게 됩니다. 기업 입장에선 운영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습니다. 비용이 줄어드니 더 많은 기업이 임대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겠죠.

로봇과 자동화를 활용한 건설도 변화를 가속합니다. 로봇 시공, 3D 프린팅 건축처럼 저비용으로 초단기 시공이 가능한 주택이 등장합니다. 일본에선 이미 프리패브(pre-fab) 공법이 임대 주택 건설의 공식입니다. 공장에서 모듈을 생산하고 현장에서는 조립만 합니다. 대규모로 빠르게 표준 주거 단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주택이 공산품처럼 만들어지는 거죠.

플랫폼 경제도 변화를 앞당깁니다. 이제 집도 플랫폼 안에서 소비됩니다. 집을 구하는 것부터 계약, 입주, 관리까지 하나의 앱에서 끝나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월세, 관리비, 부가 서비스 요금을 하나의 구독료로 결제하는 패키지가 등장하겠죠. 결국 주거는 플랫폼 상품으로 흡수됩니다. 집은 플랫폼에서 여러 상품 중 — 청소 서비스 결합 상품, 세탁 서비스 결합 상품 등 —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구독하는 생활재가 될 수 있습니다. 유플러스의 ‘유독’처럼 말이죠.

정치 상황도 기업형 임대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겁니다. 주거의 서비스화가 진전되면 주거를 ‘공공’ 서비스로 바라보는 인식이 강화하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이 주거를 기본 권리라고 요구하게 될 겁니다. 월세부터 보안 서비스까지 국가가 일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커질 수 있죠. 정부는 기업형 임대를 장려하는 동시에, 임대료 규제, 공공과 민간의 혼합 모델 같은 정책을 추진하게 될 겁니다. 기업을 규제하는 만큼 예산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주겠죠. 기업으로선 나쁠 게 없습니다. 국가 사업에 참여하는 것만큼 쉽게 돈 버는 일이 없으니까요.
 
이러한 기술, 경제, 정치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원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원합니다. 소속감을 원하면서도 소유의 부담과 고정성을 싫어합니다. 이런 모순이 가벼운 커뮤니티, 자율적 네트워크, 계약적 공동체의 부상을 이끕니다. 의무감 없이 원할 때만 참여하는 모임이죠. 브랜드 주거는 이런 심리에 딱 들어맞습니다. 앞으로 거주지를 선택하는 일은 공동체가 아니라 경험을 선택하는 게 됩니다.

기업형 임대의 비즈니스 모델

기업 입장에서 단순히 공간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는 수익률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까 전·월세 전환율이 6퍼센트쯤 된다고 했는데요, 거금 들여서 6퍼센트 먹자고 신사업에 뛰어들 대기업은 없습니다. 구독 서비스 성장의 열쇠는 한 번 열은 지갑을 계속 열려 있게 하는 겁니다. 신규 멤버 확보도 중요하지만, 신규 멤버를 얻으려면 판매관리비를 퍼부어야 합니다. 기존 멤버의 지갑에서 돈을 더 꺼내는 편이 수익성이 훨씬 좋습니다. 결국 부가 서비스 판매에서 성패가 갈립니다.

기업형 임대의 기본 비즈니스 모델은 이렇습니다. 임대료 수입이 기본이고, 여기에다 부가 서비스 수입이 추가됩니다. 지출 항목으론 건설비, 운영비, 인건비, 유지 보수비, 마케팅비 등이 있습니다. 수익률을 방어하려면 우선 공실률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장기 거주를 유도해야겠죠. 여기에다 프리미엄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요, 그러려면 커뮤니티 서비스를 강화해야 합니다.

한 달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살러 들어온 사람에게 숙박 외에 다른 것도 파는 겁니다. 공용 라운지, 키친, 정원, 오락 시설을 꾸리고, 북클럽과 요가 모임 같은 입주자 모임을 개설합니다. 커뮤니티 앱에서 공간 예약을 하고, 모임 멤버를 모집하고, 중고 물품도 거래할 수 있게 합니다. 입주자 간 네트워크를 강화해서 장기 거주를 유도하는 동시에, 부가 서비스와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판매해서 추가 수익을 올립니다.

