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쇼크
5화

다문화를 반대하는 사람들

누가 다문화를 원하는가


이들은 먼저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국민적 동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원주민의 이주자·다문화 수용성은 조사 기관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온다. 따라서 단정적 결론은 지양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몇 가지 조사를 참조해 본다.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의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오직 36퍼센트의 응답자만 다양한 인종, 종교 그리고 문화와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답한 반면, 86.5퍼센트의 응답자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같은 조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1]

문화체육관광부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68.8퍼센트의 응답자는 외국인 노동자를 이웃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지만,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한 이는 25.7퍼센트에 그쳤다. 이를 반영하듯 오직 29.3퍼센트만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다. 결혼 이주자 역시 응답자 중 절반만 가족으로 수용 가능하다고 답했다.[2] 생각하기에 따라 수용성이 높다고도 낮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다문화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성가족부가 주관한 〈2018년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3]〉는 한국 원주민의 다문화 수용성이 사회 경제적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다른 에스닉 그룹을 받아들일 경우 국가 결속력이 저해된다거나, 단일 민족 혈통 유지는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2015년 대비 하락했다. 단일 민족 도그마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주목할 조사 결과는 다음에 이어진다. 청소년의 다문화 수용성은 71.22점으로 52.81점인 성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특히, 이주민과 적극적 교류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인 교류 행동 의지 측면에서 청소년은 78.49점, 성인은 42.48점으로 차이가 극심했다. 청소년기 학교생활 등 이주민 자녀와의 시공간 공유가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2015년과 비교했을 때, 청소년의 다문화 수용성은 높아졌으나 성인은 하락했다. 특히, 응답자 중 20~30대의 경우 2015년에 비해 다른 연령층보다도 더 큰 폭으로 다문화 수용성이 떨어졌다. 이에 더하여 이주민과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의 관계를 맺고 있는 성인은 줄고 청소년은 늘었다. 단일 민족 도그마도 벗어나고 다문화 교육도 시행했지만 정작 성인의 다문화 수용성은 계속 떨어지는 것이다. 청소년과 성인의 다문화 수용성 추세가 엇갈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일정 시간이 경과해도, 또 다문화 교육을 시행해도 원주민의 이주자·다문화 수용성이 기대만큼 향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사 결과에 나타난 청소년 원주민의 높은 수용성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과의 동등한 학교생활 그리고 공교육 상의 다문화 교육 덕분에 시기상 당연하게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원주민으로서 결혼 이주자 자녀 혹은 이주 노동자와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이들의 수용성은 상당 부분 잠식된다. 현실 사회에서 결혼 이주자 자녀와 이주 노동자는 학교처럼 공존의 대상이 아닌 취업과 같은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대상이 되는 탓이다.

다문화 교육을 통해 다문화 수용성을 향상할 수 있다는 정부와 학계의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다른 증거도 있다. 2009년 열 두건에 그쳤던 주요 일간지 외국인 혐오 관련 기사는 2018년 145건으로 열두 배나 늘었다. 외국인 혐오 범죄나 사건에 관한 유의미한 통계는 없지만 언론은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기사화하는 만큼,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혐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자명하다. 다문화 교육의 열매를 먹고 자란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어떻게 한국 사회를 위협하는가


다문화 반대 그룹은 이주 노동자 수입의 반대 이유 중 하나로 원주민 노동자 일자리 위협을 꼽았다.

“…… 한국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수입하는 다문화 정책은 다국적 기업에 싼 노동력과 이익을 제공하지만, 기존 한국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하고 심지어 해고 위협까지 직면합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이들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주민 노동자의 잠재적 위협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단순기능 인력 카테고리의 이주 노동자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방문취업제를 통해 입국한 방문취업 비자 외국 국적 동포 노동자와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비전문 취업 비동포 외국인 노동자다. 동포 노동자의 절대다수는 조선족이며, 이들은 서비스, 건설 그리고 일부 제조업 등 정부에 의해 지정된 산업군 내에서 직장 선택 및 이전의 자유가 주어진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비동포 이주 노동자들은 원칙적으로 비자에 명시된 고용주만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들에 대한 업종과 고용주 선정은 정부에 의해 사전 조율된다.

