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2화

누구나 정치인이 되는 곳

화물 트럭에서 정치 축제로


1968년 7월,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울로프 팔메(Olof Palme)는 휴가를 내고 고틀란드섬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고즈넉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고틀란드는 스웨덴의 가장 큰 섬으로 여름 별장이 많아 휴가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장관님, 오랜만에 오셨는데 지역 당 관계자와 휴가 온 시민들을 위해 간담회 하나 해주시지요!”

격무에 시달리다 가족과 함께하는 휴가 기간만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팔메 장관은 시당 위원장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다만 장관은 정식 정치 행사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간단한 정책 간담회가 마련되었다. 간담회장인 광장에는 아무것도 없이 덤프트럭 한 대만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 위에서 즉석연설이 시작됐다. 7월 초 고틀란드의 따가운 햇살 아래, 반바지 차림의 휴가객들과 시민들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로 모여들었다.

의회도, TV 토론회도 아닌 여유 넘치는 휴가지의 광장에서 현직 장관을 만나 궁금한 정책에 대해 묻고 답하는 간담회는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트럭 연설’이 열린 작은 마을 알메달렌이 스웨덴식 열린 광장 정치의 메카가 되는 순간이었다.

팔메 장관은 총리로 임명된 이듬해에도 간담회를 열었다. 팔메 총리가 다른 정당 지도자들에게 참여를 제안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여당인 사회민주당의 당 차원 행사로 각인된 여름 정책 간담회에서 들러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던 우파 정당 관계자들도 한번 참가해 본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국민과 격의 없이 자유롭게 만나는 일은 모든 정당이 찾고 있던 소통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1982년 모든 주요 정당들이 참여한 알메달렌 주간이 공식 출범했다. 좌우, 중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당들이 참여하는 간담회는 대표 연설과 전문가 세미나로 확대됐다. 자연스럽게 언론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7월 초, 여야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 콘텐츠는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휴가와 정치, 그리고 언론의 결합은 이렇게 출발했다.

언론이 정책 내용을 비교하고, 정당 대표들의 연설 내용을 분석해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알메달렌은 ‘정책 배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잘 모이는 요일을 선점하기 위한 정당들의 경쟁도 가열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정당 대표들이 머리를 맞댔다. 매년 모든 정당들이 참가하는 정례 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정당이 특정 요일을 선점하고 진행하는 방식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주말에는 방문객이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월요일부터 수요일 사이는 가장 많이 몰린다. 모든 정당이 주중의 하루를 배정받기를 원했다. 매년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도 논의되었으나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결국 매년 배정 요일을 하루씩 당겨 돌아가면서 맡기로 합의했다. 올해 일요일에 행사가 있는 정당은 다음 해에는 토요일, 그다음 해에는 금요일, 이렇게 하루씩 당기는 방식으로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지금은 7월 첫 주 일요일부터 8일째인 둘째 주 일요일까지 열린다. 알메달렌 주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당 대표 연설은 이 규정에 따라 매년 요일이 변경된다.

전국 단위의 협회, 이익 단체, 그리고 기업들도 알메달렌에 큰 관심을 보인다. 유럽 연합 스웨덴 사무소 등 국내외 정책과 관련된 기관들도 참가한다. 알메달렌 주간은 이제 정책을 만들고 소비하며 정책에 영향을 주고받는 국내외 기관들이 모여 정책과 세계의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탈바꿈했다. 정치와 언론, 이익 단체까지 합류하니 행사 규모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2001년 200여 개였던 세미나는 2017년 4000여 개로 늘었고, 50주년 기념행사인 2018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방문객도 5000명에서 4만 명으로 급증했다.

박람회 혹은 축제로 불리는 이 행사에는 모든 정책 이슈가 메뉴에 오른다.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광장과 골목, 호텔 세미나실, 컨벤션 센터, 야외 카페, 식당, 중세 성곽에서 각종 세미나와 연설이 뷔페식으로 열린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논의를 들으며 질문하고 즐긴다.

