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3일, 워런 버핏이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올해 말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버핏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투자자였습니다. 숫자가 증명합니다.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는 1965년 인수될 당시에 비해 550만 퍼센트 이상 시장 가치가 성장했습니다. 같은 기간 S&P 500 지수는 3만 9000 퍼센트 성장했고요.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 만한 제2의 버핏은 나오기 힘듭니다. 그가 매우 독보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리했고 빨리 시작했으며 몰두했습니다. 운도 좋았죠.
워런 버핏
버핏은 11살의 나이에 주식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1942년 당시의 나이 감각이 지금과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꽤 심한 조기 교육입니다. 정작 버핏 본인은 더 어린 나이에 시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요. 게다가 버핏은 투자에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무언가에 매료된 10대의 집착이 얼마나 경이롭고 무서운 것인지 우리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음악이나 시에 빠진 것처럼, 버핏은 기업의 재무제표를 읽으며 집안을 돌아다니다 가구에 부딪치고 세금이나 상각 일정 같은 것에 몰두하며 즐거움을 찾았죠.
그렇게 애정이 집착으로 발전하면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꽂혀 버린’ 음악을 일주일쯤 반복해서 듣다 보면 보컬의 숨소리, 기타리스트의 특이한 습관 같은 것을 알게 되죠. 버핏은 70년이 넘는 경력 동안 10만 건 이상의 재무제표를 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리한 사람이 많이 들여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지나칠 일종의 ‘공식’ 같은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버핏에 관해 “인간의 형태를 한 인공지능”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하여 완벽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냈던 역사에 대한 찬사였을 겁니다.
게다가 시대도 잘 타고났습니다. 1930년생인 버핏은 자본주의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한 셈이니까요. 대공황 직후 주식 시장이 저평가되어 있던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고, 20대로 접어든 1950년대부터 시장이 폭발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전후 복구가 시작되면서 경제 성장률이 치솟았고 금본위제가 살아 있어 환율 리스크도 없던 시절이었죠. 1953년 버핏은 신뢰할 수 있는 지인 7명으로만 구성된 사모펀드 ‘버핏 어소시에이츠(Buffett Associates)’를 시작합니다. 이 사모펀드가 규모를 늘려 ‘버핏 파트너십(Buffett Partnership)’으로 성장했고요. 1969년 버핏 파트너십이 해산될 당시까지 연평균 25.3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S&P 500 지수의 수익률이 10.5퍼센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준이었죠.
하지만 무엇보다 버핏의 가장 큰 운은 사람이었습니다. 버핏의 일생을 통틀어 결정적인 사람을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 꽤 많을 겁니다. 그러나 ‘오마하의 현자’가 따랐던 멘토는 두 명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시대에 만났죠.
벤저민 그레이엄
요즘엔 찾아보기 힘들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누군가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는 광경을 목격할 일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태우지 않고 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면 남은 부분을 공짜로 취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흡연 자체가 건강에 좋지 않은데 비위생적이기까지 한 일입니다. 물자가 풍요롭지 않던 시대에나 벌어졌던 일이죠. 그런데 주식 시장에도 풍요롭지 않은 시대는 있었습니다.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는 한 모금밖에 남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헐값에 샀기 때문에 그 한 모금은 전부 이익이 됩니다.”
워런 버핏이 1989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 서한에 적은 내용입니다. 버핏의 초기 투자는 이 담배꽁초 투자 기법(
Cigarette butt investing)에 기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법을 버핏에게 전수한 사람이 바로 벤저민 그레이엄이었고요. 그레이엄은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버핏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고, 버핏을 고용해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준 고용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레이엄은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를 만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925년 그레이엄-뉴먼 투자회사를 설립한 이후 월스트리트는 달라졌죠. 그 이전까지 월스트리트는 야만과 도박의 거리였습니다. 투자가들은 개별 기업의 역량은 뒷전으로 하고, 단기간의 가격 변동만을 쫓아 돈을 던지는 식으로 일했죠.
하지만 뛰어난 수학자였던 그레이엄은 장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기업의 현금 흐름과 대차 대조표를 면밀히 분석해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아 평가 절하된 기업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가치보다 주가가 너무 낮은 기업들을 골라낸 겁니다. 투자가 분석과 전략의 게임이 된 것은 그레이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레이엄은 ‘가치 투자’의 창시자입니다.
그레이엄이 남긴 투자 대중서 《
현명한 투자자》에 등장하는 ‘Mr. Market’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면 가치 투자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Mr. Market, 즉 시장은 조울증 환자의 특성이 있습니다. 감정적이고, 기분이 들떠 있고,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시장이 합리적이지 못하니 실제 기업의 가치와 주식 가격 사이에 언제든지 괴리가 발생할 수 있죠. 시장이 우울하면 주가는 떨어질 테니까요. 저가에 매수해서 고가에 매도할 기회입니다.
이때 기업이 얼마나 저평가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투자자는 장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나 적정 가치에 대한 계산은 언제든 틀릴 수 있겠죠. 요즘처럼 기업 IR 자료가 상세하게 공개되는 시대에도 그럴진대, 1950년대, 60년대에는 말도 못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계산이 틀릴 것을 대비해 ‘안전 마진(Margin of safety)’을 둬야 합니다. 기업 가치가 주식 가격보다 높다고 무조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작아도 20퍼센트, 30퍼센트는 되어야 투자하라는 것이죠. 그래야 내 계산에 오차가 좀 있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을 테니까요.