따라서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이주 노동자와 원주민 노동자 간 경쟁 관계는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제조업 분야 이주 노동자의 비위협성은 전국민주노동총연맹(민노총)의 외국인 노동자 노조에 대한 지지에서도 일정 부분 확인된다. 따라서 이주 노동자 유입으로 말미암은 원주민 노동자에 대한 잠재적 피해의 가해자는 다른 그룹에서, 그리고 잠재적 피해 업종은 비제조업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 다른 그룹은 조선족으로 대표되는 방문취업 비자 그룹 그리고 불법 체류자 그룹이다. 2020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주 노동자 100명이 유입되었을 때 저숙련 내국인 취업자는 약 26명 감소하며 이 중 21명이 건설업이라는 연구 결과[4]를 발표했다. 건설업은 당연히 방문취업 비자를 가진 이주 노동자만 일할 수 있는 업종으로 마찬가지로 이들의 절대다수는 조선족이다. 조선족은 한국 건설업에 약 10만 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음식·숙박업에서도 원주민 노동자와 경쟁하고 있다.

불법 체류자 그룹은 정식 통계에 잡히지도 않고 업종 제한 없이 취업 활동을 한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건설업계 외국인 노동자 22만 명 중 불법 취업 인원은 16만 명으로 추산된다. 더 나아가 이들 존재는 원주민 노동자 자리를 직접 뺏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 원주민의 고용 조건을 위협한다. “너 말고도 일할 사람들 줄 섰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고용주에게 급여 인상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 노동 계급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불법 체류자를 포함한 이주 노동자가 아니라 한국의 보수 정치 집단처럼 보인다. 2019년 당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이주 노동자에게 차등화된 최저 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싼 임금으로 노동력 착취를 하게 해달라는 한국 중소 부르주아들의 노골적 요청에 대한 눈물 어린 화답이었다. 그다음 달, 당 대표에 이어 나경원 원내대표는 “근로기준법 시대가 저물어가고 노동 자유 계약법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다. 최저 임금은 개나 줘버리고 두 경제 주체 즉, 부르주아와 가진 것이라곤 몸뚱어리밖에 없지만 어쨌든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자율적으로 노동 매매 계약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천하라고 해도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외국인 노동자 임금 문제가 이주자·원주민이란 인종 차원을 벗어나 본질적으로 계급 문제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본주의 고용주들의 지상 목표는 저임금 노동 구조의 안정화다. 따라서 최저 임금 인상 이야기만 나오면 고용주들은 나라 잃은 표정을 한다. 과연 노동자들은 최저 임금만으로 살 수 있을까? 2021년 11월,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과 뉴질랜드의 GDP는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당 최저 임금은 한국이 8720원, 뉴질랜드가 20달러(1만 6500원)로 차이가 있다. 거의 두 배지만 이 임금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오클랜드(Auckland)엔 없다. 한국은 당연히 더 심할 것이다. 최저 임금으로는 생존하기도 버거운 노동자들의 삶은 자본가·고용주들 안중에 없다. 오로지 “내 사업은 저수익 사업이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건비를 낮춰야 해”라는 지상 과제로 머리가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저임금 주체가 내국인이든, 합법적 이주 노동자든, 불법 체류 노동자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노동자는 무조건 저임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자도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주 노동자로 인한 원주민 노동자 일자리 위협의 대안으로 저숙련 일자리는 이주 노동자에게 내어 주고, 원주민 노동자는 고숙련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것을 제안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시한다. 최저 임금으로는 생존하기도 힘들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 노동자를 위협한다는 다문화 반대 그룹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인간’ 노동자를 위협한다는 패러다임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위협

한국 원주민이 외국인 노동자를 위협적으로 느끼는 부분은 노동자 일자리 위협보다 어쩌면 그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는 인식일지 모른다. 상대적으로 이주 노동자가 많은 수원에서 발생한 2012년 오원춘과, 2014년 박춘풍의 잔인한 살인 사건은 한국 사회에 결코 잊히지 않을 충격을 남겼다. 다문화 반대 그룹도 이를 지적한다.

