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에 다녀왔습니다
2화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피

품질은 철학이다

 
일본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지역은 도쿄 시부야다. 특히 시부야역을 가로지르는 스크램블 교차로는 보행 신호로 바뀔 때 건너는 사람이 3000명이나 된다고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교차로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브랜드의 매장이 밀집해 있다. 식음료 매장도 마찬가지다. 교차로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 시부야 쓰타야 지점은 도쿄에 방문하면 꼭 가봐야 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 가운데 가장 매출이 높다는 루머가 돌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렇게 번화한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는 젊음의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페가 하나 있다. 노포 느낌이 나는 입구로 들어가면 기다란 바와 함께 오랜 세월을 거쳐 온 듯한 목조 테이블과 의자가 보인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두어 명의 바리스타가 고객을 맞이하는데, 어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카페와는 다른 낯선 느낌이 든다. 바리스타 뒤쪽으로는 어림잡아도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각기 다른 커피 잔들이 보이고 천정에 가까운 맨 위 칸에는 1989년부터 매년 제작했다는 각기 다른 디자인의 푸른 접시가 진열돼 있다.

누런 갱지에 세로쓰기로 적힌 메뉴를 보고 커피를 주문하면 바리스타는 진중하면서도 능숙한 손놀림으로 주문한 원두를 확인하고 결점두를 걸러 낸 뒤 갈아서 핸드 드립을 시작한다. 그렇게 정성껏 내린 커피를 고객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으면, 온전히 단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서만 사용한 10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다. 이 카페의 이름은 차테이 하토(茶亭羽當). 블루보틀 창업자 프리먼이 “인생을 바꾸는 완벽함(Life-changing Perfection)”, “밍크코트의 사치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극찬한 곳이다. 프리먼은 2016년 스탠퍼드 대학 강연에서 차테이 하토 매장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블루보틀을 창업할 때 영감을 얻은 곳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

이처럼 바리스타의 혼을 담아 서비스하는 일본의 카페는 흔히 깃사텐(喫茶店)이라고 불린다. 직역하면 ‘차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전통 문화인 다도(茶道)의 정신이 녹아 있는 깃사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페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센노 리큐(千利休)가 1500년대에 완성한 다도는 ‘주인과 손님이 대등한 관계로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정숙하게 예의를 지키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한다. 찻잎을 선별하는 것부터 우리고 마시는 모든 과정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도의 정신이 차가 아닌 커피에 적용된 공간이 바로 깃사텐이라 할 수 있다.

커피 추출 과정에서 예술적 완벽성을 기하는 문화는 가장 좋은 재료를 선별하고, 세심한 로스팅 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최적화된 기기를 개발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초의 드리퍼는 1908년 독일의 멜리타 벤츠(Melitta Bentz)가 개발했지만, 이를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하리오, 칼리타, 고노 같은 드리퍼는 모두 일본 제품이다. 국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서도 볼 수 있는 추출 기구 사이폰, 융 드리퍼 역시 일본에서 개발됐다.[2]

미국의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에스프레소 카페가 일본 카페 시장을 점유하면서 깃사텐 카페들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러나 커피업계 제3의 물결로 불리는 스페셜티 커피의 흐름과 함께 최고의 제품을 추구하는 깃사텐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깃사텐 문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사업화한 블루보틀이 있다.

 

느리고 불편한 카페

 
커피와 관련한 프리먼의 첫 추억은 네다섯 살 무렵 부모님이 사온 엠제이비(MJB) 캔 커피였다. 오프너로 캔에 구멍을 뚫었을 때, 캔에서 새어 나오는 커피 향을 맡으며 마치 어른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아서 맛보지 못했던 커피 한 캔은 프리먼에게 커피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게 되었다. 10대가 되고 나서 이탈리아 출신인 매형을 통해 커피 마시는 문화를 배우게 되었는데, 커피를 즐기면서 문화와 정치를 넘나드는 깊이 있는 대화를 주고받는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는 커피에 대한 동경을 더 키웠다.