부가 서비스는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만나고 대화하고 생활하는 모든 걸 유료 패키지로 제공하는 겁니다. 청소, 세탁, 배달, 식사 서비스를 월정액 구독형으로 판매할 수 있고, 반려동물 가구를 대상으로 펫케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플리마켓이나 클래스 같은 프로그램을 열어 입주자와 수익을 쉐어할 수도 있고요. 핵심은 단순 임대료 수익 외에 월 구독 수익(Monthly Recurring Revenue·MRR)을 창출하는 겁니다.

임대 주택은 데이터 기반으로 운영될 겁니다. 거주 만족도 조사, 공실률 분석, 시설 이용 패턴 분석, 동네 시세와 수요 공급에 따른 임대료 산출, 세입자 렌트 신용 점수 분석 등이 모두 AI로 자동화될 수 있습니다. 주먹구구식 건물 임대업이 아니라, 돈이 벌릴 수밖에 없는 구조로 AI가 사업을 끌고 가게 될 겁니다. “공실률 목표는 5퍼센트 이하, 평균 거주 기간은 3년 이상, 부가 서비스 매출 비중은 30퍼센트, ROE는 9퍼센트 이상” AI에 이런 숫자를 입력하면 임대 주택이 그 방향대로 굴러가게 되겠죠.

종합하면, 미래의 주택 임대 기업은 공간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삶의 경험을 구독시키는 것을 수익 모델로 삼게 됩니다. 월세로 버티고, 커뮤니티로 이탈을 막고, 부가 서비스로 추가 수익을 만드는 방식으로 운영될 겁니다. 사실 딱히 새로운 방식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낯설 뿐 외국에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요. 영국의 콜렉티브 올드 오크(Collective Old Oak)가 대표적이죠. 이들은 집을 넘어 ‘사회적 소속감’까지 팔고 있습니다.
영국 콜렉티브 올드 오크의 로비
2035년 한국형 주거 시장

한국 주거 시장도 결국 미국, 영국, 일본을 따라가게 될 겁니다. 서울과 수도권 주요 지역에서 개인 임대 주택의 비중이 줄고, 대기업과 펀드가 운영하는 임대 주택 비중이 증가할 겁니다.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장기 모기지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전세 제도와 ‘가족 금융’ 덕분에 시장 도입이 지연된 겁니다. 한국 주택 구입 자금 중에 은행 대출로 조달하는 자금은 40퍼센트 수준입니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차액은 부모가 도와주는 거죠. 이런 경향이 글로벌 평균을 따라가게 되면 주택의 금융화가 진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2035년쯤에는 주거는 소유가 아니라 구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10대, 20대가 20대, 30대가 되면 ‘내 집 마련’보다는 ‘좋은 집 구독’이 목표가 될지 모릅니다. 월정액 요금을 내고 유지 보수, 청소 등 기본 서비스, 보안까지 모두 포함된 주거 서비스를 이용하는 형태가 주거의 디폴트값이 될 수 있습니다. 1개월 단위의 초단기 계약 같은 새로운 주거 형태가 점차 흔한 일이 될 겁니다.

주거가 구독이 되면 주거 데이터 산업도 등장합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수집되고, 이 데이터가 보험, 대출, 마케팅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세입자로서 얼마나 믿을 만한지를 수치로 평가하는 거죠. 월세 연체 이력, 파손과 소음 민원 같은 계약 위반 이력, 현재 소득 수준과 부채 비율, 얼마나 자주 이사했는지 거주 안정성 같은 지표를 평가하게 되겠죠. 이 점수가 낮으면 입주를 거절하거나 보증금 증액을 요구하거나 추가 심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주거 전용 신용 점수 같은 거죠, 주거가 자산이 아니라 서비스가 되면 벌어질 일입니다.