“……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는 저소득 배경 출신이며 종종 범죄적 행동에 대한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 대중이 꺼리는 도심 게토(ghetto)에 종종 모여 삽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이들의 주장은 얼마나 팩트에 기반을 두고 있을까? 외국인의 전체 범죄율은 원주민의 절반 이하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는 인식은 오해라고 일부 학자는 주장한다. 이와 관련, 한국 최대 규모의 단일 위키인 나무위키의 한 기고가는 재치 있게 반문한다. 이주 노동자가 명예 훼손, 예비군법 위반, 음주 운전, 병역 기피를 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전체 범죄율 대비 외국인 범죄율이 낮다는 주장은 오히려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범죄 유형별 인구 10만 명당 검거 인원 지수 비교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내국인 외국인 내국인 외국인 내국인 외국인 내국인 외국인 내국인 외국인
전체 범죄(건) 3369 1558 3495 1689 3190 1319 2990 1163 2988 1238
살인(명) 1.7 4.1 1.7 4.4 1.6 4.0 1.5 3.0 1.5 2.8
기수(명) 0.7 1.7 0.7 1.4 0.6 1.4 0.6 0.8 0.6 1.0
미수(명) 1.0 2.4 1.0 3.0 1.0 2.6 0.9 2.2 0.9 1.8
강도(명) 3.7 5.2 3.2 3.2 2.7 2.5 2.1 1.8 2.4 2.4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표에서 알 수 있듯 외국인은 내국인보다 전체 범죄율은 낮지만, 살인·강도와 같은 강력 범죄 비율이 높다. 특히, 위 다문화 반대 그룹이 게토로 표현한 외국인 밀집 지역(구로구, 영등포구, 안산시 단원구, 시흥시 등)의 외국인 5대 범죄(살인·절도· 강간·강도·폭력) 비율은 전국 평균치를 크게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경찰청 관계자는 외국인 살인 범죄는 대부분 술 먹고 자국민끼리 싸우다 발생하는 우발적 경우로 내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는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피살자가 ‘외국인’이라고 안심하며 위 지역을 마음 편히 다닐 내국인은 많지 않을 듯싶다. 절대다수가 20~50대 남성 육체노동자인 이주 노동자의 인구 특성을 참작하더라도 외국인 범죄에 관한 다문화 반대 그룹의 지적은 일정 부분 공감이 간다.

다문화 반대 그룹이 범죄와 다른 면에서 이주 노동자가 한국 사회·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이주 노동자가 소득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행위다.

“…… 외국인 노동자는 임금을 모아 본국으로 송금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소비를 거의 안 합니다. 따라서 국내 소비 진작에 도움이 안 됩니다. 차라리 정부는…… 원주민 노동자들에게 나은 근무 조건과 환경을 제공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매일경제》의 2020년 기사에 따르면, 고용허가제 이주 노동자는 소득의 63.9퍼센트 그리고 조선족으로 대표되는 방문취업제 이주 노동자는 14.1퍼센트를 본국으로 송금한다. 2018년, 1년 이상 장기 취업 외국인 노동자의 해외 송금액은 2조 9810억 원으로 집계됐다. 1년 미만 단기 취업 외국인 노동자의 수입 2조 2184억 원이 이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실질 해외 송금은 이를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조선족이 연변에 보내는 송금액은 2011년 기준 연변주 GDP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이다. 애초에 이들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가 한국에서 원주민과 같은 수준의 소비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연 5조 원이 넘는 국내 이주 노동자 소득이 국내 수요와 고용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다문화 반대 그룹의 주장은 상당 부분 타당하다.

한편,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유엔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Migrant·IOM) 같은 국제 기구들은 저소득 국가가 자국 노동자를 고임금 국가에 보내어 그들로부터 송금액을 받는 상황은 송출 국가, 수용 국가 그리고 노동자 자신에게도 윈윈(win-win)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수용 국가의 경우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득이고 송출 국가는 자국 경제에 도움이 되니 이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노동자들이 수용국가에서 받는 고통 그리고 송출 국가가 자국 노동자를 송출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국 내 사회적 비용이, 그들이 보내오는 송금액보다 더 크다는 현실을 외면한 인식이다. 이주 노동자가 보내주는 송금액이 송출국의 경제 개발 기폭제로 쓰인다는 주장도 경험적 증거가 없다.[5] 다문화 반대 그룹의 주장에 더해 이는 더더욱 이주 노동자의 송금 행위가 개별적 수준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어, 무차별적으로 양산된 국제 중매결혼으로 발생한 사회적 비용 역시 이들의 비판 대상이다.

