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뛰는 인간의 충동

날뛰는 인간의 충동

30년 전에는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 의미 있는 것은 돈뿐이다. 중국의 대표 작가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확연히 변해 버린 한 나라를 살펴본다.


지난 50년간 중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해 보려고 하면, 내 앞에 수많은 길이 나타난다. 변화가 워낙 어마어마하다 보니, 나로서는 큰길 몇 개를 우선 따라간 후에 좀 더 작은 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선택한 첫 번째 큰길은 과거에서 출발한다. 58년을 살면서 나는 세 번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각각의 변화마다 관료들의 자살이 쇄도했다. 첫 번째 자살 물결은 1966년에 시작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중에 일어났다. 이 기간이 시작됐을 때는 수많은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숙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가 되어 버렸고 온갖 심리적, 육체적 학대를 당한 후에 일부는 자살을 선택했다. 내가 성장한 중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목을 매거나 살충제를 삼키거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중국 남부의 우물은 입구가 좁아서, 머리부터 뛰어들면 살아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문화혁명 초기에는 사회 최하층에 속하는 많은 이들이 자체적인 대중 조직을 만들고 자신들이 ‘문화혁명 위원회’의 지휘관들이라 선언했다. 이 사람들은 혁명군이라고 불렸으며, 이후 이런저런 안정된 공직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직장을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1976년 마오의 죽음에 뒤이어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 의지를 지닌 덩샤오핑이 중국의 새 지도자로 떠오르자, 일부 혁명군은 자신들이 몇 년 전에 괴롭혔던 관료들만큼이나 고통을 겪게 되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자살의 물결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혁명 과격파로서 권력을 쟁취했던 관료들 차례였다. 작은 우리 마을의 관료 한 명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 전에 담배를 잔뜩 피웠는데, 해변에 흩어진 담배꽁초가 죽기 전의 고통스러운 망설임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이번 물결은 첫 번째 자살 물결보다 훨씬 작았다. 덩샤오핑은 정치적인 복수보다는 경제 개혁을 시작하고 서방에 문을 여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중국의 경제 기적으로 이어졌고, 부작용으로 환경 오염과 심해지는 불평등, 만연하는 부패를 낳았다.

2012년 말에 내 인생의 세 번째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으니, 중국이 시진핑 시대에 들어선 것이었다.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 시진핑은 공산당 서기장이 되자마자 누구나 놀랄 만한 규모와 위력의 부패 척결 운동을 시작했다. 중국의 무서운 경제 성장 속에서 자기 주머니를 불린 관료들은 자신들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로 종지부를 찍었다. 수사 중이기는 했으나 아직 구속되지 않은 낮은 계급의 관료들이 얽혀 있을 경우에는 정부에서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설명했다. 그러나 고위층이 자살했을 경우에는 가혹한 비판이 일어났다. 2017년 11월 23일, 장양(Zhang Yang·张阳) 장군이 자기 집에서 목을 매단 후에 《해방군보(解放軍報, 중국 인민군 기관지)》는 장양이 “당의 규율과 나라의 법을 회피했다”고 보도하고 그의 자살을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평했다.

이 세 번의 자살 물결은 중국 법률 기관들의 실패와 무능을 보여 주는 예시다. 공안부와 검찰원과 법원 모두가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기능을 멈췄고, 그 후로 법은 유명무실했다. 마오가 죽은 후, 강력한 법체계는 한 번도 세워지지 않았고 오늘날 법의 실패는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첫째로 법은 이론상으로만 강력하고, 실행에 있어서는 관료들이 휘두르는 권력에 영합한다. 둘째로 자신이 수사를 받고 있으며 지위가 자신들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을 깨달은 관료들 일부는 법적인 제재를 받느니 차라리 죽고 마는데, 권력을 믿는 관료들은 법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상충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세 번의 자살 물결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처음 두 번의 자살 물결은 정치 투쟁의 결과라는 점이다. 이 두 번은 문화혁명의 시작과 끝에 둘러싸여 있다. 반면 세 번째 물결은 30년간의 빠른 경제 발전에 수반한 부패의 그림자에서 기인한다. 물론 부패 척결 운동 자체가 시진핑의 정적들을 숙청할 목적에서 선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는, 오늘날 정말로 깨끗한 관료가 얼마나 되는가이다. 몇 년 전, 중국의 검찰원에서 일하는 어느 관료는 나에게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료 전원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모조리 총살한다면, 몇 사람에게는 부당한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하나 걸러 하나씩만 쏜다면 많은 수가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갈 거예요.”
 

