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시대
1화

통치의 시대에서 조정의 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시대


국가와 사회가 직면하는 위험(risk)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의 위험이 눈에 보이고, 예측 가능한 규모와 형태였다면 최근의 위험은 비정형적이고 변화무쌍해 파급력의 크기와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 결과 우리는 과학 기술의 빠른 발전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안전해졌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놓이게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 황사와 초미세먼지 등이 대표적이다.

2002년 중국 광둥의 한 재래시장에서 발생한 인수공통 감염병 사스(SARS, 중증 호흡기 질환 증후군)는 전세계 8096명의 감염자와 774명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치사율이 10퍼센트에 달했던 21세기 최초의 글로벌 감염병이었다. 금전적 이익을 노린 2017년의 워너크라이 랜섬웨어 공격은 150개국에 걸쳐 30만 대 이상의 컴퓨터를 감염시켰다. 2018년 11월 KT 아현지사 통신구의 작은 화재는 서울 서부와 경기 서북부의 전산망을 한순간에 마비시켰고, 그 여파로 제때 입원 수속을 받지 못한 환자가 사망하기도 했다. 2020년 초 전파가 시작된 코로나19는 2021년 5월 현재까지 전 세계 1억 6330만 명의 확진자와 338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여전히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이 진행 중이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해커가 우리 개인 정보와 자산을 노리고 있으며, 기후 변화에 따른 극단적 한파·폭염은 사회 취약층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현대의 위험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과거의 위험과 성격이 다르다. 우선, 문제의 속성을 규명하고 인과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극단적이고 돌발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아 충분한 경험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매뉴얼을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 시공간적 확장성이 있다. 신종 감염병이나 사이버 테러, 기후 변화와 같은 새로운 위험들은 국경이나 지역에 귀속되지 않는다. 영향을 받는 부문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전담 조직이나 전문 분야를 특정하기도 어렵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존재한다. 때로는 이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고정된 처방을 내릴 수 없다.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기도, 해결 여부를 즉각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코로나19가 대표적이다. 발생 초기, 각 국가는 국경 차단, 봉쇄, 폐쇄 등 극단적인 차단 정책을 펼칠 수도, 집단 면역과 같은 해결책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두 가지 방식을 혼합해 대응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지는 단기간에 알 수 없으며 백신이 개발된 지금도 변이 바이러스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한다. 때로는 장기간 파급력을 갖기도 하는 현대의 난제들은 현대의 인류가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하는 상시적 위험이면서 언제든지 증폭될 수 있는 불씨다.

이는 곧 국가의 안보 문제기도 하다. 전쟁이나 핵 위협 억제와 같은 전통적인 안보 관점에만 머물러서는 새로운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안보 개념을 재정의하고, 효과적인 위험 관리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미 2010년대부터 세계의 주요 미래 예측 기관 및 국제 기구들은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경고해 왔다.[1] 2019년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는 오늘날 인류 위기는 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 실패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역시 2017년 비슷한 문제를 지적했다.[2] 분쟁의 성격이 변화하고, 고도화된 사이버·테러 공격, 환경·생태적 갈등이 일어나는 등 비전통적 위험은 더 빈번해지겠지만, 이를 포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정부의 역량은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전망이다.[3]