“…… 미디어들은 국제결혼을 미화해 왔으며 정부 역시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를 장려해 왔습니다. 외국인 신부들은 자신을 둘러싼 빈곤에서 벗어나는 한편 모국 가족들을 돕기 위해 결혼합니다…… 국제 중매결혼의 70퍼센트가 결혼 3년 안에 파국을 맞이합니다. 대부분 신부는 동남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에서 오며 이들은 저소득과 저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제 중매결혼을 둘러싼 가짜 결혼, 결혼 사기, 성혼 실패 그리고 이혼 등은 한국 사회의 비용으로 남습니다. 특히 이런 결혼을 통해 탄생한 2세들은 앞으로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통계가 있다. 2012년 기준, 약 87퍼센트의 결혼 이주자들은 중국과 동남아에서 왔으며, 40퍼센트 넘는 한국 신랑은 대학 교육을 받았지만 80퍼센트의 신부는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6] 2010년도의 한 자료에 따르면, 원주민 커플의 27퍼센트가 결혼 후 4년 이내 이혼한 반면, 같은 기간 국제결혼 커플은 79퍼센트가 이혼했다. 2013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 원주민 커플 간 나이 차이는 1.3년인 반면, 국제 중매결혼 커플은 17년이다. 따라서 이 국제 중매결혼의 신분 상승(hypergamy)적 본질에 대한 지적도 상당 부분 맞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이런 국제 중매결혼은 2005년을 정점으로 하향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이혼의 경우도 국내 총 이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하락세를 유지해 2019년 기준 6.2퍼센트였다. 이는 국내 총 결혼에서 차지하는 비중인 9.8퍼센트를 밑도는 수준이다.

다문화 반대 그룹이 지적한 사회적 비용과 개인적 어려움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개인적 어려움은 한국인 신랑과 이주 신부 모두에게 발생한다. 이주 후 한국인 신랑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 이혼 이후의 힘든 삶이 결혼 이주 여성으로부터 보고되는 가운데, 신부의 사기성 결혼으로 고통을 겪는 한국인 남성 사례도 많이 보고되고 있다. 국제 중매결혼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 남성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국제결혼 피해 센터가 그 실례다. 2021년 11월 기준,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데 2013년에는 5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별도의 대안 학교(2020년 기준, 45개교)도 사회적 비용의 한 예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진행되는 일부 국제 중매결혼 관련,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통상 한국인과 저개발국 아시아 국가 출신 배우자와의 결혼 성별 패턴은 ‘한국 남자 아시아 여자’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한국 여자가 아시아 국가 출신 남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 한국 여자 아시아 남자의 결혼 패턴에서 유독 한국 여성의 ‘재혼’ 비율이 높다. 일본과 대만을 제외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중국, 베트남, 필리핀,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출신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은 다 초혼보다 재혼 비율이 높다. 대표적 사례가 베트남이다.
 
베트남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아내의 혼인 종류
 
혼인 종류 2018 2019 2020
총계 587 639 501
초혼 15 24 15
재혼 572 615 486
*출처: 통계청, 단위: 건

2020년, 베트남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 501명 중 486명이 재혼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트남 남성이 초혼 상대로는 마땅치 않지만, 재혼 상대로는 최고로 한국 여성에게 다가가는 것인가?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겠지만, ‘한국 국적 에스닉 베트남 여성’일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100퍼센트일지도 모른다. 한국 남성과의 결혼 이주를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남편과 사별·이혼 과정을 거쳐 ‘돌싱’이 된 그들이 같은 베트남 남성과 재혼하는 사례이다. 그리고 그 베트남 남성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일 수도 있다. 한국 정부가 기대했던 ‘다문화 가족’은 해체되고 한국 정부가 원치 않는 이질적 단일 에스닉 가정으로 구성된 ‘다문화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이 펼쳐지고 있다.

 

이주 노동자가 유일한 대안인가


현재 한국 주류 담론에서 거론하는 이주 노동자 수입 필요성의 근거는 크게 한국인의 3D 업종에 대한 기피 현상, 저출산 그리고 고령화에 따른 경제 활동 인구의 감소다. 이에 대해 다문화 반대 그룹은 그런 이유가 다문화나 이민의 명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인들이 이전보다 부유해지고 사회적 지위에 신경 쓰게 되면서 3D 업종을 꺼린다는 주장에 대해 다문화 반대 그룹은 피상적 이해라고 반박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3D 업종을 피하는 것은 그것이 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업종이어서가 아니라 ‘더럽게’ 낮은 임금 때문이다(2012년 인터뷰임을 고려해야 한다).

