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의 적들
완결

보수주의의 적들

에드먼드 버크가 살아 있었다면 도널드 트럼프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및 다른 지역의 정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간단한 퀴즈.

a) 아래의 내용을 말했던 미국의 대통령 후보는? 
b) 그가 택했던 선거 운동 방식은?

“우리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매년 수백만 명의 무허가 외국인들이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서는 미국 시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만들어 놓은 사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미합중국에서 만들어진 모든 가공품들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처럼, 미합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상품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세금을 부과하자. 중국이 우리에게 관세를 매기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동일한 관세를 부과하자. 우리는 외국에 빼앗긴 일자리를 다시 고국으로 가져올 것이며, 이곳 미국에서의 일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오직 미국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a 문항의 정답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였으며 텔레비전에서 정치 평론을 했던 팻 뷰캐넌(Pat Buchanan)이다. 그는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고, 2000년에는 개혁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b 문항의 정답은 한때 몸담았던 공화당과 완전히 작별했다는 것이다. 공화당 소속이던 시절에 뷰캐넌은 몇 개 주에서는 경선에서 승리도 했고 연설도 무난했지만, 공화당을 나온 후로는 저렇게 돌변했다. 2000년 대선에서 그의 득표율은 0.4퍼센트였다.

대선 성적이 저조했던 원인은 어느 정도 뷰캐넌 자신에게 있다. “이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당 경선에서 그에게 패했던 어떤 후보의 말이다. 그는 뷰캐넌을 가리켜 “흑인을 좋아하지 않는 히틀러 추종자”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원인은 뷰캐넌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2000년의 미국은 과거 냉전 시기의 라이벌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유일한 강대국으로 우뚝 서 있었다. 1980년대의 경제적 도전자였던 일본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고, 중국의 GDP는 이제 겨우 이탈리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직 9·11 테러가 터지기 전이었다. 뷰캐넌의 부정적인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2000년에 당시 개혁당에 희망을 걸고 뷰캐넌을 향해 “히틀러 추종자”라고 폄하했던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다. 그런데 트럼프는 2016년에 공화당 경선에 입후보하면서 뷰캐넌과 비슷한 메시지를 훨씬 더 강도 높게 주장했다. 트럼프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전쟁이나 금융 위기, 중국의 급성장 등으로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 그 자체도 변했다.

오랜 역사와 함께 입지를 다진 많은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미국의 우파 역시 내부에 수많은 정파들이 공존하는 열린 조직이었다. 뷰캐넌주의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보수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작은 정부와 친기업을 지향하고, 때로 종교적이며 사회적으로는 고리타분하고, 미국적 생활 방식이라는 관습에 애착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깃발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고, 국가 운영 능력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바탕으로 저속하며 반동적이고 고립주의적인 국수주의의 성장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2016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많은 선진국들에서 보수주의 정당들이 반동적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권력을 뺏기거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는 비단 정당에 대한 위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200년 동안 영어권 국가들에서 알고 있던 정치사상으로서의 보수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기도 하다. 우파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보수주의가 존재했던 시절을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다. 비록 그 이유가 잊혔거나 알아보기 힘들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보수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 권력에 대해, 특히 선동 정치가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 이외에도 왕실이나 군부, 교회와 같은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지역 단위에서부터 국가 단위까지, 전문가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서로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G.K. 체스터튼(G.K. Chesterton)은 《정통(Orthodoxy)》(1908)이라는 책에서 그들이 존중하는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통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계층인 우리 선조들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에 의한 민주주의이다. 전통은 살아서 걸어 다니는 소수의 지배 집권층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1]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향수를 좋아하고 무질서를 두려워한다. 정치 심리학자들은 음식에서부터 해외여행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새로운 도전에 훨씬 더 개방적인 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작가인 윌리엄 버클리(William F. Buckley)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보수주의자의 역할이란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멈추라고 외치며 역사의 흐름을 막아서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주의의 핵심적인 통찰을 살펴보자면, 모든 역사가 멈춰질 수는 없으며 멈추는 것만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어떤 변화에는 저항해야 하며, 어떤 변화는 지연되어야 하며, 어떤 변화는 통치에 이용되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 때로는 죽은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야만 한다.