이제 각 국가들은 특정한 위험 요소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적인 관점에서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안보의 핵심은 상시적인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제 정치학적으로는 이를 신흥 안보(emerging security)로 지칭한다. 일상의 사소한 안전 문제가 예기치 못한 촉발 요인(trigger)에 의해 언제든지 국가적, 혹은 지역적, 지구적 안보 문제로 비화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관점이다.[4] 새로운 위험의 다이내믹스에 주목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안보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위험을 얼마나 중요하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할지는 정치·사회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위험이 초국가적일 경우, 지역 및 글로벌 수준에서 위험과 관련된 소통을 해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충돌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해관계자들의 갈등 조정에 실패해 위험 대응을 위한 제도적 안전망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그러면 사회 정치적 혼란이 생기는 건 물론, 지구적인 차원에서 위험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지구화의 흐름이 급격히 심화하면서 인적·물질적 교류는 증가하고, 지구적 차원의 사회 관계망이 형성되며, 시공간은 압축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의 일상 속 안전 문제도 전 지구적인 위험으로 발전할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안보 변수로 다뤄야 하는 이유다. 안보 측면에서의 관건은 위험을 조기에 수습하고 양적·질적 파급력의 확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효과적인 대응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흥 안보 위험의 가장 큰 특징은 국지적 차원의 안전 이슈나 재난이 더 넓은 지역이나 지구적 차원에서의 안보 이슈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위험이 양적으로 증가해 어느 임계점을 넘는 경우다. 코로나19,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이 대표적이다. 작은 마을의 풍토병 수준으로만 인식되었던 감염병 바이러스가 지역 사회 감염으로 증가하고 국경을 넘어 전파되는 순간, 초국가적 위험이 된다. 백신과 치료제를 통해 확산 속도를 잡지 못하면 판데믹과 같은 글로벌 보건 안보적 위험 상황이 발생한다. 둘째, 위험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사이버 테러를 생각해 보자. 개인의 금전적 이익을 노린 해킹이나 단순 SNS에 대한 공격이라면 미시적인 위험이겠지만, 통신 기지국, 증권 거래소, 발전소 등 주요 정보·금융, 국가 기간 시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다면 초국가적 위험이 될 수 있다. 한 국가의 보안 사고를 넘어 해당 국가와 거래하는 국가들의 피해까지도 유발하기 때문이다. 셋째, 위험의 양과 질이 동시에 변화하는 경우다. 2011년 경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대표적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후쿠시마 지역에만 피해를 입히고 끝날 줄 알았으나, 침수 지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곳곳이 정전되었고, 인접한 핵 발전소의 냉각 장치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결과 연료봉 노출에 의한 노심 용융, 콘크리트 외벽 폭발로 인한 방사성 물질 유출, 방사성 오염 물질 해양 유입이 잇따랐으며, 일본의 국가적 재난을 넘어 인접국의 안전을 위협하게 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유발한 안전, 환경 문제들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싱가포르의 네트워크 거버넌스 전략


신흥 안보 위험의 복잡한 확산 매커니즘을 관리할 때의 관건은 전 지구적인 안보 문제로 발전하기 전에 유연하게 대응해 위험을 차단하는 것이다. 각 국가는 어느 수준에서 어떤 행위자들과 협력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역마다 역사와 지정학적 특징, 정치 체계와 권력 분배 방식, 시민사회의 역량 등이 모두 다르고, 이것이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당장 코로나19 판데믹 상황에서 의료 인프라나 기술이 발달한 서구 국가들이 방역에 고전한 것을 보면, 공동체 의식이나 정부 신뢰도 같은 문화·사회적 요건이 위험 대응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와 제도, 문화적 배경 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거버넌스 형태를 고민해야 한다.

동남아시아는 대규모 재난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이다.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의 보고에 따르면, 2004~2018년 사이 지진, 홍수, 태풍 등 세계 자연 재해의 41.2퍼센트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했다. 동남아시아의 재난 관련 사망자 수 역시 전 세계 사망자 수의 50.5퍼센트를 차지한다.[5] 더불어 지구화와 기술 발전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화는 동남아시아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고, 그 부작용으로 초국가적 위험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데, 아세안은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을 강조하는 아세안 방식(ASEAN Way)이라는 근대적 원칙이 강하게 작동하는 지역이다. 위험 대응을 위해 실효적인 제도와 행동 준칙을 만드는 과정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아세안은 이러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형식적이고 일회적인 협력이 아닌, 체계화된 방법을 만들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싱가포르는 아세안이 직면한 신흥 안보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과 글로벌 차원의 협력을 주도했다. 싱가포르와 아세안이 사스, 쓰나미, 연무, 폭탄 테러에 대응한 방식을 살피면 새로운 위험의 시대에 필요한 위험 관리의 핵심을 알 수 있다.