“…… 외국인 노동자들 경우, 주거와 숙식이 제공되며 한 달에 최소 150만 원을 법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특히 자녀가 있다면, 한 달 150만 원 급여로는 자녀를 키우고 교육할 수 없습니다…… 한국 노동자들이 그런 직업들을 피한다면 그 임금으로는 한국에서 가정을 정상적으로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 그 직업이 힘들거나 더러워서가 아닙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시간당 임금을 계산하면 원주민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여전히 높은 급여를 받는다. 2020년 8월 기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는 742만 6000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36.3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들의 평균 월급은 171만 1000원이다. 비전문 취업, 방문취업, 재외동포(F-4) 이주 노동자의 2019년 월 평균 임금은 실수령액 기준 211만 1742원(주 평균 50시간 노동)이었다. 비전문 취업 이주 노동자만 보면 26퍼센트가 평균 100만~150만 원, 63퍼센트가 200만~300만 원 그리고 10.9퍼센트는 300만 원 이상을 번다. 상위 74퍼센트가 최소 월 2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버는 셈이다. 단순히 비교하면 비전문 취업 이주 노동자가 원주민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월급이 많다. 하지만 비전문 취업 이주 노동자의 23.9퍼센트가 주 60시간 이상 일을 할 정도로 장시간 노동을 하는 데 반해, 원주민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 평균 노동 시간은 30.7시간이다. 따라서 위 숫자에 근거, 시간당 평균 임금을 따지면 여전히 원주민 비정규직 노동자(시간당 약 1만 3000원)가 외국인 노동자(시간당 약 9800원)보다 더 많이 받는 셈이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비전문 취업 이주 노동자와 달리 비정규직 원주민은 많은 경우 가족이 있다. 2021년 현재, 한국 4인 가구 중위 소득은 487만 6000원인데 비정규직 원주민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171만 1000원이다. 1인 가구 중위 소득 170만 7000원과 같은 수준이다. 따라서 현행 시간당 1만 3000원도 혼자 먹고사는 정도인데 가족 딸린 가장 노동자에게 이보다 급여가 낮은 3D 업종을 왜 피하느냐고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원주민이 3D 업종을 피하는 것은 일 자체가 더럽고 위험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지자체 환경미화원 모집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환경미화원은 3D 업종의 문법을 빌리자면 음식물 쓰레기를 수집, 운반하는 ‘더러운’ 일이며 새벽, 야간 근무로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한’ 직업이다. 그럼에도 2020년 지자체 환경미화원 채용 경쟁률은 수십 대 일을 기록할 정도로 치열했다. 지자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 그리고 60세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성 등이 큰 이유다.

3D 업종이 동시에 저임금 업종이라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상륙하자 전면적 봉쇄 조치를 내린 뉴질랜드는 말 그대로 모든 게 멈췄다. 슈퍼마켓과 주유소 등을 빼곤 도시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멈춰 선 도시에서 슈퍼마켓 직원, 환경미화원, 의료인, 경찰, 소방관 그리고 양로원 돌봄 서비스 인력은 일을 계속했다. 정부는 이들을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s)’이자 국가적 영웅으로 한껏 치켜세웠다. 한 기자가 수상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슈퍼마켓에서 위험을 안고 일하는 직원에게 특별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상은 잘라 답했다. “그것은 고용주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리버럴 정권이 ‘사회적 노동’을 대하는 자세이다. 입으로는 그들 노동의 사회적 의미, 즉 사용 가치를 말하지만, 교환 가치는 자본가에게 맡긴다. 사회에 없어서 안 될 필수 노동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최하층 서비스 노동자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D 업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없다면 한국 3D 업종의 외국인 노동자 의존 구조는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3D 업종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 국가는 이러한 직업의 사회적 필요성에 걸맞은 보상을 해줘야 한다. 보상은 그 본질에 있어 ‘사회적 보상’이어야 한다. 개인의 능력 혹은 자본 축적에 대한 기여도가 보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마다 보상 차이가 나는 것은 개인의 능력 차이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기여도 차이 때문이어야 한다.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하는 슈퍼마켓 직원과 그 슈퍼에서 산 와인을 마시면서 자신과 투자자를 위해 집에서 온라인으로 선물 거래를 하는 사람. 과연 누가 더 사회에 기여를 하는가? ‘3D라서’ 저임금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3D이기 때문에’ 임금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단순노동 역시 낮은 기술성으로 임금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임금이 책정되어야 한다. 노동 보상 기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3D 업종 혹은 단순 직종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에 기반을 둔 보상이 개인의 노동 의욕 혹은 성취욕을 저해할까? MBA를 마치고 와인을 마시며 선물 거래를 하는 위 사람과 매일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이 같은 급여를 받는다면 MBA를 받은 이는 내가 이러려고 공부를 했던가 자괴감에 빠질까? 그렇다면 물어보고 싶다. 다시 선택한다면 공부라는 생고생을 하지 않고 화장실 청소할 거냐고. ‘No’라고 답하지 않을까? 요즘 청년들에게는 직업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직업이라는 것은 생계 유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신이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사람은 선천적 능력의 차이도 있고 이후 노력의 차이도 있다. 이에 따라 성과나 생산성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원칙은 한 개인이 자기 일에 충실하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원칙적으로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 위에서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보상은 적절하게 차등화될 수 있을 것이다.

