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
6화

송진우 “선택에 당당하라”

송진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다른 투수들과는 다른 독특한 투구 폼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끊임없이 ‘지금 투구 폼으로는 야구 못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야구 인생의 첫 번째 슬럼프였다. 송진우처럼 어린 시절부터 경기력을 인정받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아 왔던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자기 개념[1]을 훼손하려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야구 선수에게 폼은 자기와 관련된 행동과 경험을 해석하고 조직한다는 차원에서 자기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곧 자기 개념, 나아가 선수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
 
제가 좀 독특한 폼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피처들에 비해서 손 자체가 머리 뒤로 많이 숨겨서 던지는 스타일인데, 초등학교 때 감독님이 “팔이 뒤로 접히면 야구는 못 한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걸 고치기 위해서 철사로 왕관을 만들어서 옆에까지 접히면 걸릴 수 있게끔 해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살살 던질 때는 힘을 안 쓰니까 가능한데, 강하게 던질 때는 이게 원래의 폼으로 돌아온다는 거죠. 결국은 못 고쳤어요. 그리고 중학교를 왔는데, 선배가 제 폼을 보더니 “너 그 폼으로는 야구 못 한다” 그러는 거예요. 그 이후에도 누구든지 그거를 고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투구 폼 얘기가) 나왔어요.
 
대학에 들어와서도 투구 폼에 대한 지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투구 폼이라는 것은 한번 자기 것이 되면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그 폼으로 프로 생활을 마친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감독님도 제 폼을 보시더니 “그렇게 하면 타자들이 너의 공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지적을 하셨어요. 그런데 투구 폼이라는 게 내 것이 되면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끊임없이 그런 지적을 받으니, 참… 그런 역경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폼을 가지고도 선수 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도 처음에는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번 몸에 익은 폼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투구 폼에 대해 계속 지적을 받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걸 굳이 바꿀게 아니라 이 폼으로도 그냥 삼진을 잡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투구 폼을 바꾸지 않고 계속 선수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던 송진우였지만, 감독과 선배들의 계속된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투구 폼을 계속 유지하는 위험 감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그리고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투구 폼으로 던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들어서는 계속 그 폼으로 던지면서, 이걸 내가 바꿀 게 아니라 이 폼으로 잘 던지면서 그냥 삼진 아웃 잡으면 되는 거 아니냐. 일단 자신이 있었구요. 확신도 있었구요. 지금 이렇게 분석을 해보면, 그래도 나름대로 폼에 장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던지는 폼으로 던지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프로에 와서도 그랬고. 아마(추어) 때도 잘 던졌기 때문에.
 
결국 송진우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21년의 프로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투구 폼을 바꾸지 않았다. 다들 안 된다고 했던 그 폼으로 성공했다. 그는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본인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는 역경 극복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관을 발견함으로써 그가 심리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팀은 선수를, 선수는 팀을 소중히 여기는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팀이 선수 하나 버리는 것이 너무나 쉽지 않습니까? 언론에서야 ‘우리는 선수를 지켜 줄 것이다. 우리 선수다’라고 하지만 그건 좋을 때 얘기이고… 안 좋을 때는 구단에서도 상품 가치에 따라 과감하게 선수를 정리할 수 있다는 거죠. 프로는 냉혹합니다. 선수 개인이 이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 혼자 싸움도 많이 해야 되고, 자기 기술 개발도 많이 해야 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이 힘을 키우는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좀 외로운 싸움이긴 하지만, 기술적인 힘도 그렇고 정신적인 힘도.
 
프로 입단 9년 차, 영원히 추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송진우의 화려한 야구 인생에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제구가 흔들리면서 슬럼프가 시작되었고 그는 큰 좌절감을 느꼈다. 다들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던 투구 폼을 유지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올릴 정도로, 자신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그만큼 좌절감도 컸다.
 
프로 야구라는 것이 한 번의 경기를 가지고 1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당시 한 시즌 동안 피처가 서른 번 정도의 경기에 등판할 수 있었으니까요. 절반만 이겨도 15승이잖아요. 15승이면 우리나라에서도 에이스 정도니까. 한 게임에 크게 흔들리고 그랬던 적은 없었어요. 선발 피처라면 자기 기록뿐 아니라 팀의 성적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적어도 5할 이상은 해야 된다는 거죠. 선발 피처는 본인이 팀 성적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던져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97년도, 98년도… (그 전까지 15승씩 올렸던 제가) 1년에 6승밖에 못했어요. 상대방이 내 볼을 볼 때, 이제 그만해야 되지 않느냐, 볼이 실밥이 다 보인다, 투수로서의 생명이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그때는… 정말 좌절감을 많이 느꼈어요.