이후에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했다. 미국 뉴욕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의 교향악단 ‘프리웨이 필하모닉’의 단원으로 연주했다. 재미있는 것은 전문 연주자가 된 이후 커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프리먼은 집에서 오븐으로 생두를 로스팅했고, 연주 여행을 떠날 때면 직접 볶은 원두와 자센하우스(Zassenhaus, 1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최고의 핸드 밀 브랜드) 핸드 밀, 소형 프렌치 프레스까지 챙겨서 비행기에서 커피를 내려 마셨다고 한다.

프리먼은 클라리넷 연주자로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원하는 오디션에 매번 떨어져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10만 킬로미터 이상 이동하면서 연주를 했다. 1년에 세 번이나 원치 않는 곡을 연주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클라리넷으로 사람을 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프리먼은 결국 연주자로서의 삶을 포기한다. 이후 잠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얼마 못 가 해고당한다. 이때 떠오른 유일한 대안은 커피뿐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블루보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리먼은 처음엔 로스팅한 원두만 팔 계획이었다. 음료를 팔 만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딸린 5평 남짓한 원예 창고를 월세 600달러에 계약했다. 지금도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리먼은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원두의 가장 맛있는 로스팅 포인트를 찾기 위해 짧게는 20초 간격으로 로스팅 시간을 달리하며 수많은 테스트를 했다. 레스토랑의 저녁 장사가 시작되는 5시에는 로스팅을 중단해야 했다고 하니, 참 초라한 시작이었다.

원두가 아닌 커피 음료를 판매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원두를 납품받던 지인이 프리먼에게 커피 카트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고민 끝에 카트를 인수해 일주일에 두 번, 시장에 나가 커피를 팔았다. 색다른 추출 기법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한 잔씩만 만들어 파는 낯선 커피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인스턴트커피에 익숙한 사람들은 프리먼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곧 하나둘 단골 고객이 생겼다. 그렇게 1년 넘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고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커피를 마실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그리고 또 1년 뒤, 프리먼은 첫 매장을 냈다. 이번에도 외진 곳의 창고였다. 카페로서는 여전히 좋지 않은 입지 조건이었다.

블루보틀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남다른 가치를 제공하면서 조금씩 고객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블루보틀의 특별함은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카페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 대한 블루보틀의 답변인 셈이다.

① 여덟 가지뿐인 간결한 메뉴 – 종류는 적지만 전문가가 엄선한 메뉴만 팝니다.
② 하나로 통일된 컵 사이즈 – 우리는 가장 맛있는 사이즈 하나만 제공합니다.
③ 향을 내는 첨가물을 넣지 않은 순수한 커피 – 바닐라, 모카, 캐러멜 등의 첨가물이 들어간 음료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④ 세밀한 온도 조절이 가능한 최고급 라 마르조코(la marzocco) 에스프레소 머신 – 커피 머신은 스타벅스와 같은 최고의 기계를 씁니다.
⑤ 모든 샷을 리스트레토(에스프레소보다 짧은 시간에 추출한 커피)로 제공 – 카페에서 일반적으로 판매하는 에스프레소에 비해 쓴맛이 덜한 커피를 제공합니다.
⑥ 모든 우유 음료에 적용되는 라테 아트 서비스 – 우리 바리스타들은 라테 아트를 할 수 있는 진짜 실력자들입니다.
⑦ 한 잔씩 내린 핸드 드립 커피 –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최고의 커피를 드립니다.

이는 2000년대 초만 해도 흔히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커피업계의 대세로 자리매김했던 스타벅스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이었다. 블루보틀은 스타벅스와 동일한 최고급 머신을 썼다. 당시 블루보틀이 소규모 동네 커피숍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과감한 선택이었다. 라 마르조코는 2018년 현재도 프랜차이즈 카페 브랜드 중에서는 사용하는 곳이 없을 정도의 최고급 머신이다.

