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
1화

진리를 목격하는 자

무엇이 문제인가

 
삶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인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문제가, 계속적인 인지나 생각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순간들이 있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사람들을 올바르게 안다는 것이 어쨌든 삶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은 남는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잘못 아는 것이다. 그들을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그러고는 세심하게 재고해 본 후에도, 그들을 다시금 잘못 아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잘못 아는 존재들이다.
—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래 2018년 현재 #미투(MeToo) 운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는 한국에는 특히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하나의 주류적 가치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적 의식이 드러나는 언어 표현에서부터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이르는 다양한 ‘폭로’가 한국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깃든 주요한 형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정치적 올바름의 태도는 여성 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실제적 문제와 결합함으로써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 속에 자리잡았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으로, 단순한 전개와 인물 설정, 문학적인 방식이 사라진 르포식 묘사를 통해 전달되는 익숙한 여성 차별의 현실을 전면화함으로써 문학계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훨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정치적 올바름의 태도가 문학을 잠식하는 한 예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은 오랫동안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반대편에서 현실, 주체, 이상, 욕망 간의 모순을 끊임없이 묘사하고 지적해 왔다. 유토피아적 열망이 최악의 암울한 현실을 낳음을 보여 주는 디스토피아 서사는 대표적일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가 가진 모순과 문제를 비판하는 데 있어 디스토피아 서사는 유용하며, 우리에게 문학과 예술의 자리란 언제나 분열과 모순의 한가운데임을 환기한다.

 

정치적 올바름 혹은 양날의 칼

 
18세기 미국에서 출현한 이후 1970~80년대를 거치며 성장하고 변모한 정치적 올바름의 스타일은 좌·우파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현재는 언어와 문화를 통해 편견 없는 정체성의 재현을 원하는 좌파들의 중요한 문화적 무기가 됐다. 오래전부터 정치적 올바름은 그것의 올바른 비판 의식과는 별개로, 순수함과 올바름과 편견 없음에 대한 과도한 열망이 그 자체로 검열과 통제를 부를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은 미국에서 18세기경에 처음 나타났고, 20세기 초 소련 공산당과 미국 사회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소련 공산당의 당파주의에 반대하는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이를 비판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으나, 이 표현이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실질적으로 1970년대 이후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은 1970년대의 미국 신(新)좌파들이 성차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언사를 일삼는 동료에게 1960년대 이전 스탈린 시대의 교조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는 어조로 비꼬아 말하는 화법에서 유래됐다. (“그런 표현은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동지.”)[1] 그러니까 정치적 올바름은 애초에 좌파들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하는 데서 시작한 것이다. 왜? 이들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과 올바름(correctness)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 자체를, 즉 자신들의 교조적 역사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올바름이라는 단어는 올바르지 않음, 틀림의 반대말인데, 인간적 삶의 현실을 다루는 정치 영역을 수학처럼 옳거나 틀렸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일이 이미 교조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이렇게 쓰이던 표현은 1980년대에 한 번 꼬이게 된다.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로 이어지는 1980~90년대의 집권 세력이었던 소위 뉴라이트(New Right)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경제,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 전체를 신자유주의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전략을 썼다. 즉, 도덕, 섹슈얼리티, 양육, 교과 커리큘럼, 노동 윤리 등 문화 영역 전반을 이윤, 경쟁, 투자, 탐욕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을 바꾸려 노력했다.[2] 뉴라이트의 이런 문화 정치는 역으로 그전까지 신 좌파들이 아이러니하게 썼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상의 영역을 장악하려는 우파들과의 ‘문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좌파들은 개념, 언어, 재현의 영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어 자체를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학문적 변화도 이 시기에 있었다. 1980~90년대를 거치며 미국 지성계를 뒤바꿔 놓았던 언어학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듯이, 언어란 현실의 객관적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핵심적 장소로 변했다. 언어가 우리의 왜곡된 인식이 집약된 공간이라면 언어를 바꿈으로써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어야 행동도 바뀔 수 있고, 세계도 바꿀 수 있다. 더불어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면서 (경제적) 계급 모순만을 사회의 핵심 모순으로 봤던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족, 교육, 종교,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 정체성, 미디어 등에 대한 문화적 개입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기존에 비정치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들이 정치화됐고, 계급과 노동으로만 수렴됐던 정체성이 여성, 흑인, LGBT, 탈식민지인 등으로 분화되면서 정체성 정치가 발흥했다. 요컨대, 문화가 정치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근본 장치로서 언어의 중요성이 증폭된다. 이를 정치의 문화화(the culturing of politic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3]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적 문화 정치를 겪어 내는 과정, 그리고 서양 철학이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결합하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갖지 못한 소수자들 편에 선 좌파들은 ‘언어와 정체성’을 핵으로 하는 ‘스타일’을 갖게 된다. 이 스타일을 이르는 이름이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문화 속에서 뜨거운 논란이 되는 정치적 올바름이다.