알메달렌 주간은 이웃 국가들에도 수출됐다. 덴마크의 보리홀름(Borgholm), 노르웨이의 아렌달(Arendal), 핀란드의 뵈네보리(Björneborg)에서 알메달렌 주간과 같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덴마크는 6월 중순, 스웨덴은 7월 초, 핀란드는 7월 중순, 노르웨이는 8월 중순에 정책 박람회를 개최한다. 북유럽이 가장 아름다운 여름휴가 기간이라 정책에 관심이 있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알메달렌 행사에는 누구나 참여해 정책 세미나나 부스를 운영할 수 있지만 조직위에 사전 신청서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폭력이나 체제 전복을 선동하는 내용, 인권 침해를 목적으로 하는 행사, 상업적 목적 등을 차단하기 위한 절차다.

알메달렌은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한 관광지인 고틀란드섬의 주도 비스뷔(Visby)의 시내 중심가다. 고틀란드섬은 16세기까지 중요한 거점 상업 도시였고, 중세기에는 한사(Hansa)동맹이라는 독일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 고틀란드의 핵심 지역이 알메달렌이다. 중세의 성이 감싸고 있는 섬의 중앙에 위치한 알메달렌에서 주간 세미나와 거리 행사, 저녁 축제 등이 모두 열린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좁은 골목을 둘러싼 고풍스런 주택과 성곽, 무너진 건물에 낀 이끼가 어우러지는 독특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웨덴의 정치는 축제로 다시 태어난다.
아름다운 중세 성곽을 배경으로 열리는 알메달렌 주간은 정치 박람회인 동시에 축제다. ⓒNews Oresund

누구나 정치인이 되는 곳


알메달렌에서 성곽 문을 관통하는 골목은 가장 붐비는 곳이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특산물을 파는 작은 상점부터 카페, 식당, 편의점까지 들어서 있어 행사 기간 내내 북적인다. 작은 공터, 야외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서는 크고 작은 정책 세미나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이 유난히 많이 운집한 곳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인기 정치인이나 기업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골목 구석구석을 방송 기자들이 누비며 취재 경쟁을 벌인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토론도 많다. 라디오 방송국 부스에서는 국가의 대형 이슈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놓고 정치인, 전문가, 예술 문화인, 방송인을 생방송 토론에 초대한다. 사람들은 출연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안내판을 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 볼 수 있다.

골목을 따라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무너진 옛 건물터가 보인다. 중세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공터에는 큰 텐트가 설치되어 있어 각종 이익 단체와 언론사, 기업이 번갈아 가며 세미나를 연다.

사람 숲을 뚫고 조금 더 걸어가면 16세기에 지어진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이 하나 나온다. 이곳은 사방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어 매우 인기 있는 정책 토론장이다. 방문객들이 많이 지나가는 지역이라 마이크를 들고 메시지를 전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미리 경찰에 신고해 도로 사용료를 납부하면 허가된 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직 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여성당은 이 광장에서 여러 번 행사를 치렀다. 여성당 대표인 귀드룬 쉬만(Gudrun Schyman)은 전국적 인지도가 있는 정치인이다. 그녀의 연설은 매번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여성당이 연설할 때는 광장이 정당 로고색인 분홍색 물결로 가득 채워진다.

극우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의 연설도 이곳 광장에서 주로 진행된다. 2014년 당시 스웨덴 민주당 대표였던 임미 오케손(Jimmie Åkesson)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 오케손은 30대 젊은 정치인으로 연설 능력이 뛰어나 젊은 유권자들과 중장년들 사이에서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외국인 정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환호와 야유가 뒤섞였다.

스웨덴의 전통과 가치를 강조하면서 이민자 혐오주의를 보이는 이 정당은 도시보다 농촌 지역에 지지 세력이 많다. 특히 실업률이 높은 중소 도시에서는 절대적 강세를 나타낸다. 최근 두 번의 선거에서 지지율이 급속도로 성장해 현재 스웨덴 8개 정당 중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광장 한구석에는 고틀란드시 부스가 설치돼 있다. “고틀란드로 이사 오세요”라는 인사말과 함께 시장이 직접 팸플릿을 나눠 주고 있다.

광장을 왼쪽으로 끼고 조금 더 내려가면 탁 트인 열린 공간이 나온다. 호수가 있고, 그 뒤로 바닷가가 알메달렌을 품고 있다. 길 양쪽에는 방송사 스튜디오가 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방송 토론을 보기 위해 관중이 몰린다. 이때만큼은 정치인들이 아이돌보다도 높은 인기를 누린다.

호수 앞에는 대형 국제회의장, 고틀란드 대학 도서관과 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건물들은 알메달렌 행사 기간에는 정책 토론장으로 개방된다. 워낙 신청자가 많아 1년 전부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예약하기가 어렵다.

