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돈은 혈액과도 같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돌고 돌아야 돈도, 시스템도 죽지 않죠. 그런데 우리나라 어딘가에 154조 원에 달하는 돈이 단단히 굳어 멈춰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일년 예산의 4분의 1 규모입니다. 어떻게든 그 돈이 돌도록 해야겠지요.
최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우리나라의 ‘치매 머니’ 규모를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고령 치매 환자는 전체 인구의 2.4퍼센트입니다. 분석 결과, 이들이 들고 있는 돈이 전체 GDP의 6.4퍼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치매 머니’입니다. 단순히 계산하면 한 명당 2억 원씩 갖고 있는 셈이고, 전체 154조 원 중 114조 원가량은 부동산에 물려 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는 왜 나왔을까요. 고령자의 권리를 지키고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굳어 있는 돈을 풀어 침체한 경제에 조금이라도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혈전 용해제
154조 원을 정부가 곳간을 열어 풀 수도 있겠지만,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불어나는 재정 적자도 부담스러울 것이고 환율 문제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반면, 굳어 있는 돈을 녹여내는 방식은 충격도 덜하고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작아집니다.
사실, 치매 머니가 아니라도 굳어 있는 돈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들이 쌓아 두고 있는 ‘사내 유보금’ 같은 것입니다. 기업이 금고에 쌓아 둔 돈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어느 정도는 현금을 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사내 유보금이 너무 많아지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기업이 번 돈을 다시 투자하지 않으면 성장 동력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사내 유보금은 2801조 원 규모입니다.
하지만 기업에 돈을 쌓아 두지 말고 투자를 하라고 압박할 수는 없습니다. 나랏돈이 아니라 사기업의 돈이니까요. 투자를 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등의 진흥 정책은 쓸 수 있겠지만, 기업은 세금 깎아준다고 투자하지 않습니다. 투자할 만한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상황이 뒷받침될 때 투자합니다.
치매 머니는 다릅니다. 이 돈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관리 주체를 확실히 하며, 증여나 상속을 제대로 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다시 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보이스 피싱 등 치매 머니를 노린 범죄도 횡행하고 있으니, 명분도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 조사 결과와 함께 딸려 나오는 이야기가 ‘성년 후견인 제도’나 ‘가족 신탁 제도’ 등입니다. 인지 능력이 저하된 고령자는 돈을 써야 할 때에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소유한 부동산을 처분하는 등의 활동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후견인이나 수탁인이 의사 결정을 대신하여 가진 재산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죠. 치매 머니 논의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운을 뗀 정도에 불과합니다. 치매 머니뿐만 아니라 소비 성향이 낮은 고령층이 들고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 시장의 효율성은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 돈을 시장에 풀어 놓을 방법이 필요하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증여와 상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해외에서는 이미 이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의 대이전(The Greatest Wealth Transfer)’이 도래합니다.
위대한 유산
해외에서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부의 대이전에 관한 논의가 이미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1946년에서 64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 고령층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베이비붐 세대는 80대가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상속이 시작되는 겁니다.
20세기 엄청난 성장을 일구어낸 미국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은 베이비붐 세대가 미국 전체 자산 140조 달러의 절반이 넘는 78조 달러를 쥐고 있습니다. 인구수도 많지만, 이들에게는 주택 가격 상승과 금융 투자로 부를 쌓아 올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노동 소득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부의 격차’를 만들어 낼 기회 말입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 30대였던 1983년 이후 미국 주택 가격은
5배 이상 올랐습니다. 주식 시장을 볼까요. 같은 기간 S&P 지수는 28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엄청난 혁신 없이는 그 정도의 호황기가 다시 찾아오기란 어려울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축적한 부가 이제 곧 이동합니다. 향후 25년 동안 미국에서만 100조 달러가 넘는 자산이 상속될 것이라는
추정치가 나와 있습니다. 먼 미래까지 갈 것도 없죠. 2030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18조 달러 이상의 부가 상속된다는
전망도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약간 양상이 다릅니다. 한국은 베이비붐 세대를 1954년부터로 칩니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부터라면,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부터인 셈입니다.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다시 1차와 2차로 나눌 수 있습니다. 63년생까지를 1차로, 73년생까지를 2차로 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당면한 부의 대이전은 1차 베이비붐 세대가 그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