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5화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지망생의 삶


지망생들이 감독이 되기까지 거치는 과정은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영화인 집단은 폐쇄적이어서 접근이 힘들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지망생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과정에 무관심해서다. 영화를 잘 팔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는 사람은 많지만,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과정과 그 속에서 일하는 구성원에 대한 관심은 적다. 대중 매체에서 유명한 감독들의 인터뷰는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의 무명 시절이나 첫 영화 촬영과 같은 과거는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영화감독 지망생의 삶은 낯설고 흐릿하며 잘 상상되지 않는다. 10년에 가까운 긴 시간 계속 진행 중인 상태에 있어야 하는 이들은 무엇을 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이들이 감독이 되기 위해 자신을 단련해 가는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작가의 조건


감독 지망생들이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은 작가다. 우리나라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의 형태로 감독 데뷔를 준비한다. 이는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영화 산업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작가 과정과 영화감독 과정이 분리되어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집필에, 감독은 시나리오의 영상화에 집중하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아 영화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다.[1] 이런 문화 산업의 공백을 메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감독 지망생들이다. 신인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입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 시나리오가 여러 경로를 통해 투자사에 채택이 되면 영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우리나라 지망생들은 감독이기 전에 작가여야 한다.

작가로서의 능력을 키우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혼자 진득하게 앉아서 소재를 찾고, 구상을 하고, 글을 쓰고 지우길 반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큰 불안 요소인 지망생들에게 어쩌면 가장 막연하고 고된 과정이다.

감독 지망생들의 시나리오 작업 과정은 공통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될 수 있었다. 먼저 창작을 위한 양분을 쌓는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 지망생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인문학적 내실을 다지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자극을 받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지면 시나리오 구상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는 ‘멍 때리기’, 자신만의 시각 만들기 등 세부적인 과정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실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지망생들은 이성적으로 이야기와 주제를 조율하고, 감성적으로 몰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모든 과정의 성장과 결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능력이 향상되고 있는지 어슴푸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주현: 인문학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찾아내는 건데 인문학 공부는 그걸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여행도 좀 다니고. 작법서도 많이 읽고. 계속 연습했죠. (하고 싶은 얘기를 찾기까지) 정말 몇 년 걸리는 것 같아요. 최소 2년 정도는 걸리는 것 같아요.

지망생들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가장 먼저, 양분을 쌓는 단계를 밟는다. 이 단계에서 지망생들은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데 직접적, 간접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기르고 궁극적으로는 작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고민한다. 영화를 찍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찾아내는 것이 감독 지망생들에게는 핵심적인 문제다. 양분을 쌓는 단계는 단순히 공부를 하는 시기가 아니라 입봉 작품의 방향을 큰 틀에서 정하는 시기이다.

지망생들은 창작의 근원을 쌓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출발점은 인문학이었다. 지망생들은 당장 생산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할지라도 시간을 들여 인문학 공부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 체호프의 희곡 같은 고전 작품을 읽거나, 미술사나 철학사 원론을 읽었다. 고전이나 원론은 혼자서 읽어 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몇몇 지망생들은 인문학 특강을 찾아 듣거나, 스터디 모임에 참가하는 등 자발적으로 강제적인 장치를 동원했다.

소영: (스터디 모임에서) 고전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항상 만나면 다 같이 책을 소리 내서 읽어요. 《서양 철학사》 같은 두꺼운 고전이나 원전은 혼자 못 끝내잖아요. 같이 읽으면 재미있는 게, “이게 무슨 얘기야?”, “이건 아닌 것 같지 않냐?” 하고 토론의 장이 열려요. 그런 식으로 《꿈의 해석》, 《변신 이야기》, 《국가》 같은 고전들을 독파해 나갔어요.

지망생들은 내실을 쌓기 위해 학문적 공부 외에도 예술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찾고 있었다. 다양한 작품을 보면서 창작에 대한 영감 혹은 동기를 얻는 일, 즉 자극받기는 지망생들의 시간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결국 대부분은 뭔가를 그냥 보고 있는 행위다.

