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띠를 두른 정치 꿈나무들


소년, 소녀가 알메달렌 광장에서 사민당 로고가 인쇄된 어깨띠를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팸플릿을 나눠 주고 있다. 작은 체구에 앳된 모습이 철없는 개구쟁이들처럼 보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사민당 청년부에서 활동하고 있고, 정당 홍보와 함께 새로운 당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를 물으니 13살, 14살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뭘까. 소년은 친구들과 여름 캠프에 갔다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정치 난민 부모를 둔 친구를 만난 것이 계기라고 했다. 아프리카 여성들의 불평등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프리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적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녀가 평등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꿈이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는 집에서 부모님과 대화하면서, 그리고 학교 사회 시간에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우면서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라고 하지만 장애인 친구들을 보면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기성 정치인들과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하는 어린 친구들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지역 사무소 당직자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24세인 여성 분과 위원장은 현재 고틀란드시 지방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정치 경력은 10년. 지금 막 어깨띠를 두르고 나간 소녀처럼 14살에 청년부에 가입해 정치 수련을 거쳤다. 올해 21세인 남성 당직자는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지역 정당에서 일하고 있다. 졸업 후엔 고틀란드시 의원으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역시 12살에 어머니를 따라 정치 집회에 나갔다가 청년회에 가입하면서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당의 지역 사무실은 청년회 소속 회원들의 교육뿐 아니라 여성 협의회, 장애인 협의회, 연금생활자 협의회, 기독교 협의회 등 다양한 단위로 구성되어 당원들의 정치 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지역 총회에서 중앙당 총회에 건의할 안건을 수렴해 다수결로 결정하고 중앙당 총회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해 보내기도 한다. 지방 단위의 정당 조직은 스웨덴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고 있다.

스톡홀름에서 만났던 한나 바게니우스(Hanna Wagenius) 중앙당 청년위원장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바게니우스는 “어린이가 걸음마부터 배워야 걷고 뛸 수 있듯이 정치도 청년회에서 정책의 기초와 인성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22세에 국회의원 선거와 유럽 의회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조만간 국회에 진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재목이다. 전국 청년회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신진 정치인은 정당의 큰 인적 자원이다.

예스퍼 린드홀름(Jesper Lindholm) 사민당 스톡홀름 청년 협의회 위원장은 사민당의 청년 회원들이 유럽 국가들의 사민당 청년 회원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 경험은 물론이고 유럽 각국의 미래 정치인들과 구축하는 네트워크까지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각 당의 청년 협의회는 북유럽 청년 조직과의 만남, 유럽 청년 협의회 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민당 청년 협의회는 다른 당에 비해 더 많은 정당들과 교류한다. 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청년 지원 사업과 더불어 유럽 30개국과도 교류한다. 40개국 이상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아르바 코칼라리(Arba Kokalari) 보수당 청년회 국제 담당관은 청년 회원들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유럽,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과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제 교류의 경험은 균형 잡힌 정책 능력을 키워 주는 매우 중요한 교육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치의 새로운 틀을 세우려면 결국 능력 있는 청년 정치인을 제대로 길러 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청소년기부터 정책을 배우고 국제적 역량을 가진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다.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면 장기적인 정치 발전은 어렵다.
부모와 함께 참석한 청소년, 유모차를 타고 온 아기들까지 알메달렌 주간 참석자들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정책을 배우는 청년 정치


성곽 잔디 앞에 30여 명이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점심을 도시락으로 때우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걸어오는 마티아스 순딘(Mattias Sundin) 노르셰핑(Norrköping) 시장이 보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했다. 그에게 스웨덴에서 장애인으로서 정치를 하는 것, 스웨덴 정치의 강점에 대해 물었다.

왜 정치를 하게 됐나.

사민당이 지배한 스웨덴에는 국가와 지방이 나의 삶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의존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생각했다. 장애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스웨덴은 교육비가 무료다. 아동 수당, 출산 휴가를 위한 부모 보험 등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경력 단절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다. 장애인들도 공부할 때 학습 보조원 제도를 활용할 수 있어 어려움이 없다. 실패했을 때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국가의 책임 영역을 계속 늘려 나가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더 많이 만드는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웨덴에서 장애인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에 그런 차별이 있었다면 아예 발을 들이지 않았을 거다. 도리어 기회가 많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만드는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언제든 필요하다. 내가 보는 사회 문제에 대한 시각은 다를 수 있다. 젊은 장애인들이 정치에 많이 들어와서 활동해야 한다. 그런데 장애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오히려 당내에서 성장하는 속도가 빨랐다.