 

하이에크의 잔소리


그리하여 보통 선거권 시대 이전의 영국 보수주의자들은 맨 위에 있는 군주에서 맨 아래에 있는 농장 노동자까지 이어지는 사회 질서의 보존을 선호했지만, 이후 자기 계발을 옹호하게 된다. 무역과 산업보다 토지를 선호했던 그들은 이제 비즈니스 친화적이 되었다. 국가 지도자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라는 여성을 조심스럽게 선택할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무릇 여자들이란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왔지만, 그녀가 자신의 역량을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이자 그녀를 열렬하게 끌어안았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원칙이 있었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태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쓰기 원칙에 대한 태도와 비슷했다. 그들이 만약 원칙을 고수하기만 했다면 버림받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권력을 잃고 아예 야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권력을 추구하는 하나의 통치 이념이다. 보수주의는 변화를 주도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보수주의가 갈망하는 권력이란 운전대라기보다는 브레이크에 가깝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내가 보수주의자가 아닌 이유(Why I am not a conservative)〉라는 에세이에서, 보수주의는 그 특성상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보수주의는 현재의 흐름에 저항함으로써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따라서 끌려가는 것”이 언제나 보수주의의 운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이에크는 비꼬는 투로 말했지만,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보수주의는 회의주의나 특권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보수주의 작가인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의 멋진 표현을 인용하자면, 보수주의에 관한 논쟁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 내부의 머뭇거림”에서 시작되었다. 몇몇 자유주의자들은 바스티유 습격 사건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프랑스 혁명을 미국 독립 혁명에 이은 자유주의의 두 번째 승리라고 생각했다. 영국 휘그당의 대표였던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프랑스 혁명을 1688년에 있었던 영국의 명예혁명이 재현된 것이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폭스의 휘그당 동료들은, 특히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대재앙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다.[2]

후대의 보수주의가 가장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버크의 생각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과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서는 현명한 판단과 권위에 의해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는 것이 그 사상의 기반이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질서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여겼다. 반면 버크식 보수주의자들은 질서를 통제와 체계에 입각한 제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19세기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우파들이 훨씬 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서로의 스파링 파트너였고, 그들이 싸우는 링 주위에는 사유 재산권과 개인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로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서로에게 피비린내 나는 적이었다. 유럽의 반동적 보수주의자들은 그저 변화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때려눕히려고 했다. 그들은 종종 군주제와 교회 권력, 귀족의 지위 등을 복원하기를 원했다.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과 부르봉 왕조 치하의 사보이 왕가를 예찬했던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의 《프랑스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on France)》(1797)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군주제가 타도될 위기에 처하자 메스트르는 현실 저항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왕권신수설의 중세 시대로 되돌리기를 원했다. 메스트르는 사형 집행인을 존중했는데, 그들의 칼날이 모든 질서를 수호한다고 여겼다. 참고 들어 주기 어려운 얘기인데, 그의 주장은 마치 러시 림보(Rush Limbaugh)[3]의 18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버크식 보수주의는 다른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반동적 변화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조금의 변화는 용인할 수 있지만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변화는 위험하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서구 우파들은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그들은 자유방임주의자들과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상당수 받아들였다. 그들을 결속시킬 수 있었던 구심력은 좌파에 대한 반대 의식이었다. 좌파에 대해서 조금 부드럽게 말하자면, 그들은 사유 재산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일에 우파보다 관심이 덜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에 검증을 받았거나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닌, 코민테른(Comintern)[4]의 독재라는 새로운 형태의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우파들 안에는 거대 기업에 깊은 불신을 가진 사람들과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환경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정부의 모든 규제에 회의적인 사람들,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공공을 불신하는 엘리트주의자들과 엘리트를 불신하는 포퓰리스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모든 것에서의 방종을 원하는 자유방임주의자들과 국가란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다른 이들을 자극하는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를 진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공유한 것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좌파들을 몰아내려는 욕구였다. 이런 욕망들이 잘 관리되어 결합된 덕분에, 보수주의는 그토록 다양한 면면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들을 지탱해 주던 바퀴들은 지난 20년 동안 떨어져 나갔다. 2001년 9월 11일 테러가 있었고, 이후 마드리드와 런던 등지에서도 테러가 발생해 새로운 공포감이 생겨났다. 여러 차례의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나타났는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유로존의 경직성으로 인해 문제가 더 심각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일자리가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문제를 불안해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실업률이 낮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크게 소외되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잔뜩 민감해져서 소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곤 한다. 많은 국가들에서 이민자들이 증가한 데에는 자유주의 좌파와 우파 세력들이 모두 이민 정책을 승인함으로써, 또는 최소한 묵인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반동적 민족주의가 번성하기까지는 의견이 잘 맞는 동료들을 규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작은 정부나 균형 잡힌 예산과 같은 이념적 지향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영국”을 외치는 보수주의자들처럼 사회 전체에 가치를 두고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기업 활동은 장려하지만 적절한 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필요하지 않았다. 제도에 대한 헌신적 태도도 필요하지 않았다. 불가피해 보이는 사회적 변화를 개선하려는 사람들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는 어떤 변화들을 비난하고 뒤집을 수 있는 권한만 있으면 되는 것 같다.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야 /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투표 성향의 경제 문화적 배경 분석(2016년, 단위: 퍼센트) / (왼쪽부터) 경제적 만족도 / 여성에 대한 적대 의식 / 인종 차별주의의 인정 / 푸른색 영역이 95퍼센트 신뢰도 구간 / 출처: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백인들의 편향성 해석: 인종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의 놀랄 만한 역할”, 브라이언 섀프너, 매튜 맥윌리엄스, 타티셰 응테타
반동적 우파는 (유럽에서는 특히 브뤼셀에 모여 있는) ‘엘리트 계층’에 대한 분노와 인종 및 출신 지역으로 구분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개심으로 뭉쳐 있다. 그렇다고 반동적 우파의 지지자들이 모두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반동적 우파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이름을 바꿨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민에 반대하는 국민전선이 세를 상당히 확장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도 바로 이민 문제였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성향과 인종 차별적 사고방식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나타났다(표 참조). 하버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의회 선거 협동 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에 트럼프에게 투표했던 이들 중 가계 수입이 5만 달러(5900만 원) 이상인 유권자들의 비율이 약 60퍼센트에 달했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했던 이들은 조금 더 가난했다.