3D 업종의 저임금과 관련해 노동 보상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 원칙을 다소 장황하게 강조했다. 이는 한국 정부와 학계가 이주 노동자 수입의 당위성을 거론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국 사회 저출산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출산 때문에 이민을 받아야 한다고?

“…… 장기적 해결책은 현재 63퍼센트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인구 대비 고용 비율을 여성과 노인에게 더욱 많은 취업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80퍼센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성을 높임과 동시에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문화사랑 국민연대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출생률은 0.84로 압도적 세계 꼴찌인데 특히 서울은 0.64이다. 이 낮은 출생률과 그에 따른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이민자를 받아야 한다는 주류 담론의 논리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2020년 한국 주민등록 인구가 역사상 처음으로 감소하자 한 경제지는 이를 비극이라고 묘사했다. 무엇이 비극일까? 한국 인구 밀도는 인구 1000만 명을 넘는 국가 중 방글라데시, 대만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다. 좀 더 여유 있는 공간이란 측면에서 나쁘지 않은 현상이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인구를 특정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학계에서 걱정하는 감소 인구는 ‘생산 가능 인구’이다. OECD의 정의를 따르면 15~64세에 해당하는 연령층이다. 줄어드는 생산 가능 인구 걱정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고령화’ 이슈이다. 연금으로 대표되는 고령자에 대한 사회적 부담은 늘어나는 데 반해, 이를 짊어질 그룹은 저출산으로 작아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민자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여기서 이민자는 곧 노동자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지난 세기 이민 수용 국가에서 이민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 원인이 ‘노동자를 불렀지만 온 것은 인간’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외면한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을 위해 상식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그 문제를 야기한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저출산 대책 논리는 뭔가 이상하다. 저출산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이민은 저출산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민자가 부족해서 저출산 현상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 사회는 뭔가 의도성이 보이는 ‘저출산으로 인한 이민자 수입’ 논리로 허겁지겁 달려갈 것이 아니라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근본 원인을 한국 사회는 이미 알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22년부터 출산 시 200만 원, 그리고 신생아가 1세가 될 때까지 매월 30만 원 지급 등을 포함한 출산 장려책을 또 발표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다고 2006년부터 2019년까지 185조 원을 투입했던 한국 정부였다. 이전에 본 듯한 이 새로운 당근책은 통할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들로부터 “어디서 약을 팔려고 해?”라는 조소를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래 표는 정부의 출산 장려책이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구 소득 구간별 자녀 양육비
 
양육비 1억
7534만 원
3억
3469만 원
4억
5918만 원
5억
3022만 원
9억
9479만 원
가구 소득 구간 299만 원 이하 300만~399만 400만~499만 500만~599만 600만 원 이상
*동아일보

가구 소득이 월 500만 원이 안 되어도 아이 한 명을 대학까지 교육하는 데 드는 비용이 4억 6000만 원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월급의 40퍼센트 이상을 지출해야 하는데 출산 전후 겨우 몇백만 원짜리 미끼를 물 부부가 있을까? 한국의 부부들이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할 다른 근거도 많다. 2020년 기준, 한국의 노동 시간은 연 1908시간으로 OECD 국가 중 4위다. 이는 OECD 평균보다 28일을 더 일하는 셈이며, 독일과 비교하면 무려 72일을 더 일한다. 그리고 드디어 1인당 GDP를 제쳤다고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일본보다 39일을 더 일한다. 철인이 아닌 이상, 부부 양쪽 모두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 어렵다. 자기 집 마련은 또 어떠한가. 민주노동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평균 소득 가구가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매하려면 50년이 걸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장 근본적인 저출산의 원인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업종 간, 직종 간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 간 심각한 임금 격차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6월 기준, 비정규직은 정규직 시간당 평균 급여(2만 371원)의 72.4퍼센트(1만 5015원)만을 받는다. 여기에 비정규직(주당 30.7시간)은 정규직(주당 40.7시간)에 비해 근무 시간도 짧기 때문에 비정규직은 정규직 급여에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받게 된다. 이 임금 격차가 현재 한국 사회의 경쟁적 교육열의 주범이다. 미래의 좋은 급여를 위해선 좋은 직장이, 좋은 직장을 위해서는 좋은 대학이, 좋은 대학을 위해서는 좋은 입시 성적이, 좋은 입시 성적을 위해서는 좋은 과외가, 그리고 좋은 과외를 위해서는 부모의 돈이 필수적인 한국 사회다. 여기에 교육 당사자 학생은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을 시쳇말로 ‘빡세게’ 돌아야 한다.