사스; 정보 공개와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사스는 21세기 최초의 글로벌 보건안보 이슈로 불렸다. 감염병은 발원지와 상관없이 글로벌 차원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바이러스의 특징과 감염력 정보, 다국적 제약 회사와의 백신 개발 협력 등 초국가 차원의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전담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 민간 단체 등 다양한 행위자 간에 폭넓은 논의와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사스 확산 초기 단계에서 홍콩, 대만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발원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고, 중국 정부의 은폐 속에 지역사회가 대규모 감염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싱가포르 정부는 지구적 차원의 점증·연계형 위험 이슈인 사스의 특징을 인식하고 국내와 아세안뿐만 아니라 역외 국가들과 WHO까지를 포함하는 글로벌 차원의 활발한 공조를 추진했다. 싱가포르가 취한 대응의 핵심은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우선, 한중일을 포함한 아세안+3국 회담에서 자국에서 시행 중인 엄격한 입출국 방역 시스템을 동아시아 주요 공항에 표준화하도록 합의했다. 아세안과 교류를 확대하기 시작한 3국이 공항 내 체온 검사 장비 설치를 의무화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WHO의 사스 통제 가이드라인이 발표되는 즉시 국제적인 감염병 전문가 그룹과 방역 정책 적용의 효과와 파급력에 대해 논의한 결과들을 국제적으로 공유했다. 싱가포르 정보매체문화부(MICA)는 ‘24시간 사스 채널’을 개설하고 사스 위기 기간 동안 이러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파했다. 싱가포르의 사스 채널 프로그램 제작에는 홍콩, 대만, 오스트레일리아 방송사도 참여했다. 초국가적 미디어 네트워크 기능을 한 셈이다. 이 채널은 사스 위기를 공유하는 국제 사회의 공통 관심사를 짚어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왜곡된 보도를 바로잡아주는 글로벌 팩트 체크 미디어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지구적 차원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했던 싱가포르는 아세안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사스를 퇴치했다. 초기 단계에서 싱가포르 정부는 대규모 감염 의심 환자들의 확산을 인지한 직후 매우 엄격한 방역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이를 역외로 확대시켰고, 투명하고 정확하게 환자 관리 정보를 공유했다. 자국의 감염 확산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세안+3국, WHO, 다국적 전문가 집단 등 다양한 행위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사스를 국가, 지역, 글로벌 차원의 중요한 안보 문제로 의제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초기의 대규모 감염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의 신뢰를 유지하며 긴밀한 협력하에 사스를 퇴치해 갈 수 있었다. 이 사례는 특정 지역을 넘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위험을 극복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아세안+3 및 WHO와 역외 국가를 포괄하는 글로벌 다자 행위자가 공조하는 네트워크 전략이다.