이런 방식의 투자가 가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경험한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을 기피했기 때문입니다. 10월 29일 마감까지 5거래일 동안 다우지수가 24.8퍼센트 급락했습니다. 대공황의 시작이었죠.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호황기가 찾아왔지만, 악몽을 잊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는 법입니다. 길거리에 쌓인 꽁초들만큼이나 저평가된 기업이 쌓여 있었죠.
하지만 시장은 변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자본주의가 성숙하고, 주식 시장과 투자자들도 점차 고도화합니다. 그레이엄은 투자를 일종의 ‘지적 유희’로 여겼지만, 젊은 버핏은 더 큰 성공을 원했고요.
찰리 멍거
그레이엄에 대한 버핏의 존경과 찬사는 영원하겠지만, 버핏이 주운 담배꽁초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악의 꽁초는 버크셔 해서웨이입니다. 그것도 다 태워 필터도 제대로 남지 않은 꽁초였죠. 버핏은 1965년 5월 버크셔 해서웨이를 인수했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투자사로 탈바꿈했지만, 당시만 해도 다 쓰러져가는 섬유 제조 업체였습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공장의 기계 등 유형 자산의 상태도 엉망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몇 년 후부터는 아시아 지역의 신흥국들이 새로운 제조 메카로 떠오르게 됩니다. 한국의 수출 역군들이 열심히 공장을 돌리는 만큼 버크셔 해서웨이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미국에서 섬유를 제조한다는 것은 더 이상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죠.
결국 버핏은 1985년, 섬유 사업을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훗날, “고집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을 만큼 완전한 실패였죠. 시대의 변화를 실패로 체득한 버핏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찰리 멍거라는 새로운 조언자와 함께 말이죠.
멍거는 그레이엄과 달리 대공황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습니다. 굳이 담배꽁초를 뒤져 저평가된 기업을 찾지 말고, 앞으로 더 성장할 ‘훌륭한 기업’을 찾자는 것이 멍거의 신념이었습니다. 싼 물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시대가 변화했으니, 지혜도 변화했습니다. 그레이엄의 시대에는 가치 투자가 획기적인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산업에 혁신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는 멍거의 성장주 전략이 먹혀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대한 투자를 들 수 있습니다. 1963년 한 회사가 창고에 샐러드 오일을 잔뜩 쟁여 뒀다는 사기를 칩니다. 기름이 물에 뜨는 성질을 이용해 용기 안에 바닷물을 채우고, 그 위에 샐러드 오일을 조금 부어 조사관의 눈을 속인 겁니다. 그런데 이 가짜 오일을 담보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등의 금융 기관이 대출을 내줍니다.
이 사건으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자회사가 파산했고, 주가는 반토막 나고 말았습니다.
버핏은 당시 보유 자산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1300만 달러를 투자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감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가게에서 사람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를 정말 사용하는지 확인하고, 사건 전 10년 치의 재무 자료를 분석해 가며 미래 가치를 가늠했죠. 자발적인 보상을 약속한 경영진의 도덕성도 눈여겨봤습니다. 그래서 버핏은 주당 40달러를 지불했습니다. 그레이엄이 강조했던 안전 마진이 확보될 정도로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죠. 하지만 멍거라는 새로운 멘토가 있었기 때문에 버핏은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애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6년부터 버크셔 해서웨이는 애플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버핏은 인텔도 테슬라도 마이크로소프트도 외면했습니다. 잘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입니다. ‘풍뎅이의 교미를 모르는 것만큼 반도체에 대해 모른다’라는 것이 버핏이 기술주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애플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2016년이면 애플은 혁신의 기업이라기보다는 꾸준히 팔리는 아이폰을 매년 생산하는 기업이 되어 있었을 때죠. 멍거는 애플 투자에 관해 “확실해서 투자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확률상 좀 더 유리한 투자이기 때문에 애플을 사들였다고
설명했습니다. 훨씬 어려워진 사업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면서 말이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멍거는 시장에 계속해서 적응하고, 읽고, 공부했습니다.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 말이죠.
그리고, 그렉 아벨
하지만 멍거의 도전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 2년 반 동안 약 1750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팔아 치웠습니다. 애플의 주식도 포함해서 말이죠. 다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회사가 들고 있는 현금은 약 3500억 달러에 달합니다. 너무 많은 현금이 묶여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투자 시장에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버핏의 선견지명이 이번에도 맞다면, 시장의 거품이 곧 터질 겁니다. 버핏은 “현금이 있어 기뻐할 만한 매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오마하의 현인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장이 더 낮은 바닥으로 향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그레이엄도, 멍거도, 버핏도 퇴장한 시장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3500억 달러를 물려받은 버핏의 후계자 그렉 아벨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구체적인 답은 아직 모릅니다. 변화의 실체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버핏이 평생 지켰던 원칙이 있습니다. 숫자를 잘 들여다보고 충분히 잘 아는 분야에 투자했습니다. 남들처럼 하지 않고 상식에 따라 판단해 행동했죠. 찰리 멍거는 1995년 하버드대학에서 감정과 편견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비합리적인 군중 심리를 만들어 내는 ‘롤라팔루자(lollapalooza)’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시장에 어떤 변화가 닥치더라도 이 연설의 교훈은 유효할 겁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을 샀습니다. 버핏의, 그레이엄의, 멍거의 지혜를 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랫동안 결과로 증명되어 단단히 신뢰를 쌓은 지혜 말입니다. 버핏이 직접 점찍은 후계자인 아벨은 앞으로 그만큼의 신뢰를 새로 쌓아야 합니다. 만만치 않은 여정이 될 겁니다. 버핏이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연말까지는 반년 넘게 남았지만, 버크셔 해서웨이
주가는 벌써 빠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