이 망국적 노동 서열 문화가 오늘날 저출산과 경쟁 사회 한국의 가장 큰 원흉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에서 1위다. 특히, 2020년 10대와 20대 자살률은 전년보다 증가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두 사람 사랑의 결정체인 2세를 갈망하는 젊은 부부들은 자신의 2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헬조선’에 데려오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내는 아이 때문에 등골이 휘어지는 남편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이 때문에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치이는 아내를 보면서도 차마 직장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하는 미래의 자신과 조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의 수많은 부부들은 출산 억제를 통해 헬조선 사회의 종말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제 사회의 종식을 슬퍼할 사람은 노예 부부가 아니라 노예 소유주들이다. 저출산을 걱정하는 집단은 부부가 아니라 노동자의 실종을 두려워하는 자본가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정부의 변죽만 울리는 누더기식 출산 장려 정책은 자본주의 국가, 리버럴 정권의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업종·직종 간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를 줄이면 소위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과외는 사라지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혹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이 사회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이겨야 할 경쟁 상대에 대한 의식 없이 오롯이 자신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다. 자녀는 축복받은 신의 선물로 다시 부모에게 돌아올 것이다.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은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 아닌 사회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이 자기보다 훨씬 단순한 일을 하는데도 자기와 비슷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길거리 청소는 즐겁고 어쩌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일 것이고, 누군가는 극도로 복잡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제작도 좋아서 할 뿐이다. 그들은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는 사이로 공존한다.

인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닐 다네샤(Neel Dhanesha)는 인구가 줄어들면 줄어드는 대로 인류는 그 인구로 견고한 경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구가 줄어들어서는 안 되기에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아닌 노동자와 착취에 대한 집착일 수 있다. 끊임없는 팽창은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거기에서 내리는 순간 파산을 맞이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들은 생산을 위한 노동자가 무조건 필요하다.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에는 관심이 없다. 과격한 표현으로 “응, 그건 국가 너의 몫이지. 그러라고 정치 자금 대준 거잖아!”라는 태도를 유지할 뿐이다. 인구 문제에 대한 한국 자본가와 리버럴 정권의 이런 접근은 고령화 대책에도 적용된다.

이민자가 고령 인구를 부양한다고?

한국 사회는 확실히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연평균 4.4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OECD 평균 2.6퍼센트의 1.7배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속도다. 한국은 2025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퍼센트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2030년, 한국 여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균 수명 90세가 넘으며 한국은 세계 최장수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말미암은 연금 재원 고갈이 예상됨에 따라 고령 인구에 대한 복지 대책 걱정은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이 있다. 저출산 등으로 한국의 생산 가능 인구는 2020년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한국 고령 인구는 안녕했을까?

관련 통계와 사실은 한국 고령화 문제는 본질에 있어 이들 연금을 책임질 생산 가능 인구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한국 노인 빈곤율은 2018년 기준 43.4퍼센트로 OECD 평균의 세 배를 기록하며 1위다. 《2021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자살률 또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이다. 법적 정년은 60세임에도 평균 퇴직 나이는 49.4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이 실질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은퇴하는 연령은 72.3세인데 이 역시 OECD 1위다. 저출산으로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든다는 뉴스를 들으며 50세가 되기 전에 퇴직당한 이 젊은 노인은 그 뒤로도 22년 동안 어디선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 연금의 소득 대체율(은퇴 전 소득 대비 연금소득 비율)이 43.4 퍼센트(2018년 기준 OECD 평균은 58.6퍼센트)에 불과한 것도 이에 일조한다.