쓰나미; 신뢰의 허브

2004년 대지진과 함께 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는 최악의 인적․물적 피해를 기록한 초대형 재난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수만 해도 18만 명을 넘었고, 진앙지와 가까웠던 인도네시아, 태국, 나아가 스리랑카,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쓰나미 발생 직후 전세계의 미디어는 참혹한 피해 지역의 모습을 보도했고, 이에 국제사회의 구호 물자와 자원 봉사자를 비롯한 인도적 지원이 쇄도하게 된다. 당시 참사가 발생한 인도네시아 아체(Aceh) 지역에는 무려 435개에 달하는 국제 구호 단체가 복구 활동을 위해 모여들었지만, 현장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공여국들은 피해국들에 원조 기금을 지원하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관리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자칫 현지 사정을 모른 채 수많은 재건 프로그램을 일일이 검토하고 통제하는 비효율로 이어지기도 했다. 신속한 복구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양측의 신뢰를 받는 중개자의 역할이 절실했다. 이때, 실질적인 피해가 적었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쓰나미를 동남아시아 지역 차원의 중대 재난으로 의제화하고 아세안 회원국으로서 인프라 재건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은 재난에 대응하는 인프라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런 대응이 가능했던 배경은 이미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 지역 차원의 재난 발생에 신속하게 점검에 나설 수 있는 ‘초국가적 재난 구호센터’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쓰나미 발생 닷새 만에 싱가포르는 현지의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위기 대응팀을 피해 지역으로 급파했다. 침수 현황을 점검한 후, 가장 중요한 보급로와 상수도, 저장 시설의 복구 계획을 우선적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 싱가폴은 정보·물자의 공급의 허브 역할도 했다. 당시 국제 구호 물자 점검과 배분을 위한 전문 인력뿐 아니라 물류 터미널도 부족했는데, 싱가포르는 자국의 공군·해군 기지를 물자 분류 집결지로 허가하는 등, 국제 구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싱가포르는 지역 협력 거버넌스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후 재건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주요 피해국이었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1분기 만에 GDP 성장률을 반등시키는 등 매우 빠른 회복을 보이게 된다. 쓰나미 대응은 시급한 대응이 필요한 지역 차원의 돌발적 위험 이슈에 대해서는 비체계적인 글로벌 차원의 대응보다는 현지의 정보와 경험이 풍부한 역내 네트워크를 활용한 주도적 관리 방식이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특히, 싱가포르가 정보 공유와 자원 배분 인프라 구축을 통해 실효적인 지역 공조 체제를 마련해갔던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무; 다층적 이해관계를 중재하라

연무(haze)는 먼지와 그을음이 공중에 떠다니어 생기는 혼탁한 대기를 뜻한다. 아세안 차원의 대기 오염 문제이자 정치적 이해관계가 드러난 초국가적 환경 안보 이슈였다.[6]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리아우(Riau)에서 발생했지만, 오히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더 큰 피해를 입히면서 국가 간의 첨예한 갈등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세안 10개 회원국은 연무로부터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아세안 초국경적 연무 오염 방지 협정(ASEAN Agreement on Transboundary Haze Pollution·ATHP)을 2002년 체결했다. ATHP는 체결국에 야외 소각 금지, 산불 예방 공조, 정보 공유, 연무 대응 협력 등 광범위한 실천 사항들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할 인도네시아가 의회 비준을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ATHP는 오랜 기간 동안 유명무실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연무를 낳는 기업형 플랜테이션 산업 비중이 상당히 높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존도, 중앙․지방정부와 기업들이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정불간섭을 주요원칙으로 하는 아세안 방식 역시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난국에서 싱가포르는 아세안 회원국들과 NGO, 민간 기업 사이에서 때로는 중심적 역할을, 때로는 간접적인 연계와 조력자의 역할을 하며 해결 방안을 찾았다. 핵심은 첨예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국제적 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초국가적 환경 문제는 개별 정부 차원에서 해결이 어렵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취했던 협상 전략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정부가 직접 나서 인도네시아와 협상을 추진했으나 이후에는 연무 이슈에 전문성을 가진 민간의 연구자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며 참여의 폭을 확대시켰음을 알 수 있다. 논의의 장이 마련된 이후부터는 플랜테이션 분야의 기업들도 초대해 사안을 과학적으로 분석함과 동시에 비즈니스 활동의 환경적 책무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해마다 연무의 환경파괴 정도를 평가하고 발표해 왔던 싱가포르 국제문제연구소(SIIA)가 정례적인 국제 컨퍼런스에서 심각성을 공유했으며, 연구 결과들은 환경 NGO와 주요 언론에 공개됐다. 특히 싱가포르는 ‘연무 해결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주제로 열린 아세안-아시아 포럼(AAF)에 정부 관계자만이 참석했던 관례를 깨고, 메이저 팜 오일 기업과 여기에 투자한 은행들을 참여시켰다. 책임 있는 기업으로서 지속 가능한 환경 유지를 위한 플랜을 공유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 그린피스와 같은 다양한 환경 부문의 비정부 행위자 또한 초청해 기업들의 약속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협력 네트워크를 마련한 것도 매우 중요했다. 그린피스의 정례적인 결과 발표는 연무 문제의 개선 상황과 인도네시아 정부의 책임성에 대해 국제 여론을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내에서 다양한 행위자를 포섭하는 네트워크 전략은 결국 인도네시아 의회가 무려 10여 년간 미뤘던 ATPH 협정을 비준함으로써 결실을 거두게 된다. 아세안 차원에서 발생한 점증적·한정적 신흥 안보 문제에 다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방식으로 대응해 효과를 거둔 사례라 할 수 있다.

