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대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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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세대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부의 대이전

2025년 5월 12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돈은 혈액과도 같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돌고 돌아야 돈도, 시스템도 죽지 않죠. 그런데 우리나라 어딘가에 154조 원에 달하는 돈이 단단히 굳어 멈춰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일년 예산의 4분의 1 규모입니다. 어떻게든 그 돈이 돌도록 해야겠지요.

최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우리나라의 ‘치매 머니’ 규모를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고령 치매 환자는 전체 인구의 2.4퍼센트입니다. 분석 결과, 이들이 들고 있는 돈이 전체 GDP의 6.4퍼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치매 머니’입니다. 단순히 계산하면 한 명당 2억 원씩 갖고 있는 셈이고, 전체 154조 원 중 114조 원가량은 부동산에 물려 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는 왜 나왔을까요. 고령자의 권리를 지키고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굳어 있는 돈을 풀어 침체한 경제에 조금이라도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혈전 용해제

154조 원을 정부가 곳간을 열어 풀 수도 있겠지만,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불어나는 재정 적자도 부담스러울 것이고 환율 문제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반면, 굳어 있는 돈을 녹여내는 방식은 충격도 덜하고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작아집니다. 

사실, 치매 머니가 아니라도 굳어 있는 돈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들이 쌓아 두고 있는 ‘사내 유보금’ 같은 것입니다. 기업이 금고에 쌓아 둔 돈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어느 정도는 현금을 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사내 유보금이 너무 많아지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기업이 번 돈을 다시 투자하지 않으면 성장 동력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사내 유보금은 2801조 원 규모입니다.

하지만 기업에 돈을 쌓아 두지 말고 투자를 하라고 압박할 수는 없습니다. 나랏돈이 아니라 사기업의 돈이니까요. 투자를 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등의 진흥 정책은 쓸 수 있겠지만, 기업은 세금 깎아준다고 투자하지 않습니다. 투자할 만한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상황이 뒷받침될 때 투자합니다.

치매 머니는 다릅니다. 이 돈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관리 주체를 확실히 하며, 증여나 상속을 제대로 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다시 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보이스 피싱 등 치매 머니를 노린 범죄도 횡행하고 있으니, 명분도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 조사 결과와 함께 딸려 나오는 이야기가 ‘성년 후견인 제도’나 ‘가족 신탁 제도’ 등입니다. 인지 능력이 저하된 고령자는 돈을 써야 할 때에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소유한 부동산을 처분하는 등의 활동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후견인이나 수탁인이 의사 결정을 대신하여 가진 재산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죠. 치매 머니 논의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운을 뗀 정도에 불과합니다. 치매 머니뿐만 아니라 소비 성향이 낮은 고령층이 들고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 시장의 효율성은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 돈을 시장에 풀어 놓을 방법이 필요하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증여와 상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해외에서는 이미 이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의 대이전(The Greatest Wealth Transfer)’이 도래합니다.

위대한 유산

해외에서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부의 대이전에 관한 논의가 이미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1946년에서 64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 고령층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베이비붐 세대는 80대가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상속이 시작되는 겁니다.

20세기 엄청난 성장을 일구어낸 미국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은 베이비붐 세대가 미국 전체 자산 140조 달러의 절반이 넘는 78조 달러를 쥐고 있습니다. 인구수도 많지만, 이들에게는 주택 가격 상승과 금융 투자로 부를 쌓아 올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노동 소득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부의 격차’를 만들어 낼 기회 말입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 30대였던 1983년 이후 미국 주택 가격은 5배 이상 올랐습니다. 주식 시장을 볼까요. 같은 기간 S&P 지수는 28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엄청난 혁신 없이는 그 정도의 호황기가 다시 찾아오기란 어려울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축적한 부가 이제 곧 이동합니다. 향후 25년 동안 미국에서만 100조 달러가 넘는 자산이 상속될 것이라는 추정치가 나와 있습니다. 먼 미래까지 갈 것도 없죠. 2030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18조 달러 이상의 부가 상속된다는 전망도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약간 양상이 다릅니다. 한국은 베이비붐 세대를 1954년부터로 칩니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부터라면,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부터인 셈입니다.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다시 1차와 2차로 나눌 수 있습니다. 63년생까지를 1차로, 73년생까지를 2차로 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당면한 부의 대이전은 1차 베이비붐 세대가 그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입니다.
정치권이 상속세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표심을 노린 수입니다. 출처: SBS뉴스
거대한 격차

