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년 한국형 주거 시장
한국 주거 시장도 결국 미국, 영국, 일본을 따라가게 될 겁니다. 서울과 수도권 주요 지역에서 개인 임대 주택의 비중이 줄고, 대기업과 펀드가 운영하는 임대 주택 비중이 증가할 겁니다.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장기 모기지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전세 제도와 ‘가족 금융’ 덕분에 시장 도입이 지연된 겁니다. 한국 주택 구입 자금 중에 은행 대출로 조달하는 자금은 40퍼센트
수준입니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차액은 부모가 도와주는 거죠. 이런 경향이 글로벌 평균을 따라가게 되면 주택의 금융화가 진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2035년쯤에는 주거는 소유가 아니라 구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10대, 20대가 20대, 30대가 되면 ‘내 집 마련’보다는 ‘좋은 집 구독’이 목표가 될지 모릅니다. 월정액 요금을 내고 유지 보수, 청소 등 기본 서비스, 보안까지 모두 포함된 주거 서비스를 이용하는 형태가 주거의 디폴트값이 될 수 있습니다. 1개월 단위의 초단기 계약 같은 새로운 주거 형태가 점차 흔한 일이 될 겁니다.
주거가 구독이 되면 주거 데이터 산업도 등장합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수집되고, 이 데이터가 보험, 대출, 마케팅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세입자로서 얼마나 믿을 만한지를 수치로 평가하는 거죠. 월세 연체 이력, 파손과 소음 민원 같은 계약 위반 이력, 현재 소득 수준과 부채 비율, 얼마나 자주 이사했는지 거주 안정성 같은 지표를 평가하게 되겠죠. 이 점수가 낮으면 입주를 거절하거나 보증금 증액을 요구하거나 추가 심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주거 전용 신용 점수 같은 거죠, 주거가 자산이 아니라 서비스가 되면 벌어질 일입니다.
기업형 임대가 확산하면 ‘우리 동네’라는 감정은 사라질 겁니다. 지금도 약간 그렇지만, 갈수록 주거지를 월세, 편의성, 교통성 중심의 기능적 거주지로 바라보게 되겠죠. 주거를 경험으로 소비하게 되면 집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줄어들고, 어떤 라이프스타일의 공간에서 살 것인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호텔형 주거, 커뮤니티형 셰어하우스, 1인 주거, 2인 주거, 여성 전용 주거 같은 맞춤형 주거가 점점 일반화하겠죠.
도시 양극화는 심화할 수 있습니다. 고가의 기업형 임대 주택은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깨끗하고 안전하고, 수영장과 바까지 갖추고 있겠지만, 소수의 부유층만 이용할 수 있겠죠. 저소득층은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하는 노후 단지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료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했던 과거의 동네 공동체가 사라진 상태라 주거 만족도가 더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국 부동산 시장은 3층 구조로 재편될 수 있습니다. 최상층부에는 초고가 소유 부동산이 있습니다. 강남, 용산, 판교, 제주와 일부 광역시의 노른자 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소수 부유층이 직접 소유하는 구조입니다. 가운데 층은 대형 기업형 임대 부동산이 차지합니다. 수도권과 광역시의 핵심 지역에 중산층과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임대 주택을 서비스합니다. 저층은 공공 임대 주택입니다. 저소득층, 청년층, 노년층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 공공 기관이 운영하게 됩니다.
지금 주거는 건물 브랜드 중심입니다. 힐스테이트와 푸르지오와 e편한세상과 아이파크와 롯데캐슬과 래미안 같은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살아가는 경험이 더 중요해집니다. 주거가 LaaS(Living-as-a-Service)로 제공되면서 20~30대 1인 가구가 사는 스마트 싱글 하우스, 30~40대 부부가 사는 패밀리 리빙 하우스, 60대 이상 은퇴자가 사는 액티브 시니어 하우스, 프리랜서와 원격 근무자가 사는 디지털 노마드 코리빙 하우스, 20~40대 여성이 사는 여성 전용 세이프 하우스…… 이런 식으로 입주자의 라이브스타일별로 주거가 커스터마이징됩니다.
지금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저 돈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10년 후에는 어느 주거 브랜드에 사는지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집을 선택하는 일은 개인화되고, 서비스화되고, 정체성 기반으로 세분화합니다. 물론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임차인이 맞이할 변화
기업형 임대가 확산해서 주거가 사적 거래에서 공적 시장 거래로 전환되면 임차인에게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우선 주거 안정성이 높아집니다. 개인 집주인은 언제든지 “내가 들어가서 살려고요”라고 말하면서 계약 갱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형 임대는 수익 유지가 운영 목적이라 세입자가 월세를 밀리지 않는 한 내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거래 과정도 투명해지겠죠. 선금을 걸어 두거나 이면 계약서를 쓸 일이 없어집니다. 기업형 임대는 표준 계약서에 따라 가격을 정하고 계약을 갱신하고 퇴거 절차를 밟게 됩니다. 모든 과정이 명문화되어 있어 부당한 요구를 당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주거 품질과 서비스도 좋아집니다. 기업형 임대는 시설 하자 보수, 청소, 보안 서비스까지 패키지로 제공합니다. 특히 1인 가구 대상 임대에선 인터넷, 가전, 청소, 커뮤니티 시설까지 세트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한 공간 임대차 계약이 아니라 생활 서비스 이용 계약이 되면서 삶의 질이 올라갑니다.