대학 도서관을 오른쪽에 두고 항구 쪽으로 방향을 틀면 신문사 부스, 정당 부스, 청년회 부스가 있다. 음료수, 볼펜, 배지, 다양한 기념품, 자료집 등이 비치되어 있어 하나씩만 모아도 금세 가방이 무거워진다. 어깨띠를 두른 행사 관계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 무지개색의 어깨띠를 두른 HBTQ(Homo Bi Trans Queer Sexual·LGBTQ의 스웨덴식 표기) 연합회도 보인다. 매년 5월마다 게이 퍼레이드를 여는 단체다. 그 옆 큰 공터에는 스톡홀름 외교 정책 연구소, 국제 원조국, 구호 단체들이 운영하는 큰 부스가 자리 잡고 있다. 이민, 인권, 성 평등, 테러 등이 주요 이슈로 등장한다.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평등부 장관, 차별 옴부즈맨(Diskreminerings ombudsman)[1], 민간단체 및 전문가들의 토론이 열리면 인근 골목 전체가 북적인다. 텐트 안은 물론이고 텐트에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TV 화면과 스피커로 실시간 중계를 시청하는 이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룬다.

항구 접안 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또 다른 부스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치과 의사 협회에서 설치한 이동 치과 진료소 앞은 간단한 진료를 받을 수 있어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SOS 센터에서는 100명의 자원자들을 모아 놓고 인공호흡법을 교육한다. 참가자들이 마네킹을 바닥에 눕혀 놓고 실습을 한다. 근처에 서 있는 행사 진행 요원들에게 예약을 해야 연습에 참가할 수 있다. 교육이 끝나면 SOS 센터에서 제작한 인공호흡 마네킹을 가져갈 수 있어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에서는 경찰 부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찰관들이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안전 장비들을 보여 준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관심을 보인다. 어두운 밤 안전에 필요한 리플렉스도 하나씩 나눠 주고 있다. 빛을 반사하는 리플렉스는 운전자가 보행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반사경으로, 재킷, 팔찌, 장갑, 신발 등에 부착할 수 있다. 밤에 산책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경찰의 세심한 배려다. 경찰 부스 옆에 설치되어 있는 약국 부스에서는 안전과 건강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다. 부스 앞에서는 하얀 약사복을 입은 약사들이 나와 선탠로션을 나눠 준다.

동쪽 성곽 문부터 항구까지 걸어서 1킬로미터 정도. 설렁설렁 기웃거려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성 정체성도 모두 관계없이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밝힐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생활 속의 정치다.
국영 라디오 방송 SR 스튜디오 앞에서 정치인들이 출연을 기다리고 있다.
 

영어만큼 중요한 언어, 수화


알메달렌 주간이 열리는 일주일간, 4000개에 가까운 행사가 열린다. 행사를 고르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알메달렌 주간을 찾은 거의 모든 참가자들의 손에는 조직위의 책자가 들려 있다. 모든 프로그램을 정리해 둔 이 책은 알메달렌을 탐험하기 위해 필요한 내비게이션과 같은 존재다. 2015년부터는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하면 책자와 똑같은 정보를 볼 수 있다.

책자에는 세미나를 조직한 기관명, 담당자 이름, 연락처, 행사의 간단한 내용 요약, 참가자 이름 등이 실린다. 이와 함께 세미나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한 몇 가지 필수적 정보가 제공된다. 커피, 차, 샌드위치와 같은 간단한 음료가 제공되는지, 칵테일, 와인과 같은 알코올음료도 함께 제공되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행사에서 사용하는 언어 정보도 필수다. 영어인지, 스웨덴어인지, 혹은 통역이 함께 제공되는지 등의 정보가 실린다.

많은 정보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접근성과 관련한 정보들이다. 행사 장소에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나 계단 보조 기구가 설치되어 있는지, 청각 장애인을 위해 수화를 제공하는지가 핵심 정보에 포함된다. 알메달렌에서 수화 통역은 외국어 통역 이상으로 중요한 행사의 요건이다.

알메달렌의 하이라이트인 저녁 7시 당 대표 연설은 반드시 수화 통역사를 대동하고 진행된다. 행사장에서 떨어진 공원의 분수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당 대표의 연설 모습과 함께 수화 통역을 띄운다. 모든 사람이 행사에 참여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알기 위해 조직위를 찾았다. 카린 린드발(Karin Lindvall) 조직위 사무총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1995년부터 19년 동안 알메달렌 행사를 조직해 온 이 행사의 숨은 공로자로 2014년 올해의 고틀란드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지역에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다.