폭탄 테러; 맺고 끊기와 내 편 만들기

2002년~2003년 사이 발생한 폭탄 테러는 동남아시아를 혼란에 빠뜨렸다. 2002년 발리 참사에서 시작한 동남아시아 폭탄 테러의 배후에는 글로벌 테러 조직 알 카에다(Al-Qaeda)와 제마 이슬라마비아(Jemaah Islamiyah, JI) 등이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폭탄 테러는 ‘제2의 테러와의 전쟁’ 논의까지 낳았던 글로벌 차원의 안보 이슈였다. 폭탄 테러는 즉각적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낳는 한편, 사회적 공포를 유발하는 종류의 위험이다. 그뿐 아니라 2차, 3차의 연쇄 테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테러 집단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으며, 왜 테러가 발생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싱가포르는 폭탄 테러를 지역의 중요한 안보적 의제로 다루었으며, ‘폭탄’이라는 테러 수단이 가진 위험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국가였다. 나아가 위협 요인을 뿌리뽑기 위해 아세안이 동남아 지역을 넘어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유럽의 대테러 공조 체제에 참여해야 함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각기 다른 종교적, 대내외적 정치 환경에 놓여 있던 아세안 회원국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에 일치된 입장을 표명하기 어려웠다. 지역 차원에서 공동의 대테러 공조 체제를 만드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싱가포르는 접근 방식을 전환했다. 테러를 글로벌 차원의 안보 사안으로 격상시키고, 미국을 위시한 동남아시아 외부의 행위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한편, 아세안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국가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국가들을 분리하여 공략한다. 미국을 매개로 필리핀, 태국 등 적극적 대응을 하는 국가를 다시 한번 결속했고,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도 동참시키는 성과를 냈다. 결과적으로 지역 공조 체제를 수립하는 데도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법적 구속력을 가진 아세안 헌장을 조인시키는 한편, 아세안 방식이 제약하던 개별 국가 차원의 대응 방식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표준을 마련했다.

싱가포르의 접근 방식 전환은 폭탄 테러가 가진 글로벌 안보적 특징과의 연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역외 강대국과 역내의 같은 입장의 국가들을 함께 포섭한 것이 공조 체제 수립이 어려웠던 구도를 바꾼 계기였다. 지역 및 글로벌 수준에서 급박하게 발생하는 위험 유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흥 안보 시대의 협력 거버넌스


신흥 안보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시민 사회, 지역 및 국제기구 등 각기 다른 수준에 있는 행위자들이 사안별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긴밀히 연계해 줘야 한다. 네트워크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유한다. 사회의 다양성이 커지면서 서로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세분화된 전문성을 보유한 집단들이 활발히 상호작용한다. 반면, 중앙 정부가 전통적인 위계 질서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비중은 크게 감소한다. 사회 구성원 간의 비공식적 협력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수평적인 방식이 보편화하는 것이다.[7] 구성원 간 조정이 더 중요해지는 사회 구조로 발전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규제나 행정 서비스의 공급자 역할이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의 촉매, 또는 협력에 필요한 여건을 제공하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국가도 자원의 효율적 관리 같은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독점해 왔던 권한의 일부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들에게도 위임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와 같은 지구적 문제의 관리 메커니즘은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제 NGO 및 시민사회, 다국적 기업, 그리고 개인을 포함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비권위적이고 협력적인 관계에 효과적으로 의존한다.[8] 특히, 오늘날과 같은 네트워크 사회의 ‘거버넌스’는 다양한 행위자 간의 수평적 관계를 뜻하는 개념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거버넌스(governance)는 대내외의 문제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결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 개념으로, 반드시 정부 중심의 공권력에만 의존하지 않는 조정적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위계적이지 않은 관리가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정부나 통치 개념에는 집행을 강제하는 엄격한 법과 규칙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거버넌스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공통의 목적, 특히 공익적 목표를 위해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방식이다. 정부의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 자발적 협력인 셈이다. 따라서 정부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나 사회 조직, 집단, 개인 등 다양한 참여자 간의 관계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9] 특히, 불확실성이 높고 파급 범위가 넓은 장기적인 위험 이슈의 경우 사안별로 일일이 매뉴얼을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를 강제하는 것 또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각 상황에 전문성을 가진 집단의 견해를 반영해 핵심적인 가이드라인만 제시한 채로, 사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구성원들이 갈등을 조정하고 협력하는 경험이 축적되면 사회적 신뢰 자본이 생기고, 이는 불확실한 위험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간의 딜레마를 완화해 준다. 새로운 위험의 시대엔 거버넌스가 위계적 통치 방식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다.[10]