돈이 세대를 건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먼저, 세대 내 격차가 심화합니다. 누구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 2022년 기준으로 자산 규모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부의 70퍼센트 가까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국보다는 덜하긴 합니다. 상위 10퍼센트가 44퍼센트 정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속은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각 가정의 소득 수준에 따라 교육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교육 수준은 노동 가치로 환산되죠. 그래서 실제 재산을 상속받기 이전에도 상속에 따른 격차는 이미 발생합니다. 여기에 자산의 상속까지 일어나면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하는데, 부동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말고 몇 년을 모아야 한다는 뉴스를 보셨을 겁니다. 그 기간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죠. 노동 소득보다 부동산의 가치가 더 빠르게 상승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노동 소득과 달리 자산 소득은 격차를 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의 격차를 더욱 심하게 벌립니다.

다음으로는 돈이 시장에 풀립니다. 고령층보다 청년층이 소비에 더 적극적이니까요. 다만 생각해 볼 지점이 있습니다. 일단, 상속 재산으로 주택 자금이나 학자금 등을 충당한다면, 즉 빚을 갚는다면 소비 증가로 이어지기 힘듭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러니까 부채 상환에 굳이 상속 재산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경우라면 돈이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젊은 부자들의 투자 성향을 보면 상속에 따른 돈의 이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죠. 미국의 투자는 기본이 주식과 채권입니다. 그런데 고액 자산가 중 1980년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보다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비중이 작습니다. 대신 암호화폐, 금, 스타트업 투자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선호하죠.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하나금융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10억 원 이상의 금융 자산을 보유한 금융 고객 중 40대 이하의 경우 25퍼센트가 취업 전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고 답했습니다. 부동산 위주의 자산 증식에서 투자 시장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돈을 맞이할 준비

결국, 부의 대이전은 소비를 확대하기보다는 빚을 갚거나 투자금의 위치를 옮기는 식으로 소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대 내 격차는 더욱 심화하게 됩니다. 20년 뒤 이런 부의 대이전이 한 번 더 일어나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는 한층 더 누적될 테지요.

또 다른 스트레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스트레스입니다. 상속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상속세 논의를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2005년 우리나라에서 상속을 받는 사람 중 상속세를 내는 비율은 0.8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2023년에는 5퍼센트를 넘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속을 받기 시작한 베이비붐 세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쥔 집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선 후보들이 상속세 의제를 건드리고 나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나오는 논의는 모두 인하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세금을 올리겠다고 하는 후보는 없지요.

하지만 상속세 논의는 선거의 논리로 풀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유권자 집단의 세금을 낮추거나 올리는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바로 ‘부의 재분배’입니다. 세대 간의 부의 격차, 세대 내의 부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사 결정을 해야 할 의제입니다. 청년층에게는 딛고 올라설 사다리가 없다는 이야기, 노인 빈곤율이 OECD 국내 최상위권이라는 이야기, 금수저와 흙수저 담론, 이 모든 것이 녹아든 상속제 개편을 표 계산에 따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의 대이전은 우리 사회가 경제적 격차와 그에 따른 갈등을 얼마만큼 더 감당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합니다. 국민연금이 고갈될 상황은 걱정하면서 세금은 일단 깎겠다는 공약만 내놓는다면 현실성이 없습니다. 사회의 갈등을 더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상속세를 비롯한 모든 세제 개편 논의가 사회 각 층의 목소리를 담아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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