영화 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을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 여러 분야의 작품을 보면서 ‘덕질’하는 것도 자극이다. 이런 행위는 보통 생산적인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만화책을 보는 것은 휴식을 취하거나 노는 행위로 여겨진다. 하루 종일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지망생들의 창작 활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현우: 주로 한국 단편 소설을 많이 읽어요. 단편 소설이 좋은 게, 단편 영화랑 되게 비슷해요. 똑같이 경쟁이거든요. 문단에 이상문학상 같은 상들이 많은데, 그걸 다 뚫고 올라온 작품들이 책으로 나오잖아요. 읽다 보면 소름이 돋는 작품들이 있어요. 진짜 문장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경이롭다고 해야 할까.

현우의 경우 자극을 받는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창작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먼저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파악할 수 있고, 작가들의 전략과 시각을 배울 수 있다. 특히 단편 영화, 단편 소설은 지망생들보다 한발 앞서 데뷔한 이들의 발자취를 보여 준다. 좋은 작품이 주는 감동, 소름 끼치고 경이로운 감정은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밖에서 보기에는 노는 것 같아 보이는 과정은 매분 매초가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지망생들이 끊임없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통찰이나 창의적인 능력은 적정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망생들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많은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갖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윤진: 책도 대학 졸업하고 나서 많이 읽었어요. 불안하니까. 졸업 전까지는 책 한 권도 안 읽다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지금밖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계속 읽는 거예요.

수빈: 슬럼프 빠질 때는 몇 달간 못 쓸 때도 있죠. 무기력증 때문에 하루에 세 번씩 자고 그럴 때가 있어요. 예능도 재미없고. 그런데 이제 이런 기간에는 대신 책을 좀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억지로. 극장 가서 영화 보고. 그래야 자극을 좀 받으니까.

준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라 가만히 있으면 너무 무서워요. 영화는 하루에 한 편 이상 안 보면 너무 불안하고, 소설을 좋아해서 맨날 도서관 가서 책 읽기도 하고. 한마디로 덕질하는 거죠. 그런 시기에 덕질을 다양하게 많이 했어요. 나름대로 어학 공부도 하고 없는 사비 털어서 여행도 가고. 이런 시간이 쓸데없고 노는 것 같아도 큰 자산이 돼요. 사실 그러면서 순간순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고 자괴감, 자책감이 들기도 하는데, 이걸 견디는 게 제일 어려워요. 이런 게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있는데 아무래도 세상의 법칙이 있으니까. 그걸 잘 견디면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망생들이 홀로 견디는 시간에 고난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길게는 10년씩 걸리는 지망생 기간 내내, 쉬지 않고 무언가를 쓰고 만들 수는 없다. 자극받기라는 행위를 잉여 시간으로 여기는 시각이 대부분이지만,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풋(input)에 들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자극을 받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시나리오 소재를 찾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소재를 찾는 일은 ‘영화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으로 소재를 물색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영화를 찍는 것을 전제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책을 보거나 작품을 감상할 때뿐 아니라 지망생들의 일상에서 거의 항상 일어난다.

준호: 소재는 미리 준비해 놓죠. 지금도 트리트먼트[2] 세 개를 써 놨어요. 그중에서 고민을 해보는 거죠. 이 기간에 어떤 걸 쓰면 좋을지, 내가 지금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게 뭔지, 제일 흥미가 가는 게 뭔지. 여러 개 묵혀 뒀다가 내가 본격적으로 뭘 써야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쭉 보면서 하나를 골라요.
(트리트먼트는 언제 쓰시는 거예요?)
평소에요. 매일매일.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하기도 하고 그런 식이에요.