거버넌스 논의의 핵심은 ‘권위가 어디에 부여되었으며, 어디에 위임되었는가’다. 권위는 지배와 다르다. 합리적 사고를 통해 집합적인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보유하면 권위 행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정부 등 공식적인 권위체가 아니더라도,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글로벌 기구나 NGO, 시민단체 등도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위계적 권위체에 의한 강압적인 무력 수단을 통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행위자들의 역할과 권위를 수용하며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사회의 자발적인 개선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수평적 메커니즘이 거버넌스다.

 

네트워크 거버넌스와 중개자의 역할 


불확실성이 높은 초국가적 위험에 마주한 정부는 그 위험이 어느 정도로 긴박한지, 누구의 주도하에 대응할지를 전략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형성된 네트워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외교 안보적 관점에서 네트워크는 서로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협력할 수 있는 연결된 행위자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국가가 많을수록, 여기에 가입함으로써 얻는 효용이 클수록, 참여 국가들의 중요성이 클수록 네트워크 권력 또한 증대한다.[11]

예를 들어, 석유개발기구(OPEC)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들의 네트워크다. 세계 원유 시장에서 공급량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함으로써 유가 하락을 막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매번 이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은 석유 공급 조절을 둘러싼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들과의 이견이다. 만약 러시아와 노르웨이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면 OPEC은 지금보다 더 막대한 네트워크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상 권력이란 것이 반드시 참여자의 규모가 크거나 많아야만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연결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한, 네트워크를 고정된 연결 형태가 아니라 연결되는 과정의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다른 무리들 간의 연결고리와 호환성을 제공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고 볼 수 있다. 중개자의 능력은 정보와 지식뿐만 아니라 소통 역량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12] 특히,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높은 신흥 안보 이슈에서 처음부터 빈틈없이 촘촘한 협력 네트워크가 발현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중계자의 역할이 더욱 관건임을 알 수 있다.

중개자는 위험 발생 초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협력 구조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원활히 수행하면 네트워크의 전체 구도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며, 향후 다양한 상호 작용을 통제하는 허브(hub)로서 더 많은 정보와 능력을 보유하는 위치 권력(positional power) 또한 누릴 가능성이 높다. 싱가포르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싱가포르는 아세안의 10개 회원국 가운데 국제 운송과 물류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된 금융지로서 아세안 외부에 대한 관문이 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적 공동체주의 정치 구조의 특징과 다민족 개방 경제를 보유한 싱가포르는 동서양의 이질적인 정치 세력 간의 균형과 협상을 주도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조력을 얻는 전진 기지 역할을 한 것, 2018년 역사상 첫 북미 정상 회담의 개최지가 되었던 것은 싱가포르가 중개자로서 가져 온 위치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네트워크의 공백을 연결하는 중재자 ©이미지: 북저널리즘, 출처: Qingpeng Zhang et al., 〈Brokers or Bridges? Exploring Structural Holes in a Crowdsourcing System〉, 《Computer》, 2016.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부상은 초국가적인 위험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거버넌스의 대상을 문제 해결의 임무를 띤 ‘조직’이 아니라 적절한 관리가 필요한 ‘사회 문제’로 바라봄으로써 기존의 위계적 통제 방식이나 시장의 자율형 방식 말고도 다양하고 혼합적인 접근 방식을 고안할 수 있다. 둘째, 법적 근거나 중앙 집권적 통제 없이 사회적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상위의 공식적인 정부 권위에 따른 법적 통제력 없이도 협상과 신뢰 등을 기반으로 한 관리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 같은 접근은 신흥 안보 위험과 같은 초국가적이고 다층적인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는 난제의 관리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안이 된다.

