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있는 노동
1화

프롤로그; 경쟁과 성과에서, 영혼이 담긴 노동으로

노동법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의 복합적 산물이다. 우리 노동법의 현실에는 한국 사회가 겪어 온 대내외의 문제들이 녹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불평등의 심화, 저성장 사회 진입, 기술 혁신에 따른 무한 경쟁이라는 전 지구적 경향이 있다.[1]

대내적으로는 전후 압축적 경제 성장을 이뤄 내는 과정의 산업 구조 변화, IMF 구제 금융 이후 심각해진 양극화 현상, 비정규 고용으로 인한 위험의 외주화 문제, 가부장적 인습을 청산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일·가정 양립의 극심한 어려움, 갑질의 만연 등의 문제가 있다.

1990년대 전후에는 달라지는 환경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전통적인 노동보호법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노동 유연화가 거론되었다. IMF 이후의 대대적인 법 개정은, 당시 노사정 대타협의 성과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우리 노동법의 보호 역할이 여러 측면에서 약화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최근 10여 년의 흐름에서 신자유주의 사조는 더 이상 대세로 보기 어렵다. 2007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미국발 금융 위기를 계기로 세계적 차원에서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시장에 자기 조절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신념에 불과하며, 무분별한 금융 정책과 미국 등 강대국의 이기주의가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초래한 것으로 진단했다. 그리고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과 사회 보호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2]

2013년에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21세기 자본》에서 글로벌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각성을 체계적으로 보여 주며 시장 만능주의의 오만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300년간의 통계 분석을 통해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을 때 부의 양극화 및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점을 밝히고, 이를 해결하려면 글로벌 자산 누진세 등 전향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서구 사회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3]

신자유주의 사조와 불평등에 대한 반성은 노동법에 직접적인 화두를 던져 준다. 우리 헌법은 자유권에 기반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국민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관념에 기반하여 국민의 근로권 보장 및 근로조건 법정주의(헌법 제32조), 노동3권의 보장(제33조), 인간다운 생활권(제34조) 및 경제 민주화(제119조)를 표방하고 있다. 노동법제는 이러한 헌법상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므로 우리 산업 구조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노동법제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노동 보호의 관념과 규범으로서 노동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경쟁과 성과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사조는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21세기에 양질의 노동(decent work)은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고 강조하면서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을 천명했다.[4] 독일에서는 《노동 4.0》 녹서 및 백서에서 디지털 혁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좋은 노동’과 사회 안전망이 계속 유지되고 보호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관심과 논란이 뜨겁다. 각양각색의 논의는 결국 고용 및 노동에 대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 디지털 기술 혁신으로 인공지능, 로봇, 무인화 공장 등이 도입되고 있다는데, 일자리가 대폭 감소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과 기계가 경쟁하는 시대가 온다면 지금의 근로조건이 더욱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역사는 기술 혁신이 반드시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었다. 과거 1차 산업혁명, 즉 증기 기관의 발명과 함께 최초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열악한 노동이 사회 문제로 부상했을 때, 서구 국가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 보험을 고안해 초기 형태의 복지 국가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다시금 실업과 빈곤이 문제되자, 각국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법과 표준고용관계를 확립해 위기를 극복했다.

노동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발전해 온 것은 시기별로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거쳐 문제 해결에 필요한 법적, 제도적 선택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현재의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수동적 운명론은 옳지 않다. 오히려 노동의 미래가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적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양질의 노동과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사회의 변화가 법의 변화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전환과 혼란의 시기에 먼저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법의 중요하면서도 본질적인 역할이다. ‘영혼 있는 노동’이 가능한 사회를 위해 노동법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1]
Joanne Conaghan, Richard Michael Fischl, Karl Klare, 《Labour Law in an Era of Globalization: Transformative Practices and Possibiliti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Bob Hepple, 《Labour Laws and Global Trade》, Hart Publishing, 2005.
[2]
Joseph Stiglitz, 〈The Global Crisis, Social Protection and Jobs〉, 《International Labour Review》, Vol. 148, 2009.
[3]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헤이북스, 2015.
전병유, 《한국의 불평등》, 페이퍼로드, 2016.
[4]
ILO, 《Decent Work and the 2030 Agenda For Sustainable Developmen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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