우리들 각각은 작은 물방울이며, 모여서 거대한 사회주의의 홍수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물방울이 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내 어린 날의 중국으로부터 현재까지 뻗어 있는 두 번째 큰길로 방향을 틀어 보면, 가족의 중요성은 줄어 가고 개인주의는 갈수록 중요해지는 모습이 보인다. 마오의 중국에서 개인은 평범한 사회생활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포부를 펼치고 싶다면,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 같은 집단행동에 뛰어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뭐랄까, 이런 거대한 활동에서 개인의 포부는 그 당시에 ‘올바른’ 정치 노선에 온전히 순응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일탈했다간 재난이 일어났다.

당시의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들 각각은 작은 물방울이며, 모여서 거대한 사회주의의 홍수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물방울이 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 마을에는 거의 매일 이런저런 시위의 선두에 나가서 제일 처음 주먹을 들어 올리며 “타도 류사오치!”(명목상의 국가 주석이었던 류가 막 숙청당했을 때였다)라고 외치는 문화혁명 활동가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무심코 말을 잘못해서 “타도 마오쩌둥!”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그는 순식간에 ‘혁명 군중’에 의해 땅에 내동댕이쳐졌고, 그 후로 인생의 비참한 시기가 시작되어 언제 어디서나 비난을 받고 얻어맞았다.
1966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국가 반역자로 지목된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그 시절 개인은 가족생활의 맥락에서만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독립적인 성향은 오직 집에서만 표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가족 가치관이 지극히 중요했고, 배우자에 대한 부정은 결코 참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혼외 관계를 갖다가 걸리면, 당시 사회 윤리에서는 온갖 굴욕을 다 감당해야 했다. 머리를 반쯤 삭발한 채로 길거리를 행진할 수도 있었고,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비난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도 분명 있기는 했지만, 전형적이지는 않았다. 절대 다수의 가족들은 전례 없이 똘똘 뭉쳤다. 내 친구 하나는 문화혁명이 시작됐을 때 아버지가 교수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공격 목표가 됐지만, 어머니는 변변찮은 집안 출신이라 혁명 계급에 속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과격파에게 이혼하라는 압력을 받자 강하게 거부했다. 아니, 이혼만 거부한 게 아니라 친구의 아버지가 비판대에 끌려 나갈 때마다 반드시 맨 앞줄에 앉아서, 누군가가 남편을 때리는 모습을 보면 달려들어 맞서 때리기도 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맞서 싸우느라 멍이 들고 피가 난 몸으로 자랑스럽게 앞줄에 다시 앉으면, 과격파들도 기가 죽어서 남편을 때리기를 그만두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친구의 아버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딸에게 말하기를, 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난 목숨을 끊었을 거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다.

마오가 죽은 후, 덩샤오핑 아래 이루어진 경제 개혁은 중국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 사회 각계각층에 스며든 변화였다. 30년 동안 우리는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으로, 인간 본성을 억누르던 시대에서 인간적 충동이 날뛰는 시대로,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대에서 의미 있는 것은 돈뿐인 시대로 이동했다.

이전에는 사회적인 제약 때문에 사람들이 가족 안에서만 약간이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제약이 사라지고 나자, 한때는 그토록 소중했던 그 소소한 자유가 이제 거의 의미를 잃었다. 혼외 관계가 점차 널리 퍼졌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성공한 남자들이 정부 하나, 아니 어쩌면 여러 명을 두는 일도 흔해졌다. 사람들은 종종 이를 찻주전자에 비유하는데, 다구를 다 갖추려면 찻주전자 하나에 찻잔이 네다섯 개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부유한 사업가는 집이 열 채 있는 아파트 한 동을 통째로 샀다. 그는 법으로 인정받는 아내를 그중 한곳에 들여놓고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첩 아홉 명을 다른 집에 두어, 그 건물 안 어디에서 밤을 보낼지 자기 좋을 대로 편하게 고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늘날의 시위는 사회 변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관련 집단의 물질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다.