이제 군사력, 경제력 등 물질적 권력이 작은 국가도 기민하고 유연하게 대응한다면 초국가적인 협력을 주도할 수 있다. 위험의 양상을 빠르게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행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조절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를 국가와 지역, 글로벌 수준에서 원활히 작동하게끔 하는 것이 초국가적 협력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만병 통치약처럼 모든 사안에 적합한 고정된 관리 체계나 제도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13] 위험이 비정형적이므로,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관리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비유하자면, 다양한 거버넌스 양식들을 바구니(pool)에 담아 놓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해법을 찾는 것이다.[14] 메타 거버넌스(metagovernance) 역량 확보가 중요해지는 것이다.[15]

오늘날의 세계 정치 무대에서 각 국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메타 거버넌스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백신 확보를 위해 각국은 WHO에서 권고하는 가이드라인과 국내 방역 전담 기관의 분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자체 개발 및 수입을 통한 확보 물량을 결정한다. 정부는 거대 제약사들과 직접 교섭하기도 하지만, 코백스(COVAX)와 같은 국제 공동 구매․배분 시스템을 활용하기도 한다. 백신 접종 전 안전성 보증 단계에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식품안전청(EFSA)과 같이 권위 있는 다른 정부 기구의 판단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에서 자국 제약 회사가 아니더라도 주요 백신 생산 공장을 자국 내, 혹은 지역 공동체 내에 유치하고 공동 개발, 생산함으로써 보다 충분하고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정부와 기업, 국제기구, 비영리 단체들이 고정적인 전담 조직 없이도 상황에 따라 판단의 권위를 존중해주고 상호 협력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하고 지도하는 국가의 새로운 핵심 역량


결국, 신흥 안보 시대의 네트워크 권력은 정보・지식・문화・커뮤니케이션 등을 통해 수평적인 상호 작용 과정에서 작동한다. 이제 국가는 지금껏 군사력, 경제력과 같은 물리적 자원의 부차적 요소로 간주해 왔던 지식 정보와 소통의 중개자로서 나설 필요가 있다. 탈근대 시대에는 이러한 능력을 국가의 핵심 역량으로도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국가 행위자들과의 상호 작용이 더 많아지면서, 이들과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촘촘히 만들어가기 위한 기민함과 적응력, 유연성이 더 필요하게 된다.