블루보틀은 한정된 예산으로 인해 입지는 좋지 않은 곳을 택하더라도, 제품의 질과 직결되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고가의 제품을 선택했다. 커피의 품질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커피의 품질 이외의 부분에서는 경쟁자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남들과 다르기만 하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컵 사이즈를 통일한다거나 리스트레토 샷을 쓴다고 스타벅스와 차별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름이 차별화 전략이 되려면, 먼저 브랜드의 핵심 철학과 가치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고객이 ‘이 가게는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블루보틀은 ‘품질 우선주의’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철학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침으로는 ‘로스팅 48시간 이내의 원두만 사용한다’는 원칙을 내놨다. 여기서 다시 철학이 중요해진다. 사실 고객 입장에서는 내가 마신 커피가 48시간 이내에 로스팅한 것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파는 사람이 속이려 든다면 커피 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고객들은 속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블루보틀은 7개의 차별화 포인트를 통해 품질에 대한 진정성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프리먼의 표현대로 ‘지린내 나는 뒷골목 구석’에 있는 조그만 매장에서 스타벅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서나 쓰는 최고급 머신을 갖다 놓고, 한 잔에 10분 가까이 시간을 들여 내린 핸드 드립 커피를 파는 것, 스팀 밀크로 정성스럽게 라테 아트를 만들어 주는 것 같은 구체적인 요소들이 최고의 제품을 취급한다는 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이 매장은 정말 좋은 커피를 제공하려 하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48시간 이내에 로스팅한다는 원칙을 신뢰하게 된다.

무엇보다 블루보틀은 카페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속도를 포기했다. 1분도 안 돼 나오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와 비교하면 블루보틀의 드립 커피는 속도의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리스트레토 메뉴라도 우유가 들어가는 경우라면 라테 아트를 하는 시간이 걸린다. 커피 한 잔 마시려는 고객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보통의 카페에서라면 좋은 전략이 아니다. 그러나 블루보틀의 철학은 속도나 편리함이 아니다. 품질이다. 그래서 이런 불합리해 보이는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전략과 철학이 만나니 느리고 불편한 곳이 아니라 품질 하나만을 목표로 삼아 그 외의 것은 포기하는 제대로 된 가게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블루보틀의 독특한 매장 운영 방식은 타깃 고객을 명확히 하는 효과로도 이어진다. 좁은 골목길에 있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카페를 찾는 고객들은 제대로 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 하는 커피 애호가일 가능성이 높다. 불편하고 느린 카페는 ‘우리는 최고의 제품만을 고객에게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분들이 우리의 고객입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는 곧 블루보틀을 찾는 사람이라면, 커피에 대해 좀 아는 사람, 최고의 제품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된다. 대중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마니아를 타깃으로 삼는 전략은 장기적으로는 고객을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커피를 좋아하고 또 알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블루보틀을 찾는 것만으로 ‘수준 높은 고객’이 되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영 방식이 주 수입원인 원두 판매를 촉진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 블루보틀 매출의 상당 부분이 원두 판매에서 나왔다. 블루보틀이 최고의 제품에 투자한다는 인식은 원두 판매와 직결된다. 블루보틀은 초창기에 원두를 매장에서 판매하는 것은 물론 레스토랑과 카페에 납품했다. 현재는 품질 유지를 위해 도매를 중단한 뒤 온라인 원두 정기 배송 서비스 등으로 미국 전역에 원두를 판매하고 있다.

프리먼은 이런 전략들을 의도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단지 경영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커피를 제공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고 한다. 창고 구석에서의 보잘것없는 시작이었지만 커피에 대한 철학과 이를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것은 블루보틀의 차별화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철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팬이 되고, 고객과 투자자가 되었다. 하지만 철학과 진정성만이 블루보틀의 대성공을 모두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3]
[1]
[3]
‘느리고 불편한 카페’는 제임스 프리먼의 저서 《블루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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