 

레콩키스타[5]의 재현


폭스 뉴스에 나와서 보수주의자 흉내를 내는 그런 사람들 말고 미국의 진지한 보수주의 사상가들 대부분은 공화당 대표와 지도부 및 측근 요직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대표적인 보수 비평가들인 맥스 부트(Max Boot),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로스 도댓(Ross Douthat), 데이비드 프렌치(David French), 데이비드 프럼(David Frum), 빌 크리스톨(Bill Kristol), 유발 러빈(Yuval Levin), 제니퍼 루빈(Jennifer Rubin), 라이한 살람(Reihan Salam), 피터 웨너(Peter Wehner), 조지 윌(George Will)과 같은 인물들은 모두 민주당을 응원하고 있거나(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난 다음에 공화당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정치 비평에서 발을 빼고 있다. 워싱턴에 있는 보수적 싱크탱크인 윤리 공공 정책 센터(Ethics&Public Policy Centre)의 선임 연구원인 헨리 올슨(Henry Olsen)은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들을 새로운 상황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의 이 난리 법석을 만든 장본인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좌파들은 트럼프에게 선거에서 한 번 졌을 뿐이다. 하지만 우파들은 자신들의 당을 한 사람에게 빼앗겼다. 이것이 더 안 좋은 상황이다. 영국도 과정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보수당의 당원들이 유독 브렉시트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당 대표 후보들은 이 상황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체면을 구기고 있다. 지난 6월 테리사 메이(Theresa May) 총리의 뒤를 이을 차기 보수당 대표 경선 2차 투표에 오른 후보 여섯 명 가운데 ‘노딜(no-deal) 브렉시트’를 거부한 이는 오직 한 명이었다. 이러한 판단을 스스로 내린 로리 스튜어트(Rory Stewart)의 신념에 대해서는 버크라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그는 더 많이 올라갔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었다.[6]