네트워크 거버넌스 패러다임 하에서도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여 조정(steering) 및 지도(guidance) 역할을 늘려 갈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상호 작용의 방식 자체가 메타 거버넌스 형태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적 대결 가능성을 전제했던 냉전 시대 국력의 기준은 탈냉전 이후 의미가 상당 부분 탈색됐다. 네트워크 국가 개념은 국가가 보유한 기능과 권한을 구성원들에게 적절히 분산하고, 동시에 영토적 경계를 넘어 초국적 차원의 제도적 연결망을 효율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며 부상했다. 네트워크 국가에서는 새로운 위험 요소에 대한 인지와 대응이 사회 전반에 폭넓게 나타난다.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의 접점을 잘 찾아 능동적으로 나설 수 있다. 결국, 네트워크 국가는 급변하는 신흥 안보 환경에 맞춰 효과적인 방향으로 협력 네트워크의 창출을 유도해 가는 진화된 국가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 역시 코로나19, 초미세먼지 등이 낳는 초국가적인 위험과 갈등을 빈번하게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 미중 패권 경쟁과 한반도 비핵화 문제 등 고착화된 지정학적 제약까지 풀어야 할 난제도 산적해 있따. 제도화된 지역 공조 체제의 역사와 견고성이 취약한 현실을 고려하면, 역내 행위자들의 자율적 참여를 통해 공고한 신흥 안보 대응 체계를 조성하는 것 역시 단기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들은 한반도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인 난제이기도 하며, 적절한 관리 양식의 부재는 강대국을 포함한 모두의 숙제다. 네트워크 지식 국가의 메타 거버넌스 역량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나갈 공간을 열어 줄 것이다.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을 협력 네트워크에 포섭할 수 있는 전략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1]
윤정현, 〈신흥 안보 위험과 네트워크 거버넌스〉, 《한국정치학회보》 54(4), 2020, 29-51쪽.
[2]
NIC, 《Global Trend 2035: Paradox of Progress》, US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2017.
[3]
윤정현 외, 《글로벌 트렌드와 한국: 과학 기술적 대응 역량 진단》, 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17.
[4]
김상배, 〈신흥 안보의 미래 전략: 개념적·이론적 이해〉, 《신흥 안보의 미래전략: 비전통 안보론을 넘어서》, 사회평론, 2016.
[5]
Global Disaster Database
ESCAP, 〈Building Resilience: Enhancing the Role of ICT for Disaster Risk〉, 2016.
[6]
연무는 주로 공장에서 배출된 매연과 자동차 따위의 배기가스에 의해 일어나지만, 아세안에서의 연무 문제는 대부분 인도네시아 현지의 주기적인 산림 방화에 기인했다.
박병도, 〈동남아 연무문제 대응의 국제법적 함의〉, 《환경법연구》 36(2), 2014.
[7]
Joachim Blatter, 〈Beyond Hierarchies and Networks: Institutional Logics and Changes in Transboundary Spaces〉, 《Governance: An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cy》 16(4), 2002.
[8]
이 같은 맥락에서 국제적인 유명 인사의 독립 단체로 출발한 글로벌거버넌스위원회는 거버넌스를 “개인과 기구들이 공공의 문제를 공적 또는 사적으로 해결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집약한 것”으로 개념화한 바 있다. 즉, 거버넌스는 개인과 국제기구를 포함한 기구들이 합의했거나 그들의 이익에 합치된다고 인정하는 공식적·비공식적 조치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Margaret Karns et al(김계동 외 譯) 《국제기구의 이해: 글로벌 거버넌스의 정치와 과정》, 명인문화사, 2017.
[9]
유현석, 〈글로벌 거버넌스: 개념적 논의〉, 《국정관리연구》 1(1), 2006.
[10]
김도균·박재묵, 〈허베이 스프리트호 기름유출사고 이후 재난관리 거버넌스 구축: 실패와 재난 복원력의 약화: 관련 행위자들 간의 이해와 대응을 중심으로〉, 《환경사회학연구 ECO》 16(1), 2012.
[11]
김치욱, 〈글로벌 스탠다드의 형성과 미국의 네트워크 권력: 국제투자협정을 중심으로〉, 《세종정책연구》 6(2), 2010.
[12]
하영선·김상배, 《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질서》, 한울, 2012.
[13]
Bob Jessop, 〈The Rise of Governance and the Risks of Failure: The Case of Economic Development〉, 《International Social Science Journal》 50(155), pp. 38-41.
[14]
민병원, 〈평화체제 거버넌스의 이론적 고찰: 국제정치적 대안 모형의 탐색〉, 《국제지역연구》17(1), 2008, 24쪽.
[15]
메타 거버넌스는 “제도와 권위 구조 협력 방식을 활용하여 비공식적인 사회·경제 활동, 자원 배분 관리 등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으로, 고도의 자율성을 갖는 다수의 자기 조직적 네트워크에 기반하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분절화된 정치 체계의 조정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이다.
김상배 編, 《신흥 안보의 미래 전략: 비전통 안보론을 넘어서》, 사회평론,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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