기업형 임대가 확산하면 ‘우리 동네’라는 감정은 사라질 겁니다. 지금도 약간 그렇지만, 갈수록 주거지를 월세, 편의성, 교통성 중심의 기능적 거주지로 바라보게 되겠죠. 주거를 경험으로 소비하게 되면 집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줄어들고, 어떤 라이프스타일의 공간에서 살 것인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호텔형 주거, 커뮤니티형 셰어하우스, 1인 주거, 2인 주거, 여성 전용 주거 같은 맞춤형 주거가 점점 일반화하겠죠.

도시 양극화는 심화할 수 있습니다. 고가의 기업형 임대 주택은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깨끗하고 안전하고, 수영장과 바까지 갖추고 있겠지만, 소수의 부유층만 이용할 수 있겠죠. 저소득층은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하는 노후 단지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료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했던 과거의 동네 공동체가 사라진 상태라 주거 만족도가 더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국 부동산 시장은 3층 구조로 재편될 수 있습니다. 최상층부에는 초고가 소유 부동산이 있습니다. 강남, 용산, 판교, 제주와 일부 광역시의 노른자 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소수 부유층이 직접 소유하는 구조입니다. 가운데 층은 대형 기업형 임대 부동산이 차지합니다. 수도권과 광역시의 핵심 지역에 중산층과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임대 주택을 서비스합니다. 저층은 공공 임대 주택입니다. 저소득층, 청년층, 노년층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 공공 기관이 운영하게 됩니다.

지금 주거는 건물 브랜드 중심입니다. 힐스테이트와 푸르지오와 e편한세상과 아이파크와 롯데캐슬과 래미안 같은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살아가는 경험이 더 중요해집니다. 주거가 LaaS(Living-as-a-Service)로 제공되면서 20~30대 1인 가구가 사는 스마트 싱글 하우스, 30~40대 부부가 사는 패밀리 리빙 하우스, 60대 이상 은퇴자가 사는 액티브 시니어 하우스, 프리랜서와 원격 근무자가 사는 디지털 노마드 코리빙 하우스, 20~40대 여성이 사는 여성 전용 세이프 하우스…… 이런 식으로 입주자의 라이브스타일별로 주거가 커스터마이징됩니다.

지금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저 돈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10년 후에는 어느 주거 브랜드에 사는지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집을 선택하는 일은 개인화되고, 서비스화되고, 정체성 기반으로 세분화합니다. 물론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임차인이 맞이할 변화

기업형 임대가 확산해서 주거가 사적 거래에서 공적 시장 거래로 전환되면 임차인에게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우선 주거 안정성이 높아집니다. 개인 집주인은 언제든지 “내가 들어가서 살려고요”라고 말하면서 계약 갱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형 임대는 수익 유지가 운영 목적이라 세입자가 월세를 밀리지 않는 한 내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거래 과정도 투명해지겠죠. 선금을 걸어 두거나 이면 계약서를 쓸 일이 없어집니다. 기업형 임대는 표준 계약서에 따라 가격을 정하고 계약을 갱신하고 퇴거 절차를 밟게 됩니다. 모든 과정이 명문화되어 있어 부당한 요구를 당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주거 품질과 서비스도 좋아집니다. 기업형 임대는 시설 하자 보수, 청소, 보안 서비스까지 패키지로 제공합니다. 특히 1인 가구 대상 임대에선 인터넷, 가전, 청소, 커뮤니티 시설까지 세트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한 공간 임대차 계약이 아니라 생활 서비스 이용 계약이 되면서 삶의 질이 올라갑니다.

이 모든 장점에는 비용이 따릅니다. 결국 월세가 올라갑니다. 기업형 임대업자는 수익을 최우선합니다. 자취방 주인 할머니처럼 학생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시장 가격을 철저히 반영하고, 거기에다 프리미엄까지 얹어 월세를 청구합니다. 시장이 아니라 백화점이니, 가격 협상은 없습니다.

