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EP NO MORE
1화

프롤로그; 이런 공연은 처음이다

“이런 공연은 처음이다.” 연극 〈슬립노모어〉를 본 관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슬립노모어에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 관객은 가면을 쓰고 극장 전체를 활보하며 공연을 본다. 배우들은 극장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관객이 얼마나 많은 장면을 볼지는 얼마나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느냐에 달려 있다. 호텔로 꾸며진 극장에는 100개가 넘는 방이 있고, 관객이 모든 장면을 보고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만으로 이야기들의 조각을 맞추어 스스로 줄거리를 완성해야 한다.

슬립노모어는 영국 런던의 실험 극단 펀치드렁크(Punchdrunk)가 만든 작품이다. 이제는 런던을 넘어 미국 뉴욕과 중국 상하이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뉴욕과 상하이 공연은 매주 다섯 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늘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슬립노모어는 관객 참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썼다. 오늘날의 관객은 공연장을 직접 찾을 이유가 많지 않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슬립노모어는 디지털 시대의 관객들이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찾아오는 공연이다. 보고 싶은 이벤트 그 이상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다.

어떻게 관람이라는 평범한 경험을 특별한 체험으로 바꿀 수 있을까. 슬립노모어의 핵심은 관객 모두가 각자 다른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점에 있다. 디지털 시대의 관객을 만족시키려면 참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관객에게 얼마나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연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슬립노모어는 공연의 주요소인 서사, 배우, 무대, 관객에 대한 고정 관념을 해체했다. 모두가 알아야 할 하나의 줄거리가 없다. 연출자가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 역시 없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없다. 배우는 대사 없이 몸짓과 표정으로 연기하고, 때로는 관객의 손을 잡고 사라지거나 관객과 함께 춤을 춘다. 관객은 배우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고, 소품을 직접 만져 본다. 서랍을 열어 안에 든 물건을 살펴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공연이 열리는 맥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은 가면을 써야 하고,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는 규칙만 지키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장소다. 국내외 블로그, 유튜브 등에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슬립노모어 후기가 넘쳐난다. 평론가의 리뷰에 기대지 않아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으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는 셈이 된다.

100명의 관객이 있으면 100개의 이야기가 생겨나는 공연 관람 방식, 관객이 낯선 세계에 적응하며 주체적인 참여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2018년 1월에 관람한 슬립노모어 상하이와 2015년 뉴욕 공연에서의 경험을 기록했다. 상하이의 맥키넌 호텔(McKinnon Hotel), 뉴욕의 맥키트릭 호텔에 입장해 퇴장할 때까지 본 장면들과 순간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등장인물이 명확하지 않고, 정확한 줄거리가 없어 혼란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느낌이 슬립노모어의 특징이다. 공연을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극장의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와,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생생한 긴장감이 전달되면 좋겠다.

슬립노모어는 뉴욕과 상하이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공연된다. 뉴욕에는 파티 형태의 이벤트가 많다. 코스튬 파티와 이머시브 디너(immersive dinner) 등의 화려한 행사가 뉴요커들을 연일 극장으로 불러들인다. 상하이는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해 만든 펀치드렁크 인터내셔널(Punchdrunk International)의 거점이다. 펀치드렁크 인터내셔널은 다양한 기업과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상 현실(VR)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이머시브 콘텐츠를 선보인다. 펀치드렁크 극단의 거점인 런던에서는 실험적인 공연을 이어 가며 지역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공연이 어디서 열리든 변하지 않는 이들의 정체성은 관객을 기획의 중심에 둔다는 점이다. 슬립노모어는 공연이 관객을 에워싸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뜻에서 이머시브(immersive) 연극이라 불린다. 특정한 공연 장르로 묶기 어렵다는 평가도 많다. 슬립노모어는 공연 그 이상을 보여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극장을 찾지 않을 것 같았던 젊은 세대의 발걸음을 극장으로 이끌었고, 기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연 방식을 제시했다.

슬립노모어는 공연과 여행, 도시 재생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버려진 건물이나 공간을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지역 시민과 상생하는 공연을 만든다. 가상 현실과 같은 새로운 기술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시적인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기술이 관객의 몰입을 더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관객 참여는 이제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서 중시하는 가치다.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에도 고객을 위한 경험 설계가 빠질 수 없다. 기업들은 브랜드의 장점을 일방적으로 설파하기보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을 만들고, 고객들이 이 공간에서 브랜드를 충분히 경험하기를 바란다. 펀치드렁크와 슬립노모어는 디지털 시대의 고객을 불러올 방법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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