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4화

누가 더 불안한가

불안은 디폴트 값, 그 속에서 찾은 편안함


지망생들은 고통과 우울을 반복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문제는 부차적이라 할지라도 지망생들의 불안함을 자극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떻게 ‘별로 불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이미 불안이 ‘디폴트(default) 값’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망생들은 오랜 기간 불안에 파도를 타듯 대응하며 익숙함을 넘어선 일종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불안하지 않다는 대답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먼저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지망생도 있었다.
 
태식: 그렇죠. 지금쯤 되면 그 불안감을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별로요. (불안했을 때가) 별로 없었어요.

‘과거에는 불안했으나 지금은 불안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지망생들도 있었다. 지망생의 삶에 진입하기 전에는 두려웠지만, 막상 마음을 먹고 진입하니 그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주현, 소영, 현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현: 20대 후반에 되게 힘들었는데 이제는 조금 안정기에 들어와서. 서른 넘어가면 불안한 게 좀 없어지는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고. 근데 저는 어떤 확신 같은 게 생겼어요.

소영: 한 3개월 전만 해도 굉장히 막막하고 불안하고 고민이 컸는데,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른 생각을 정리했어요. 이제는 취업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굳힌 상태예요.

현우: 나는 할 만한데, 보면 항상 선배들이 겁을 줘요. “눈 감아 봐, 눈앞이 깜깜하지? 그게 네 미래야.” 그런 거. 근데 실제로 하고 있으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아요. (…중략…) 이제 2년 이상 지속하다 보니까 그냥 무덤덤해요. 대학생 때는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졸업하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막상 영화 현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사니까 저는 오히려 더 좋더라고요. 어느 정도 불안은 있어도 제가 한 선택에 한 번도 회의를 느껴 본 적은 없어요.

세 명의 지망생들은 모두 과거에 영화판의 불규칙한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두려워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주현은 현재 안정기에 들어왔고, 소영도 지금은 평화롭다고 말하며, 현우는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이들은 이미 극대화된 불규칙한 유동성을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영화판에 진입했기에, 육지에서 서 있다가 배를 타기로 결정한 사람들과 같다. 배에 오르기 전 육지에서 배가 풍랑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지고 겁을 먹게 된다. 하지만 실제 배에 오르면 흔들리는 상태가 기본 값이다. 항상 흔들리고 있기에 그 흔들림에 둔감해진다. 이들에게 이제 흔들리지 않는 상황은 포기한 옵션이다.
 
소영: 결혼? 이런 건 불안하지 않아요. 영화를 계속한다면 어떤 것들은 옵션에서 없어져요. 사실 둘 다 하고 싶은데 불가능한 거죠. 어차피 자기가 원하는 걸 하려면 뭔가를 포기해야 하고. (포기한 건) 안정적인 생활 자체 아닐까요? 뭐랄까. 저는 지금 안정적 생활에 대해 그렇게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죠.

불안정성은 때로 역전되기도 한다. 지망생들이 불안정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이다. 몇몇 지망생들은 영화판의 불규칙한 유동성에서 느끼는 불안정성보다, 영화를 떠나 다른 일을 하면서 사는 삶에서 더 불안함을 느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런 인식 체계에서 불규칙한 유동성과 불안정성은 역의 관계로 성립하고 있었다.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안정성을 담보로 하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윤아: 안 하면 어쨌거나 후회할 것 같고. 그냥 그런 거죠. 인생 뭐 있나. (웃음) 잘살면 얼마나 잘살겠나 싶어요. 막연한 얘기일 수 있는데, 세상에 없는 거 하나 만들어 놓고 그런 거에 작게나마 보람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인생이 뭔지, 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으면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꽂혀서 사는 거죠. 액세서리일지도 모르는 다른 것들 때문에 사는 시늉을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 대답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을 잘 드러낸다. 윤아는 안정성이라는 액세서리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삶을 거부한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는 없는 것이 액세서리다. 영화가 아닌 다른 안정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불안정하더라도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뜻이다.

윤진: 자유롭고 여유 있게 살고 싶어요. 좀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대신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여행 가고 싶은 욕구도 별로 없고. 남들이 이거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전혀 없어요.