지난 50년간 중국의 여정을 따라가는 큰길 몇 개를 밟아 보았으니, 이제 더 작은 길을 가볼 차례다. 첫 번째 길에는 불교 사원들이 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사원들은 폐쇄되고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홍위병들이 동네 사원에 있던 모든 불상들의 머리와 팔을 뜯어냈고, 사원 자체는 창고로 바꿔 버렸다. 나중에 망가진 사원들은 복구하고 다시 문을 열었는데, 대체로 대웅전 앞에는 원형의 청동 향로가 두 개 놓여 있다. 첫 번째 향로는 부유함을 기원하는 곳이고, 두 번째 향로는 안전을 기원하는 곳이다.

1980년대에 사원에 가보면, 첫 번째 향로에는 향이 잔뜩 꽂혀서 맹렬히 타오르는 반면 두 번째 향로에는 한 줌의 향이 힘없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시절 중국은 많이 가난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돈이 없다면 안전에 별 가치가 없었다. 이제 중국은 부유하다. 불교 사원에 들어가 보면 부를 기원하는 향로 못지않게 안전을 기원하는 향로에도 향이 밝게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유해지고 나면 안전이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불교 사원은 신도들이 가득한 반면, 도교 사원은 대체로 텅 비어 있다. 몇 년 전에 어느 도관의 책임자에게 물어보았다. “도교는 중국에서 발생했는데, 어째서 수입 종교인 불교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할까요?” 도사의 답변은 간단했다. “불교에는 돈이 있고 도교에는 없거든요.”

다소 당황스러운 답변이었지만, 그 말에는 중국 사회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돈 또는 물질적인 이득이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중국에서 일련의 학생 저항 운동이 있었고, 이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의 시민들이 참여한 1989년의 천안문 시위로 끝을 맺었다. 그 무렵 시위는 대체로 국가의 운명에 대한 근심과, 자유 민주주의를 실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시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 규모는 아주 작고, 그런 시위들 ― 공식 용어로 ‘집단 소요’들은 1980년대의 시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의 시위는 사회 변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관련 집단의 물질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다.

몇 년 전 장쑤(江蘇)성 동부 지역에서 교육 당국은 대학들이 중국 서부의 가난한 지역 출신 학생들을 받을 자리를 더 남겨 두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장쑤성 고등학생의 학부모들 사이에 대소동을 일으켰다. 새로운 정책이 자식들이 대학에 들어갈 기회를 줄이지 않을까 걱정한 학부모들은 항의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몇 년 전 상하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복지 기금이 가난한 지역에 할당되면 퇴직 수당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은퇴자들이 거리에 나선 사건이었다.

이런 끊임없는 ‘집단 소요’가 진짜 문제점을 반영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전국의 수많은 퇴역 군인이 국가로부터 받는 얼마 안 되는 퇴직 수당과 연금에 항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1980년대에는 퇴역 군인이 생활비 대비로 지금보다 훨씬 넉넉한 보상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은 중국이 전보다 부유해졌음에도 정작 그들은 적게 받는다. 퇴역 군인이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낄 만도 하다.