린드발 사무총장은 알메달렌이 이렇게 큰 행사로 성장할지는 몰랐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크게 시작했다면 분명 실패했을 거라고 했다. 시민의 참여는 조직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메달렌은 처음 시작할 때는 그저 작은 지역의 정치 행사였지만, 모든 정당이 참여하고 정당 대표들이 직접 찾아와 연설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행사가 아니라 국민의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늘면서 알메달렌이 성장할 수 있었다.

행사가 커지면서 조직위는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알메달렌은 성곽에 둘러싸여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에 행사장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직위는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고틀란드 대학과 협의해 캠퍼스의 세미나실을 개방하고, 대강당 같은 공공 시설물도 활용했다. 지역 호텔들도 회의장을 세미나장으로 제공했다.

대형 행사장이 없었던 고틀란드시는 2003년 국제회의장 시설을 짓기로 결정하고 260억 원을 들여 2007년에 완공했다. 지금은 중대형 세미나 및 강연 등은 국제회의장 컨퍼런스 회의실에서 열려 장애인과 노약자의 접근성이 좋아졌다.

알메달렌의 성공 요소로 꼽히는 참가 단체들의 천막 행사도 접근성을 높이는 동력이 됐다. 누구나 진입하기 쉬운 항구 정박장과 가까운 주변 도로에 설치한 천막은 행사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까지 하니 일거양득이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진행되는 행사는 사전 심사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천막들은 모두 공익적 주제를 내걸고 이벤트를 벌인다. 천막 행사는 청소년과 대학생이 거리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특히 어린이들이 정치를 배우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기의 알메달렌은 비장애인이 다수인 지역 축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함께하는 스웨덴의 정치 축제로 거듭났다.
마그달레나 안데르손(Magdalena Andersson, 왼쪽) 재무부 장관의 연설이 수화 통역되고 있다. ⓒ고틀란드시

전함 위에서 열리는 양성 평등 세미나


알메달렌 항구에 정박해 있는 구축함으로 발길을 옮긴다. 국방부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스웨덴 국방부는 매년 칼스크로나(Carlskrona) 전함을 알메달렌에 보내 행사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테러에 대비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함정 일부 시설을 개방해 국방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함정 위에서 열리는 다양한 세미나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2017년에는 어떻게 하면 사회 각 분야에 더 많은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을지, 여성 롤모델의 존재가 여성 지도자 육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주제였다. 각 분야의 여성 지도자들이 세미나에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상에 흰 텐트를 둘러치고 만든 세미나장에는 60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참석자들의 명단을 보니, 미카엘 비덴(Mikael Bydén) 군 참모총장, 에리카 스벤손(Erika Svensson) 중소기업 리더십 협회장, 아만다 룬데텍(Amanda Lundeteg) 올브라이트(AlBright) 여성 경영인 재단 이사장, 쉐스틴 룬데베리(Kerstin Lundeberg) 아카데미스카 후스(Akademiska Hus) 대학 캠퍼스 개발원장[2], 한나 레이드홀트(Hanna Leidholdt) 스웨덴을 위한 교육 협의회 이사의 이름이 보인다.

국방부가 앞장서서 여성 지도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한 전문가 토론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군대는 전통적으로 남성 지배적 세계가 아니던가. 그래서 군은 성 평등의 사각지대이기도 하다. 세미나에서는 여군의 인권 문제가 취약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사회자는 군이 능력 있는 여성 장교를 더 많이 필요로 하는데도 중도에 탈락하는 여성 지원자가 많다고 설명하면서, 여성 장교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유능한 인재로 길러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알아보기 위한 세미나라고 전한다.

매년 상장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발표해 관심을 받고 있는 올브라이트 여성 경영인 재단의 룬데텍 이사장은 여성 지도자 비율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적 문화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성 경제인들의 대기업 이사회 참여 비율, 여성 경영인들의 기업별, 산업별 임금 수준 및 근무 조건 등을 다루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올브라이트 재단의 결론은 남성 중심의 관행과 기존의 가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기득권과 맞서야 한다는 룬데텍 이사장은 당장의 불이익과 심리적 부담으로 충돌을 회피한다면 변화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가 하부에서 중간으로, 그리고 중간에서 최상위층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중도 탈락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여성 이사, 여성 최고 경영자가 많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능력 있는 여성이 중도에 탈락하는 비율이 남성에 비해 높아서다. 여성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위층의 시스템을 아직도 남성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더불어 이 장벽을 깨려는 여성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의 부재도 원인의 하나로 지적한다.