영국과 미국에서는 최다 득표자가 의석을 가져가는 소선거구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반동적 민족주의자들은 그 내부에서부터 당을 장악해 왔다.[7] 사실상 양당제인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다당제가 일반적인 서유럽 대부분에서는 보수 정당들이 신생 정당이나 새롭게 떠오르는 극우 정당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거나 이미 추월을 당했다. 제5공화국(1958~2018)의 주류로서 프랑스를 이끌었던 드골주의자들은 신생 자유주의 정당인 ‘전진하는 공화국(앙마르슈)’과 국민전선의 새로운 아바타인 국민연합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스페인에서는 기성 보수 정당인 인민당(PP)이 자유주의 중도 정당인 시민당(Ciudadanos)과 신생 극우 정당인 복스(Vox)의 공격을 받으며 역시나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보수당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집권과 여러 추문이 결합되면서 진즉에 사장되었고, 그 자리는 북부동맹(현재는 그냥 ‘동맹’이라 부른다)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동유럽 지역을 보면, 헝가리에서는 자유주의가 우위를 점하는 일이 거의 없이 그대로 반동적 민족주의 우파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이런 모든 움직임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열성적인 자긍심, 특히나 남성적인 자긍심이다. 특히 사과 따위는 거부하는 뻔뻔한 자긍심이 발견된다. 남부 전략[8]에 대해서, 프랑코 독재에 대해서, 비시[9]에 대해서, 무솔리니에 대해서, 영국의 인도 통치에 대해서, 남부 연합[10]에 대해서 그들은 사과를 거부한다. 2018년 선거 유세에서 스페인 복스당의 대표인 산티아고 아바스칼(Santiago Abascal)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좌파들은 우리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들을 부끄럽다고 느끼게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랑스러운 일들이란 페미니즘과 무슬림, 동성 인권에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쫙 달라붙는 수놓은 바지를 입고 소들을 괴롭히는 싸움을 규제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11]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나 우려되는 것은 민족성에 대한 엄청난 자긍심이다. 버크식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과거의 제도에 두고 있는 반면에, 반동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 진정한 미국인이란 본토에서 태어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미국인의 비중은 30퍼센트에 달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공화당을 지지하는 성향을 띠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지만, 반동주의자들은 특정한 성향에 더 가치를 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보수주의는 그들이 봉사해 온 세계에 오랫동안 적응해 왔다. 논리도 없고 근본도 없는 기회주의자인 반동적 우파들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보수주의자들은 수없이 변화하고 적응해 왔던 풍부한 제도적 토양 위에서 다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초반의 정치 현실에서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제껏 논의되지 않았던 의제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가난한 국가들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서구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고, 자신들도 그러한 기준에 도달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중국은 전 세계에 판매되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경제 모델을 갖추게 되었다. 여성들은 더 많은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가족 구성이 바뀌고 있고, 결혼을 늦게 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후 변화에 있어서는 시급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커다란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 보수주의의 전통을 가진 정치인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대응을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안들은 그들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변화가 아니다.

미국의 일부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죽은 합의(dead consensus)”라고 부르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퍼스트 띵스(First Things)》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것이 반드시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옛 보수적 합의는 전통적 가치들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 가정의 안정, 공동체의 연대를 비롯한 다른 많은 가치들이 무색해지다 못해 역행하는 것을 막아 내지 못했다.” 그들의 지적이 일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변화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 것은 과거 공화당 연합 내부에 있던 기업가들이나 자유방임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런 변화들은 정치가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반동적 민족주의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버크식 보수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들에도 맞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온건주의 노선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장 많은 것을 잃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하이에크가 말했듯이,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노선을 따라서 끌려갈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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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 #민주주의 #세계 #미국 #철학 #이코노미스트

[1]
전통을 중시하는 풍조를 풍자한 것으로, 같은 책의 바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민주주의자들은 사람이 태어났다고 해서 시민권을 박탈하지 않고, 전통주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시민권을 박탈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하물며 말 사육사의 의견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전통주의는 하물며 죽은 아버지의 의견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2]
근대적인 형태의 의회 민주주의가 시작된 때를 보통은 1688년 영국에서 있었던 명예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명예혁명이란 의회와 대립하던 제임스 2세 국왕을 퇴위시키고 윌리엄 3세를 즉위시킨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제정된 것이 의회의 권리와 자유를 천명한 ‘권리장전’이다. 명예혁명은 보수 성향의 토리당(Tory Party)과 자유 성향의 휘그당(Whig Party)이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영국 보수당의 별칭이 토리당(The Tories)인 것도 당시의 토리당에 일부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휘그당은 여러 형태로 변화를 겪은 후에 현재의 자유민주당에서 일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
러시 림보는 사형제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의 미국 방송인이다.
[4]
공산주의 국제 연합
[5]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중세 시대에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운동을 말한다.
[6]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인 로리 스튜어트는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3차 투표까지 진출했다. 2019년 7월 10일 현재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과 제러미 헌트 현 외무장관 두 명이 최종 라운드에 남아, 전 당원이 우편으로 참여하는 결선 투표가 진행 중이다. 브렉시트 강경파인 보리스 존슨의 승리가 유력하게 점쳐지는 가운데, 그가 당 대표가 되면 자연스럽게 영국의 차기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7]
국회의원 선거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대의원을 선출하는 간접 선거 방식이어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의 투표수로는 힐러리 클린턴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되는 현상이 있었다. 영국에서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일종인 동트(D’Hondt method)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8]
미국 남부 백인 남성을 위주로 한 선거 득표 전략
[9]
비시(Vichy)는 프랑스의 도시이다. 독일 점령 당시 이곳에 나치에 협력하는 괴뢰 정부가 설립되어 비시 정부라고 불렸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 정책이나 인물보다는 단지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던 공화당원들을 비꼬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10]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진영
[11]
스페인에서는 동물 복지의 관점에서 점차 투우를 금지시켜 나가고 있다. 동물 복지를 내세운 정당들도 등장해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반면 복스당에서는 투우를 전통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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