다른 집단 소요의 예로, 6월에 있었던 트럭 운전사들의 광범위한 시위 같은 경우는 현재 중국의 삶을 특징짓는 치열한 경쟁에서 촉발되었다. 많은 산업에서 가격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더 많은 일거리를 확보하려 하는 일이 흔해졌다. 나는 몇 년 전 월드컵 때문에 갔던 남아프리카 여행 말미에 이 새로운 현실에 맞닥뜨렸다. 당시 공항에서 기념품으로 부부젤라를 하나 사고 100위안이 넘는 돈을 지불했는데, 베이징에 돌아가고 나서야 그 부부젤라를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 중국 제조업자들은 출고 가격을 개당 5위안으로 맞췄지만, 곧 더 낮은 가격을 부르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몇몇 공장들은 출고 가격을 2.2위안까지 낮췄는데, 생산 가격이 개당 2위안이었다. 이런 심한 경쟁의 결과로 이윤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주로 노동 시간은 늘어나는데 봉급은 올라가지 않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과거를 애타게 그릴 때 그것은 이성적인 바람이 아니다. 그저 감정을 터뜨리는 방법이고, 현재 중국의 현실에 대한 불만에 뿌리내린 좌절감을 말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제 다른 두 길을 가봐야겠다. 혁신의 길과 그리움의 길이다. 우선 혁신의 길부터 가보자. 새로운 기술이 보편화되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가끔은 새것과 옛것 사이에 간극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바일 결제를 보자. 알리바바의 알리페이 모바일 앱과 텐센트의 위챗페이 앱은 몇 년 만에 전국의 모든 스마트폰에 설치되었다. 큰 쇼핑몰에서 작은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 두 결제 플랫폼에서 스캔 가능한 QR코드를 눈에 띄는 위치에 둔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슥 스캔하기만 하면 결제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거지들조차 이 시대에 발을 맞춰야 해서, QR코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행인들에게 그 코드를 스캔해서 모바일 결제 플랫폼으로 잔돈을 보내 달라고 한다.

스마트폰 결제가 워낙 편리하다 보니, 나도 현금이나 신용카드를 쓰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 하지만 올해 7월, 내 영어 번역자가 베이징을 방문해서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러 나갔을 때, 식당 QR코드를 스캔했더니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문득 현금으로 지불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주머니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어 출납원에게 주고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나는 신기한 일을 하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30년 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출장을 가면 도둑질을 걱정한 나머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속옷 안에 현금을 숨기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기한 기분이 더해진다. 당시에 사람들은 속옷 안에 작은 주머니를 꿰매어 넣고, 안전을 더하기 위해 단추까지 달곤 했다. 지폐를 내놓아야 할 때면 속옷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잠시 더듬고는 5마오권 아니면 1위안권을 꺼냈는데, 지폐의 크기 차이로 만져서 구분했다. 여자들은 현금을 꺼내기 위해 으슥한 곳을 찾았지만, 어떤 남자들은 거리낌 없이 뻔뻔하게 속옷 안을 뒤졌다.
중국 상하이의 푸동 금융 지구.
그리움의 길로 방향을 틀어 보면, 내 고향 하이옌(海岩)이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하이옌현의 총 인구수는 30만이었고 그중 8000명만이 현 소재지에 살았다. 지금 지역 인구는 38만 명인데, 그중 10만 명이 현 소재지에 산다. 도시화는 숱한 문제를 낳았고,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한 후 겪는 일도 그런 문제 중 하나다. 지방 정부들은 어마어마한 도시 팽창 프로그램을 이행하기 위해 대규모로 농지를 매입했다. 농지 일부는 투자를 유치하고 공장을 짓고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산업용으로 배정했지만, 대부분은 높은 가격을 받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매각했다. 그 결과, 한때는 작물만 자라던 곳에 이제는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무수히 솟아난다. 시골에 있던 농지와 집을 팔아야 했던 농민들은 지방 정부에서 보상으로 제공한 주거지로 ‘올라간다’. 부유한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아파트 세 채나 네 채를 보상으로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 그들은 한 아파트에 살면서 나머지 두세 채에 세를 놓는다. 또는 상당량의 합의금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이 도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익숙한 노동에서 단절된 그들이 할 만한 새로운 일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어떤 이들은 택시 운전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작은 가게를 열지만, 그 외 사람들은 빈둥거리면서 하루 종일 마작을 하는가 하면 도박장에 다니다가 모든 것을 잃기도 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주택 단지에 정착할 때마다 도박단들이 따라간다. 정부에서 보상금을 주고 나면 주민들에게 현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도박장 개설이 금지되어 있지만, 무면허 도박단이 커다란 여행 가방 몇 개에 도박 도구를 채워 넣고 새로 생긴 동네들을 다니며 감언이설로 이주 농민들의 집에 들어가는 사태를 막지는 못한다. 도박단은 오늘은 여기에 도박장을 차렸다가, 내일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며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인다.