비덴 참모총장은 군대 내 성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평등권의 기초 위에서 사병과 장교에게 인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소수자의 목소리와 요구 사항을 수시로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으면 군대는 인권 사각지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권 보호를 위해서는 최고 결정권자의 열린 자세가 중요하다면서 지도자층의 다양성 차원에서 여성 지도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자살, 총기 사고, 부대 이탈 등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별적 구조의 방치라는 원인이 있다. 걸출한 여성 장교들을 더 많이 배출해 군 내 성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튼튼하고 안전한 국방으로 이어진다는 비덴 참모총장의 말에 공감했다.

스웨덴은 전함이라는 특별한 세미나장에서, 가장 남성적 조직이라는 군대의 평등과 인권 문제를 논하는 나라다. 물론 성 평등 지수 면에서 세계 각국 가운데 가장 앞서 있다는 스웨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장벽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은 사회 복지와 가족 정책 지원 제도를 통해 많이 해소됐다. 무상 교육과 학업 수당을 통한 남녀 기회의 평등, 직장 민주화를 통한 임금 평준화, 경력의 단절과 육아로 인한 직장 내 차별의 해소, 노동 환경에 따른 건강 문제, 특히 산모와 중년 여성, 장애인 여성의 건강 문제 해결, 남녀 연금생활자의 연금 격차 해소 등이 복지와 가족 정책으로 인한 성과다.

그중에서도 정치 분야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스웨덴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45퍼센트 수준에 이른다. 지방 정치에서도 남녀 간 비율에 큰 차이가 없다. 내각의 장관직도 남녀가 반반씩 나눠 갖고 있다. 스웨덴 정치권의 남녀평등을 살피는 것은 경제계 등 다른 분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성차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우선 스웨덴에서는 정계에 진입하는 문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다. 여성 정치 지망생의 수가 남성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 지방 정치는 봉사직이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가 시간을 활용해 정치를 택한다. 자녀의 교육, 학교 문제, 장바구니 경제, 탁아소, 노인 복지 등과 같은 생활 이슈에 비교적 관심도가 높은 여성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여성의 참여가 많다 보니 상임 위원 및 상임 위원장 선출에서도 남녀가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인재 수급 단계에서부터 능력 있는 여성이 많이 포함되고, 중간 관리자 수준에서도 많은 여성이 후보로 선택된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명부 역시 권역별 후보자를 당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구조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순위에 여성 후보가 많이 들어가고,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올라가더라도 여성이 탈락하지 않는 이유다. 결국 최상위층에도 여성 인재가 넘친다. 여성 장관, 여성 당 대표가 쉽게 나올 수 있다. 권력은 자연스럽게 분점된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각 분야에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스럽게 성차별적 요소는 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핵심은 당원이 실질적 권한을 갖는 후보 공천과 투표 제도라 할 수 있다. 즉 정당 민주화다. 사회 전 분야에서 성별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분위기가 되기 위해서는 분야별 민주주의(democracy by sector)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는 각 분야의 민주화를 제대로 이뤄지게 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도 결국은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 왔던 남성의 우월적 권력하에서 생존을 위해 고통을 감내했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변화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권위에 눌려, 상하관계의 구조 속 에서 밝혀지지 않은 고통스런 이야기가 여전히 많을 것이다.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 없이는 미투 운동의 확산이 쉽지 않다. 사회가 변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다.
유엔 여성 위원회 스웨덴 지부에서 설치한 천막 스튜디오 앞에서 마가렛다 빈베리(Margaretha Winberg) 전 법무부 장관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의 배너에는 “양성 평등은 인권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1]
스웨덴의 차별 옴부즈맨은 국민이 차별을 받았다고 느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일종의 국민 청원 관리 기관이다. 신고된 사안은 반드시 조사 후 당사자에게 결과를 통보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정부에 시정을 요청할 수 있다.
[2]
대학 캠퍼스 개발원은 대학 캠퍼스의 건축과 관리를 담당하는 스웨덴의 국가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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