엄밀한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언어적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정의 역시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언어학자 제프리 휴스(Geoffrey Hughes)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란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적이고 품위 있는 정신에서 시작되었으나, 추악한 편견이 담긴 표현들 중 일부를 억누름으로써 언어를 위생 처리하려는, 그럼으로써 과거의 어떤 부당함을 바로잡거나 사회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희망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히 하려는’ 조금은 청교도적인 언어적 개입”이다.[4] 이 정의에서 드러나듯, 정치적 올바름은 한편으로는 더 평등하고, 더 다양하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욕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목표에서는 자유를 지향하나 실천에서는 종종 자유를 제한하는” 면모를 보이며, 그래서 “긍정적 차별(positive discrimination)” 혹은 “자유주의적 정통주의(liberal orthodoxy)”라는 모순적 표현을 낳기도 한다.[5]

정치적 올바름에 담긴 모순의 근원은 좌파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지닌 청교도적 특징은 이 개념에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서 읽을 수 있다. 영국에서의 종교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땅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아메리카를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이뤄지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6]로 만들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토피아를 향한 강렬한 의무감은 그것을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낳는다. 유토피아주의와 증오의 동시성은 1630년 보스턴 지역에 정착한 청교도를 그린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 글자》에서 이들이 마을을 만들며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교회와 교도소였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의 반대편에 있(어야만 하)는 교도소와 처벌 장치는 ‘마녀사냥’이라 불리는 사건들로 극대화된다. 청교도의 이상은 마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고, 마녀가 없으면 마녀를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청교도적 정신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양키’들의 핵심 정신이자 이들이 미국 전역에 이식하려 한 문화였고, 이것은 미국의 다른 지역에 정착한 다른 정신을 가진 유럽인들, 특히 노예제 사회인 딥 사우스, 영국 젠트리 정신을 계승하는 타이드워터, 평화주의 퀘이커교 정신을 이어받은 미들랜드, 자유분방한 개척 정신을 가진 그레이터애팔래치아와 부딪히며 큰 갈등을 낳았다.[7] 독립 전쟁에서 시작해 남북 전쟁에서 폭발했다가, 사그라지지 않고 트럼프의 당선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 바로 이 갈등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힐러리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표상되는 뉴잉글랜드 양키의 청교도주의와 닿아 있고, 양키와 전면전을 선포하고픈 남부와 중서부 노예주와 노동자들의 문화가 트럼프를 매개체로 삼았던 셈이다. 요컨대, 정치적 올바름의 뿌리에 있는 청교도주의는 유토피아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선한 의지를 가졌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도의 폐쇄성과 강박도 함께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미국을 벗어나 세계로 퍼져 가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스타일의 보편적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특유한 스타일은 얼굴을 마주보고 대결하는 발화 양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공적인 논쟁에 더 적절해 보이는 입장과 톤을 가진 목소리로 소위 ‘사적인’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 (많은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이 가진 극도의 ‘유명론(nominalism)’을 언급한다. 즉, 어떤 것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에 대해 고도로 개인주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곧 정치를 외롭게 전투에 임하는 개인이 ‘변치 않는 진리를 목격하는(witnessing to the Truth)’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8]

인용문에서 홀이 말하는 세 가지 특징은 ① 사적인 영역에 대한 공격적인 정치화, ② 언어가 현실을 바꾼다는 강력한 믿음, ③ 자신이 ‘진리’의 목격자이자 수호자라는 확신이다.
이상의 논의들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교조주의나 정통주의와 연결되곤 한다는 점, 하나의 스타일로서 자유주의자나 좌파뿐만 아니라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파가 전유하기도 한다는 점,[9] ‘진리’를 수호한다는 강력한 믿음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근본적 특징이 가진 양면성을 주목하는 일이 중요한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나 행동을 둘러싼 논란은 모두 이 양면성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 필요한 진리를 자신만 알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교조적 성향을 지니게 된다. 정치적 올바름, 그것은 잡는 순간 베이기 쉬운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1]
Stuart Hall, 《The War of the Words: The Political Correctness Debate》, ed. Sarah Dunant, London: Virago, 1994, pp. 164~165.
[2]
이 시기를 우파와 좌파 간의 ‘문화 전쟁’이 벌어진 시기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표적으로 Richard Bolton, ed. 《Culture Wars: Documents from the Recent Controversies in the Arts》, New York: New Press, 1992를 참고할 것.
[3]
Stuart Hall, op. cit., p. 167.
[4]
Geoffrey Hughes, 《Political Correctness: A History of Semantics and Culture》, Chichester: Wiley-Blackwell, 2009, p.3.
[5]
같은 글. p.4
[6]
이 표현은 청교도들을 이끌고 1630년 뉴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는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럽이 대서양을 건너며 한 설교 〈기독교인의 자비라는 모델(A Model of Christian Charity)〉에 등장한다.
[7]
미국 역사에 대한 문화지리적 접근으로는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정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7을 참고할 것.
[8]
Stuart Hall, op. cit., p.168.
[9]
대표적인 예로, 노동자의 자유로운 해고를 ‘구조조정’으로, 경영자의 반노동적 정책들을 ‘혁신’으로, 노동자에 피해가 가는 재정 정책을 ‘긴축’으로 표현하는 등 기득권의 욕망을 가리는 방식으로 중립적이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행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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