이 모든 장점에는 비용이 따릅니다. 결국 월세가 올라갑니다. 기업형 임대업자는 수익을 최우선합니다. 자취방 주인 할머니처럼 학생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시장 가격을 철저히 반영하고, 거기에다 프리미엄까지 얹어 월세를 청구합니다. 시장이 아니라 백화점이니, 가격 협상은 없습니다.
계약 조건도 빡빡해집니다. 월세 연체나 시설 파손 같은 계약 위반 시에는 즉각적인 법적 조치가 이뤄질 수 있죠. 개인 임대라면 집주인 재량으로 웬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기업은 그렇게 운영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매뉴얼대로 진행합니다. 임대 사무실의 사례이긴 합니다만, 몇 년 전에 공유 오피스 위워크에 입주했던 기업이 사무실 벽에 양면테이프로 그림을 붙였다가 떼면서 테이프 자국이 남았는데, 위워크가 페인트 도장 작업 비용으로 252만 원을 청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 임대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준의 파손이었는데 말입니다.
청년과 은퇴자의 월세
신문, 잡지, OTT부터 정수기, 냉장고, 에어컨, 자동차까지 모든 걸 구독하는 시대입니다. 집도 10~20년 내로 그렇게 되겠죠. 그때도 집을 소유하는 부유층이 여전히 있겠지만, 대다수는 주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될 겁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월세를 내는 사람이 많고, 전세나 자가로 살더라도 은행에 사실상 월세를 내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다만 구독형 주거가 확산할수록 사회 초년생과 은퇴자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 기업형 임대 주택은 1인실이 월 100만 원쯤 하는데, 고정 수입이 없는 사람에겐 너무 큰 부담이죠. 게다가 기업이든 개인 임대든 월세는 전반적으로 오를 겁니다. 그동안은 전세 수요가 월세 인상을 억누르고, 월세 수요가 전세 보증금 인상을 억눌렀는데, 강력한 라이벌(전세)이 사라지니 월세가 오를 수밖에 없죠. 정책적 지원이 필요할 텐데요, 젊은 층의 주거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서는 정책, 시장, 기업이라는 세 축이 모두 필요합니다.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공공 지원 민간 임대 모델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임대료의 일정 비율을 보조하거나, 공동 택지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대신 기업이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시장가 대비 70~80퍼센트 수준의 월세 주택을 일정 비율 이상 공급하도록 하는 겁니다. 실제로 SK디앤디의 임대 주택 ‘에피소드’는 일부 지점을 숙명여대의 지원을 받아 학생 기숙사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급여 소득이 끊기는 은퇴자는 매달 고정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은퇴자를 위해서는 고정 렌트 패키지 같은 상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초기 계약을 할 때 10년간 월세 인상 없는 고정 렌트 계약을 맺는 거죠. 또 보증금을 많이 내고 이후 월세를 할인받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보험처럼 주거 안정 상품이 출시될 수도 있을 테고요. 은퇴자가 가진 자산을 담보로 설정하고 그 담보로 렌트를 지원받는 역모기지 렌트 플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부가 민간 브랜드 주거 기업과 협력해 저소득 은퇴자를 위한 공공 주거 상품을 만들 수도 있겠죠. 예컨대 60세 이상, 소득 하위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임대 주택에 저가 월세로 입주 가능하게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다 복지 서비스를 연계할 수도 있고요. 기업형 임대 주택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화하는 겁니다.
은퇴자를 대상으로 코리빙 모델을 확산하는 건 여러모로 장점이 있습니다. 소규모 공동 생활형의 주거를 갖춰서, 개인 방은 작게 하고 주방, 라운지 같은 공용 공간을 크게 하면 렌트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생활을 통해 고립도 막을 수 있죠.
본질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집이 구독하는 서비스가 되면 개인이 젊을 때부터 주거 연금, 주거 보증 보험 같은 새로운 금융 상품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국가 차원에선 기본소득형 주거 보조 정책을 검토해야 하겠죠. 도시 설계 역시 연금 외 현금 흐름이 없는 은퇴자를 고려해 저비용, 고안정 주거지를 따로 조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겁니다.
기업형 임대, 구독형 주거의 구체적인 미래를 현재로선 예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글로벌 트렌드와 기술의 발전, 인구 구조와 고령화, 1인 가구 증가, 개인 심리의 변화 등을 종합할 때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독형 주거는 젊은 시절엔 자유를 줄 수 있지만, 은퇴 후엔 새로운 생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 비중이 60퍼센트를 넘은 지금부터, 고민하고 준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