스웨덴 정치인들의 토론 능력이 뛰어난 이유는 뭔가. 비방하지 않고 인신공격하지 않으면서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된 배경이 궁금하다.

스웨덴 정치인들은 대개 어려서부터 정치에 입문한다. 나는 21세에 입문했으니 예외적으로 늦은 편이다. 입문 후 1년간 청년회에서 진행하는 세미나를 통해 정책 공부를 했다. 다양한 주제로 매주 행사가 열린다. 연사는 당 대표부터 원내 대표, 당 소속 지방 자치 단체장과 국회의원들이다. 입법 과정, 정책 관련 법규, 관심을 가져야 할 주요 이슈를 토론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정책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 나누면서 왜 정치를 해야 하는지 절감하게 된다.
결국 정책을 모르면 정치를 할 수 없다. 정치란 우리의 정책을 유권자에게 알리고 지지를 얻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문제를 들춰내 지지를 받는다면 결국 알맹이는 없는 인기 영합주의에 불과하다. 이런 정치의 피해자는 국민이다.

청년 정치 조직은 정당의 들러리 아닌가.

그렇지 않다. 청년 정치 조직은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다. 정책 의제, 재정, 지도부 선출 등 모든 것을 자율적, 독립적으로 수행한다. 치열한 정책 경쟁으로 마을 단위 지도부를 선출하고, 지역부터 중앙까지 순차적으로 올라가며 지도부를 구성한다. 각 지역별 청년회가 활성화되어 있어 지역 청년회 간 교류도 빈번하다. 전국 청년 대표는 정당의 상임 위원회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권한이 막강하다. 청년 당원으로서의 활동은 지방 정치인이 되는 과정이다. 결국 지역 정치인이 중앙으로 진출해 국회의원이 되기 때문에 청년 정치는 정치 입문의 필수 코스다.

순딘은 2014년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당 청년 단체, 지방 자치 단체장,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스웨덴 정치인의 모습이다.

순딘 시장의 잔디 토론을 뒤로하고 사민당 청년 부스를 방문했다. 사민당 청년회 부스에 낯이 많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스톡홀름에서 고틀란드로 오는 배에서 만난 청년이었다. 노르셰핑 시장과의 대화가 여운이 남아 청년 정치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본다. 대답은 녹음기를 튼 것처럼 비슷하지만 정치인의 부패 해결 문제에 대한 답까지 담고 있었다. 그는 “청년 정치인들의 저변이 넓으면 넓을수록 유능한 정치인의 충원이 수월하고 선택의 폭도 확대된다”면서 “정치가 부패하는 이유는 대체할 사람이 없어 문제가 있어도 계속 출마하도록 놔두는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명쾌한 답변에 그가 준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가브리엘 빅스트룀(Gabriel Wikström). 사민당 청년회장.’ 빅스트룀 회장은 29세였던 2014년, 보건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스웨덴의 3C 정치


나와 동행한 한국의 청년 정치인 지망생들과 함께 스웨덴 보수 정당의 고틀란드 지역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정치 꿈나무들과의 만남을 제안하자 스웨덴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우파 여당 4개 정당의 관계자들이 모두 시간을 내주었다.

보수당 지역 사무소는 알메달렌 중앙 성곽 바로 밖에 있는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70평방미터 정도 크기의 사무실은 2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사무실, 다른 하나는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회의실로 들어서니 4개 정당의 고틀란드 시의원들이 인사를 건넨다.

4개 정당에서 모두 참가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니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4개 정당 지역 대표들이 수시로 모여 지역 현안을 논의하기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흔하다는 것이다.

정당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이 다른데도 수시로 협의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선거 때에는 경쟁자가 되지만, 선거가 끝나면 다양한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대화하고 협의하는 파트너다. 이들은 “서로 싸운다는 것은 자주 만나지 않고 담을 쌓고 지낸 것의 결과물”이라면서 “자주 만나면 첨예하게 맞서던 이슈에서도 결국 합의점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아터(David Arter)는 저서 《북유럽 정치》에서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특성을 협조(cooperation), 합의(compromise), 일치(consensus)의 3C로 정의한다. 자주 만나 협조하고 서로 합의점을 찾아가며 일치를 이루는 것이 협의 정치의 성공 요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협조할 수 없는, 합의되지 않는 안건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다수결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주민과 연관된 사안의 경우엔 주민 투표 등을 통해서 다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대화로, 다수결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간다니 스웨덴 정치에는 문제가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바로 청년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도 새로운 정치인을 발굴하고 현장에 투입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신진 정치인을 수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스웨덴 정당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이 모두 감탄한다.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권력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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