한국 사회 고령화와 그에 대한 대책 논의를 보면서 떨쳐 내기 어려운 궁금증이 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퇴직 혹은 연금 수령의 기준이 되는 나이 65세다. 연금은 1889년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인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 운동의 발흥을 보면서 독일 노동자를 달래기 위해 시행한 것이 시초이다. 최초 70세에서 시작된 연금 지급 대상 연령은 1916년 65세로 낮추어졌다. 이후 미국도 1935년 65세를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1916년 당시 독일인 평균 수명은 47.1세였다. 1935년 미국인 평균 수명은 남성 59.9세 그리고 여성은 63.9세였다. 1940년 기준, 21세까지 생존한 미국 남성은 약 54퍼센트가 65세 연금 수령 연령에 도달해 평균 13년 동안 연금을 받았다. 한편 2021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3세다. 65세부터 연금을 받는다면 18년 이상 연금 수령 대상이 된다.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연금 수령 기간을 줄이기 위해 수령 연령을 높이자는 것이 아니다. 2021년의 한국 65세는 1세기 전 독일이나 미국의 65세와 달리 여전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구인데, 왜 65세 퇴직을 고집하느냐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노동일지라도 한국인 노동 시장 은퇴 평균 연령이 72.3살이라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면에서 2021년 4월부터 시행된 일본의 ‘고연령자 고용 안정법’은 우리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일본의 기업은 종업원이 65세에 도달해도 70세까지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거나 외주 형태로 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전자는 정년 연장, 후자는 고용 연장이 보장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법안을 핑계로 기존 연금 수령 연령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65세 이상이 되면 연금을 받으면서 70세까지 자신의 역량 안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15~64세 생산 가능 인구 틀을 벗어나 65세 이상에게 적절한 일자리가 주어진다면 이들은 사회적 부담이 아니라 그 자신이 생산 가능 인구가 되어 사회적 기여자로 남게 된다. 생산 가능 인구의 정년을 고집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64세는 가능한데 68세는 불가능한 노동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주 노동자 수입은 잘못된 처방이다


한국이 다문화·다에스닉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왜 같이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겉보기엔 과격하지만 나름의 근거가 있다. 이들이 지적한 한국 정부 다문화 정책의 모순점이 시사하는 것은 결국 이주 노동자를 둘러싼 사회 경제적 구조 개선이 동반되지 않으면, 원주민과 이주자 간 관계와 인식 개선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원주민이 가지는 불안감은 일반적으로 이주 노동자와의 일자리 다툼보다 범죄율에서 온다. 연간 5조 원이 넘는 이주 노동자 소득은 대부분 모국으로 송금되므로 국내 수요·고용 창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국제 중매결혼의 사회적 비용 문제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주민이 여러 면에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이들 주장도 일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원주민 노동자와의 갈등은 이주 문제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앞서 살펴보았듯 원주민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건 고용허가제를 통해 정식 입국한 이주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국적 문제라기보다 노동자 임금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계급 인식 문제에 가까우며, 이를 이용하는 것은 극우 신자유주의 정치 집단이다.

한국 원주민의 3D 업종 기피 현상과 저출산, 고령화에 관한 정확하지 않은 문제 진단은 노동 이주자 수입이라는 잘못된 처방으로 이어졌다. 3D 업종의 열악한 조건에는 사회적 보상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사회 인식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경쟁의 완화가 필요하고 고령자는 생산 가능 인구로 전환할 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시도가 실제로 있다고 해도 한국 자본가들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며 이에 대한 리버럴 정권의 의지도 도마에 오를 것이다.

한편 이주 노동자 유입과 그에 따른 수용 국가 사회 내 불협화음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를 더 큰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원주민의 이주자에 대한 인종 차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정서의 실체를 글로벌 자본주의 프레임 속에서 들여다본다.
[1]
안상수 외 2인,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 연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2.
[2]
김면 외 2인, 〈문화다양성 실태조사 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 2017.
[3]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8년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 여성가족부, 2018.
[4]
이종관, 〈외국인 및 이민자 유입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 《정책연구시리즈》, 한국개발연구원, 2020.
[5]
Wise. R. D., 〈The migration and labor question today: Imperialism, unequal development, and forced migration〉, 《 Monthly Review》, 64(9), 2013., p. 25.
[6]
김성일 외 8인, 《다문화사회의 이해: 9가지 접근》, 태영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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