한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똑같이 있어요. 가치관 차이인 듯해요. 불안하지만 그걸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닌 사람들도 있어요. 영화 그만두는 사람은 다 불안으로 그만두잖아요. 남들은 좋은 차 타고 싶고, 좋은 옷 입고 싶고, 여자 친구랑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 하는데 저는 그런 욕심이 없어요. ‘버스 타고 다니면 되지, 차 안 사면 되지, 왜?’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영화감독이 될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부자들이 영화감독이 많이 된다고 하는데 그건 일부분이고,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영화감독 지망생이 되기로 마음먹은 지망생들에게는 자유롭게 영화를 하는 것이 최우선의 가치였다. 이 자율성을 얻은 대가로 그 외의 안정성에 대한 미련은 남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아주 나중의 옵션으로 미뤄 두었다. 물론 이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기까지 단 한 번도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현빈: 불안하죠. 항상. 불안하지 않으려고 뭔가를 자꾸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커피를 마시면 좀 괜찮아져서 커피를 계속 마시고. 카페인 중독이어서 카페인에 빠지면 그게 더 심해지고.
(평상시에 불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시는 거예요?)
생각한다기보다 느껴지죠. 베이직한 감정은 항상 불안해요. 그걸 자꾸만 없애려는 과정이죠.

현빈의 경우 다른 지망생들보다 불안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그러한 상태를 ‘베이직’하다고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평정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한울은 “불안해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고, 다짐하고, 되뇌고 살아간다”고 부연했다. 준성의 경우 영화 일을 하기로 결심하기 전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했던 적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무척 우울했고 불안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디폴트 값은 끝없는 번뇌 끝에 내려진 심리적 결단과도 같았다.

준성: 너무 쪽팔렸어요. 하루하루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사실 겉으로 허세만 부리는 빈껍데기인 걸 아니까. 그러다 보니까 눈물도 많이 흘렸고 우울증도 걸렸어요. 문득 돌아보니 너무 비겁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00만 원도 못 버는,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억지로 병행해야 하는, 그렇게 절박하게 살아가는 애들인데도 걔들은 돈 같은 게 아니라 꿈을 좇고 자기 삶 찾아, 행복 찾아서 가는 애들이니까. 만나면 내가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게 들킬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왜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살아요?


보통의 삶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것들을 ‘액세서리 같다’고 표현하는 그들의 선택이 다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꿈이나 행복을 이야기하는 그들이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망생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창의 노동의 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선택은 단순히 영화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윤아: 40대 중후반만 해도 예전에는 한창인 나이였는데 이제는 어느 직업이든 회사에서 나갈 시기고. 50살도 되기 전에 대부분 쫓겨나잖아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영화판의 불안정성이 더 큰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즘에는 그냥 뭘 하든 다 힘들다고 생각해서요. 어디든 철밥통은 없고. 진짜 공무원 말고는.

한울: 제 가치관이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원래 불안하잖아요, 어떤 일을 해도. 제 주변에 자기 일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이 너무 많아 가지고 ‘결국엔 다 똑같네, 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암울한 얘기지만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게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남들 다 공무원이 좋다, 좋다 하잖아요. 저는 이해가 안 가요. 결국 빚지고 사는 건 다 똑같거든요. 영화를 하나 공무원을 하나. 그럴 거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배고픈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아와 한울은 영화감독이 아닌 직업들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장을 구해도 금방 퇴직하고, 통상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직업으로 꼽히는 공무원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이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이미 불규칙한 유동성이 극도로 심화되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가지든 돈을 벌 수 없고 불안할 것이라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낫다고 설명했다. 본인들 나름의 현실적 인식을 통해 선택을 내렸기에 불안정성에 여러 차례 흔들리면서도 편안한 상태일 수 있었던 것이다. 준성은 한 발 더 나간 대답을 들려줬다.

준성: 지금도 아빠는 항상 불안해하죠. 좋은 대학 나와 가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다른 걱정 없이 그냥 주는 돈 꼬박꼬박 받아 가며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가면 되는데, 왜 성공할지 알 수 없는 길에 뛰어드느냐, 항상 불안해하시죠. 그런데 저는 불안하지 않아요. 되게 자신 있거든요. 주변에서 불안해하는 게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요. 왜 불안해하는지 이해는 돼요. 정해진 길이 있는 일반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알고. 하지만 별로 인정하지는 않아요. 그런 기준이라면 모든 삶이 다 불안할 것 같은데?

준성은 다른 직업도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도리어 “그런 기준이라면 모든 삶이 다 불안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소위 일반적이라는 삶을 좇는 사람들이 지망생들보다 더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다.

“불안하면 못 하죠”, “별로 안 불안해요”와 같은 대답들이 많이 나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정면으로 불안정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안정성에 친숙했고, 불안정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준성의 말대로 오늘날 모든 삶은 불안하다. 영화판을 택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도 여전히 불안하다. 해가 지나면 뒤쳐질까 봐 무섭고 일반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날까 봐 두렵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보통의 삶’도 불안한데, 그들은 얼마나 불안할까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 그들은 묻는다. “그렇게 사나, 이렇게 사나 다 불안한데 왜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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