농민들이 떠나온 곳 ― 강제로 팔리기는 했지만 아직 철거되지 않은 시골집들 ― 의 상황은 어떨까. 농민들은 집과 땅을 지키기 위해 개들을 키우곤 한다. 도시로 가고 나면 집 지키는 개가 필요 없으니 개를 두고 간다. 그래서 텅 빈 채로 잡초만 무성한 농가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버려진 개들이 충직하게 계속 보초를 서며, 이쪽저쪽 뛰어다니고 높은 지점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희망에 불타는 눈으로 과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가슴 아픈 장면들을 보게 된다.

과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늘날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둘 중 보다 널리 퍼진 유형은 가난한 사람들의 갈망을 반영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로 올라선 중국의 상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혜택을 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끝없이 가혹한 삶만 계속된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때도 가난하기는 했지만 아직 ‘실직’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진정한 의미의 부유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 부모님의 수입이 합쳐서 120위안이었는데 마오의 월급은 404.8위안에 불과했다.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았고, 사회 불평등은 제한적이었다.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는 다른 형태의 그리움이 퍼져 있는데, 이들은 한껏 높이 올라간 만큼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 나에게 상하이의 엄청난 부자와 나눈 대화를 알려 준 사람이 있는데, 이 부자는 뇌물 수수를 비롯한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해 극빈자에서 백만장자로 변신한 사람이다. 곧 체포되어 긴 수감 생활을 하게 될 처지를 깨달은 그는 고상하고 널찍하며 호화로운 자기 사무실의 통유리창 앞에 서서 까마득히 아래에서 새로운 마천루의 토대를 세우느라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건설 노동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 순간 얼마나 그 노동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일이 힘들고 봉급이 낮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그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살 필요가 없었다. 겨우 얻어 낸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예감하는 이런 사람들은 화려한 경력 전체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과거를 되찾고 싶어 한다.

과거가 정말로 돌아온다면, 그러니까 쌀을 사려면 곡물표가 필요하고 식용유를 사려면 기름표가 있어야 하고 옷을 사려면 면표가 있어야 하며 물질적인 결핍이 심각하여 모든 물자가 배급으로 제공되었던 그 과거가 돌아온다면, 과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할까?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과거를 애타게 그릴 때 그것은 이성적인 바람이 아니다. 그저 감정을 터뜨리는 방법이고, 현재 중국의 현실에 대한 불만에 뿌리내린 좌절감을 말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정부나 기업에서 성공했으나 이제 철창 안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을 알고 과거를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경우, 그 감정은 그저 아쉬움과 후회에서 솟아나는 마음일 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이런 난장판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유행한 농담이 떠오른다. 이 사회의 부당함에 대한 농담이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갖고 싶어!”라고 말하는 예쁜 여자는 반지를 얻지.
“난 예쁜 여자를 얻고 싶어!”라고 말하는 부유한 남자는 예쁜 여자를 얻지.
나는 말하지. “샤워를 하고 싶어!” 하지만 물이 없다네.

마지막 줄의 상황은 내가 직접 겪어 보기도 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샤워 중에 물이 끊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누칠을 하자마자 끊어지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지막 몇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눈을 헹궈서 쓰라림을 덜기 위해 머리를 들어 올린 채 주먹으로 수도관을 두드리는 것뿐이었다.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에 대해서는,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하늘이 내 편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에는 누구도 샤워 중에 물이 끊기는 일을 사회적인 불의로 보지 않았다. 지나간 그 시절에는 부자라곤 없었고, 그러니 예쁜 여자들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얻는 일도, 부유한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얻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미래를 대변한다고 한다. 끝으로, 세 세대의 중국 소년들이 지닌 인생관을 통해 지난날 중국의 궤적을 쉽게 요약해 볼까 한다. 이 아이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주 다른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문화혁명 기간에 자란 소년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혁명과 투쟁.”
1990년대 초, 경제 개혁이 10년을 넘어선 시기에 자란 소년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직업과 사랑.”
오늘날의 소년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과 여자”라고.


* 《The Guardian》 원문 보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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