타자와의 승부는 자신감의 차이에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송진우는 슬럼프 이후 공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슬럼프를 유발한 최초의 원인은 제구력 난조였지만 그를 더 깊은 슬럼프에 빠뜨린 원인은 바로 자신감의 저하와 같은 심리적 문제였다. 게다가 한번 떨어진 경기력은 연속적인 패턴으로 반복되는 수행 저하의 악순환(downward spiral of performance)을 낳았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자신이 경기에서 보여 줬던 투구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패한 경기에서 자신의 투구에 대한 비관적 귀인(attribution)[2]은 다음 수행에 대한 동기를 감소시키고 자신감의 저하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후의 성공적 수행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제구가 안 되는 거예요. 던지면 다 가운데로 몰리고, 저는 점점 자신 없어지고, 타자는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어, 송진우? 만나면 자신 있어. 쟤 볼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나는 열심히 던져도 타자는 그거를 알고 대처를 할 수 있게 되고. 투수를 어려워하는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면서 이 피처 볼 어렵다, 직구 빠르다, 아니면 이 피처는 변화구 잘 던진다, 체인지업 잘 던진다, 이 피처는 까다롭다, 그러면 조금 위축되어 들어가는데, 얘 볼 자신 있어, 이래 버리면… 저는 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또 심리학 얘기지만, 이게 자신감의 차이거든요, 서로가… 그런 싸움도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기술적인 문제만을 걱정했다. 보직 변경을 권유하거나 심지어 은퇴 의사를 넌지시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도전을 결심했다. 이번에도 주변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판단을 따랐다. 이처럼 끝까지 자신의 판단을 믿고 결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슬럼프에 빠진 근본 원인을 빠르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슬럼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슬럼프가 치명적인 수준으로 진행되기 전에 회복하는 일도 가능하다.[3] 송진우는 슬럼프가 제구력이 아닌 자신감 저하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좌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도전할 만한 상황이라고 평가하는 사고의 전환을 통해 슬럼프의 의미를 재구성했다.
 
언제든지 옷을 벗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래도 여태까지 야구를 해왔던 세월이라는 게 있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느냐. 딱 1년만 더 참고 열심히 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그만두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원인이 분명해지면서 생각이 바뀐 거죠.
 
그렇게 98년도 시즌을 끝내고 송진우는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애리조나 교육 리그에서 ‘서클 체인지업’이라는 새로운 구종을 접하게 되었다. 프로 9년 차에 접어든 투수가 당시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구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상황을 직시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전에는 직구만 던지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슬럼프를 겪으면서 깨달은 거죠. 무조건 하나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는 걸요. 사람은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항상 볼이라는 게, 젊으나 나이가 들어서나 똑같은 공을 던질 수는 없는 거니까요.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이 또 대단한 것이 뭔지 아세요? 살찌면 살찐 대로 마르면 마른대로 발이 빠르면 빠른 대로 발이 느리면 느린 대로… 모든 사람이 투수를 할 수 있고, 타자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보다 느린 볼을 던지는 투수가 불리하긴 하지만, 제구력만 된다면, 또 느린 투수가 타자의 타이밍을 흩뜨려 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볼을 선택하더라도 타자를 속일 수 있는 공만 던질 수 있다면 충분히 승부를 걸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했어요.
 
송진우는 서클 체인지업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99년도 시즌에 15승을 올렸다. 새로운 구종의 연마를 통해 슬럼프를 극복하면서 자신감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4]은 어느 한순간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성공 경험의 축적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자기 효능감은 자신이 목표한 바를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도 높여 주지만 동시에 성공적 수행을 추구하는 행동을 강화시키기도 한다.[5] 송진우의 경우, 성공적 수행을 추구하는 행동은 승부욕의 형태로 나타났다. “승부욕이 강한 것 같다”는 말에, 송진우는 본인 스스로도 그 부분은 인정한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몸속에 이기고자 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승부욕이 야구에서뿐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승부욕을 너무나 당당하게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승부욕이 이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거기에만 몰입하다 보면 오히려 승리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대한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송진우는 미소 지으며 “승부욕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송진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에게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이 주눅 들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선수였다. 자신의 선택 앞에 늘 당당했기 때문에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생소한 구종에 도전할 수 있었고, 주변의 평가와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슬럼프를 극복해 낼 수 있었다.
[1]
자기 개념(self-concept)은 자기 자신의 행동, 특성 및 기타 개인적 특징들에 대해 자신이 명백하게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갖게 되는 모든 사고와 감정이 곧 자기 개념이다.
[2]
귀인(attribution)은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이 발생한 원인을 추론하는 것이다. 내부 귀인은 행동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이나 동기, 태도에서 찾는 것이고 외부 귀인은 행동의 원인을 사회 규범, 외부 환경, 혹은 우연한 기회 등에서 찾는 것이다.
[3]
Taylor, J., 〈Slumpbusting: A systematic analysis of slumps in sport〉, 《The Sport Psychologist》, 2, 39-48. 1988.4
[4]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기대와 신념으로, 성공 또는 실패 경험을 통해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개인의 존재 가치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과 믿음이라는 점에서 자존감(self-esteem)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5]
Bandura, A., 〈Self-efficacy: Toward a unifying theory of behavioral change〉, 《Psychological Review》, 84, 191-215.,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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