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708번 버스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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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도 지하철처럼 편안할 수 있습니다.

서울 708번 버스에서 생긴 일

2025년 5월 15일

요즘 서울 시내버스는 천천히 달립니다. 노사 임금 협상이 결렬되면서 노조가 준법 투쟁을 벌이고 있거든요. 회사의 안전 규정을 완벽하게 지켜서 지연 운행을 유도하는 겁니다. 승객이 착석했는지 확인하고 출발하고, 타거나 내리는 사람이 없어도 정거장에 정차하는 식입니다. 쉽게 말해 FM대로 하니, 버스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27일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노조는 28일 첫차부터 파업에 돌입할 계획입니다.

노사 갈등의 원인은 역시 임금입니다. 통상 임금의 범위를 두고 노사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근속 연수 7~10년인 서울 시내버스 운전직 4호봉의 월 기본급은 200만 원이 조금 넘습니다. 연장·야간·휴일 근무에 붙는 각종 수당이 또 200만 원쯤 됩니다. 여기에다 짝수 달에는 기본급의 100퍼센트가 상여금으로 나옵니다. 이 돈을 다 합하면 평균 월 수령액이 500만 원쯤 됩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정기 상여금도 통상 임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통상 임금이 오르면 ‘통상 임금의 시급 × 연장 근무 시간 × 1.5’로 지급하던 연장 근무 수당 등 각종 수당이 오르게 됩니다. 버스 기사의 월급 구조상 수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통상 임금이 확대되면 임금 인상 효과가 생깁니다.

노조는 크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 대법원 판결에 따라 상여금을 통상 임금에 포함할 것. 둘째, 기본급을 8.2퍼센트 인상할 것. 셋째, 현재 만 63세인 정년을 65세로 연장할 것입니다. 사측은 기존 임금 체계가 상여금이 통상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전제로 설계됐으니, 임금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노조 요구를 다 들어주면 인건비 총액이 20퍼센트 급증한다고 주장합니다.

서울시도 난감하게 됐습니다. 서울시 시내버스는 준공영제로 운영됩니다. 민영제와 공영제를 혼합한 방식입니다. 민간 기업이 운영하지만,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인정받아 서울시가 재정을 지원하고 운영을 감독합니다. 버스 회사는 돈 안 되는 노선이라고 임의로 운행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긴 적자는 서울시가 보전해 주는데, 그게 작년에만 3200억 원이었습니다.

5400만 원 논쟁

며칠 전 한 일간지는 버스 파업을 다룬 칼럼을 실었습니다. 칼럼 제목은 ‘5400만 원 버스 기사들의 파업’입니다. 서울 시내버스 기사의 초봉은 5400만 원인데, 공공 기관 중에서 초봉이 가장 높은 IBK기업은행(5466만 원)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내용입니다. 공기업 평균 초봉은 3961만 원이고요. 칼럼은 “버스 기사가 대기업보다 임금을 많이 받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문제는 ‘세금 일자리’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런 논리는 파업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입사 문턱이 높은 공공 기관과 버스 회사의 초봉을 비교하니, 기사 임금이 많아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버스 회사에서 초봉을 받는 사람은 기업은행에서 초봉을 받는 사람 같은 20대 중후반의 신입이 아닙니다. 초봉을 받지만 다들 경력자입니다. 버스 기사 평균 연령이 53.6세입니다. 시내버스에서 ‘기사 모집. 초보자 환영’이라고 적힌 광고지를 보신 적 있을 겁니다. 거기서 말하는 ‘초보자’는 마을버스 운전 경력이 적어도 2년쯤 되는 사람입니다.

이 초봉을 받으려면 하루 9시간, 주 6일 근무해야 합니다. 설날, 추석 같은 명절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첫차를 맡으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도로 위의 직업이다 보니 사고 위험도 달고 살아야 합니다. 주 5일 근무를 하면 연봉은 4500만 원 수준으로 내려갑니다. 물가 비싼 서울에 사는 50대 가장에게 이 정도 임금이 정말 과한 것일까요.

문제는 임금이 아니다

결국 논점은 ‘버스 기사의 연봉이 많은가 적은가’가 아닙니다. 공공 서비스에 종사하는 사람의 임금 인상 요구를 특혜로 여기는 인식 자체가 문제입니다. 정치와 언론의 잘못입니다. 공공 서비스가 잘 돌아가도 잘했다는 말은 없고, 비판만 합니다. 안 좋은 얘기만 들리니까 시민에게 공공 부문 노동자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감시의 대상이 됩니다. ‘혈세 낭비’라는 프레임만 반복되고, 공공 노동의 사회적 가치는 논의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스 파업 이야기만 나오면 기사 연봉이 먼저 언급되고, 핵심 쟁점은 뒤로 밀립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통이라는 공공 인프라의 설계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준공영제를 실시하는 서울에서 버스는 이미 공공재입니다. 서울시가 지난해 버스라는 공공 인프라 지원에 3200억 원을 쓴 것이 혈세 낭비로 지목될 이유가 없습니다. 전기차 보조금에는 7391억 원을 썼는데 말입니다.

2023년 독일에서는 전국의 버스, 트램, 지하철이 동시에 멈췄습니다. 공공 서비스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벌인 총파업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 국민의 55퍼센트가 이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교통은 인프라이고, 그 인프라를 지탱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내 삶도 안정된다는 인식이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은 덕분입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귀족 노조’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버스 기사의 임금은 정상적인 도시 작동을 위한 공공 투자로 봐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기사 연봉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어떤 도시 교통을 만들 것인가’입니다.

서울 708번 버스

저는 708번 버스를 타고 퇴근합니다. 얼마 전 인상 깊은 기사를 만났습니다. 승차할 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시길래 저도 꾸벅 인사했습니다. 기사는 운행 내내 마이크로 방송을 했습니다. “급회전 구간입니다. 손잡이를 꼭 잡아 주세요.” 며칠 뒤 그 버스를 다시 탔을 때는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차량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면 천천히 일어나 주세요.” 공항 리무진 버스라도 탄 것 같았습니다.

이런 버스가 많아져야 합니다. 버스가 지하철처럼 안전하고 쾌적하고 정확하게 운행되려면, 버스를 지하철처럼 대우해야 합니다. 시내버스·마을버스 기사의 처우와 교통 인프라가 동시에 개선되어야 합니다. 좋은 노동이 좋은 교통을 만듭니다. 근무 강도 완화, 휴식 시간 보장, 신규 채용 확대가 필요합니다.

결국 예산이 필요합니다. 어디선가 끌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버스 문제를 기후와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공공 서비스 노조는 기후 운동 단체인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과 함께 ‘#WirFahrenZusammen(우리는 함께 달린다)’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운수 노동자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지자체 지원을 늘려 대중교통을 강화해 기후 위기에 대응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공공 교통 노동자의 처우 개선은 단순한 임금 문제가 아닙니다. 이동권 보장의 문제이고, 기후 위기 대응의 문제이고, 도시 지속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저는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708번 기사 같은 운수 노동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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