계약 조건도 빡빡해집니다. 월세 연체나 시설 파손 같은 계약 위반 시에는 즉각적인 법적 조치가 이뤄질 수 있죠. 개인 임대라면 집주인 재량으로 웬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기업은 그렇게 운영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매뉴얼대로 진행합니다. 임대 사무실의 사례이긴 합니다만, 몇 년 전에 공유 오피스 위워크에 입주했던 기업이 사무실 벽에 양면테이프로 그림을 붙였다가 떼면서 테이프 자국이 남았는데, 위워크가 페인트 도장 작업 비용으로 252만 원을 청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 임대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준의 파손이었는데 말입니다.

청년과 은퇴자의 월세

신문, 잡지, OTT부터 정수기, 냉장고, 에어컨, 자동차까지 모든 걸 구독하는 시대입니다. 집도 10~20년 내로 그렇게 되겠죠. 그때도 집을 소유하는 부유층이 여전히 있겠지만, 대다수는 주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될 겁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월세를 내는 사람이 많고, 전세나 자가로 살더라도 은행에 사실상 월세를 내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다만 구독형 주거가 확산할수록 사회 초년생과 은퇴자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 기업형 임대 주택은 1인실이 월 100만 원쯤 하는데, 고정 수입이 없는 사람에겐 너무 큰 부담이죠. 게다가 기업이든 개인 임대든 월세는 전반적으로 오를 겁니다. 그동안은 전세 수요가 월세 인상을 억누르고, 월세 수요가 전세 보증금 인상을 억눌렀는데, 강력한 라이벌(전세)이 사라지니 월세가 오를 수밖에 없죠. 정책적 지원이 필요할 텐데요, 젊은 층의 주거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서는 정책, 시장, 기업이라는 세 축이 모두 필요합니다.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공공 지원 민간 임대 모델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임대료의 일정 비율을 보조하거나, 공동 택지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대신 기업이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시장가 대비 70~80퍼센트 수준의 월세 주택을 일정 비율 이상 공급하도록 하는 겁니다. 실제로 SK디앤디의 임대 주택 ‘에피소드’는 일부 지점을 숙명여대의 지원을 받아 학생 기숙사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급여 소득이 끊기는 은퇴자는 매달 고정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은퇴자를 위해서는 고정 렌트 패키지 같은 상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초기 계약을 할 때 10년간 월세 인상 없는 고정 렌트 계약을 맺는 거죠. 또 보증금을 많이 내고 이후 월세를 할인받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보험처럼 주거 안정 상품이 출시될 수도 있을 테고요. 은퇴자가 가진 자산을 담보로 설정하고 그 담보로 렌트를 지원받는 역모기지 렌트 플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부가 민간 브랜드 주거 기업과 협력해 저소득 은퇴자를 위한 공공 주거 상품을 만들 수도 있겠죠. 예컨대 60세 이상, 소득 하위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임대 주택에 저가 월세로 입주 가능하게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다 복지 서비스를 연계할 수도 있고요. 기업형 임대 주택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화하는 겁니다.

은퇴자를 대상으로 코리빙 모델을 확산하는 건 여러모로 장점이 있습니다. 소규모 공동 생활형의 주거를 갖춰서, 개인 방은 작게 하고 주방, 라운지 같은 공용 공간을 크게 하면 렌트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생활을 통해 고립도 막을 수 있죠.

본질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집이 구독하는 서비스가 되면 개인이 젊을 때부터 주거 연금, 주거 보증 보험 같은 새로운 금융 상품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국가 차원에선 기본소득형 주거 보조 정책을 검토해야 하겠죠. 도시 설계 역시 연금 외 현금 흐름이 없는 은퇴자를 고려해 저비용, 고안정 주거지를 따로 조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겁니다.

기업형 임대, 구독형 주거의 구체적인 미래를 현재로선 예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글로벌 트렌드와 기술의 발전, 인구 구조와 고령화, 1인 가구 증가, 개인 심리의 변화 등을 종합할 때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독형 주거는 젊은 시절엔 자유를 줄 수 있지만, 은퇴 후엔 새로운 생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 비중이 60퍼센트를 넘은 지금부터, 고민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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