윤아: 아이템이요? 그냥 뭘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뉴스나 소설이 제일 큰 것 같아요. 캐릭터 잡을 때도 거기서 시작되고. 아예 맨바닥에서 (소재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는 게 아니라 뭔가를 보고 모티브가 생기죠. ‘아, 이런 사건이 있네?’, ‘여기에 관련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다 나중에 다른 에세이나 소설을 읽다가 어떤 캐릭터가 있으면 ‘어? 이 사람 왠지 그 사건이랑 관련 있을 법한 성격이다’ 이러면서 발전시키고.

대부분은 시나리오 구상과 작성의 시간 배분을 7 대 3 정도로 구성하고 있었다. 구상하는 단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지망생들이 실제로 시나리오를 쓰는 시간은 양분을 쌓는 과정까지 감안하면, 전체 작업의 절반도 안 된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과 더불어 인물 관계, 인물 특징 하나하나에 대한 치밀한 구상이 끝나야 비로소 빈 화면에 써 내려갈 수 있는 내용이 생긴다.

구상 단계에서 필수적인 것이 머릿속의 생각을 비우는 시간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려면 먼저 복잡한 머릿속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멍 때리기는 사실상 그들이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첫 전략이었다.

진우: 여섯 시간 동안 계속 (시나리오를) 쓰기는 어렵죠. 그러니까 내 말은, 다 밀어내고 정말 가만히 앉아 있는 과정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작업의 과정이라는 거예요. 여섯 시간 중 정말 글 써 내리는 시간이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것도 안하고. 한글 띄워 놓고 타자기 두고 가만히 그것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그게 하루에 최소 대여섯 시간은 되어야죠. (멍한 시간을 참지 못하고) 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을 하거나 핸드폰을 만지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도움이 되든 안 되든, 글을 쓰는 힘을 만들어 주지 않아요. 오히려 흐름을 망가뜨리지.

윤아: 그냥 머리를 비워요, 일단. 앉아서 아무 생각이 안 나면 걸어 보고. 걸어서 안 나오면 다시 앉아 보고. 안 되면 영화를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책을 읽어 보고.

수빈: 글쎄, 어디서 찾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무의식, 그러니까 무의식에 있는 무언가를 막 끄집어내려고 애쓸 때가 있어요. 진짜 온 힘을 다해서 하나만 생각나라, 생각나라, 이러면 나오긴 나와요.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멍하니 한두 시간 정도 있어야 해요.

지망생들은 머리를 비우고 그 자리를 오로지 시나리오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 넣는다. 지망생들은 이 과정을 ‘머리를 비우기’, ‘아무것도 안 하기’, ‘멍하니 있기’와 같이 표현하고 있었다. 일종의 모드(mode) 변경 과정이다. 누가 가르쳐 줬거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 과정을 필수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여섯 시간 내내 아이디어를 쏟아 낼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에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비우는 시간이 생산성과 창의성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가 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Marcus Raichle)은 자기공명영상(MRI)과 양전자단층촬영(PET) 기법을 이용해 멍하니 있을 때 유난히 활발해지는 뇌의 영역을 발견했다. 그가 디폴드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DMN)라고 이름 붙인 이 영역은 뇌의 주요 신경망들을 연결하는 신경 회로다. DMN이 활성화될 때 우리는 의식, 무의식 중 뇌의 단편들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서로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창의적인 조합이 만들어진다.

이는 생각보다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핸드폰이나 컴퓨터에서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을 차단하고, 비어 있는 시간을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 별것 아닌 일 같지만 막상 시도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한두 시간이라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뇌를 쉬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창의적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특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한울: 제가 요즘에 하고 있는 게 있어요. 하루에 세 시간씩 초집중을 하죠. 최소한 그 시간은 나한테 초집중해서 할애하자는 의도로. 제 주위에 저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들을 보면 창피한 거죠. 하루에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만 열두 시간씩 채우더라고요. 영화감독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거의 반, 하루에 여섯 시간이라도 그래야 하는데. 근데 그러는 영화인들이 몇 명이나 될까? 제가 봤을 땐 별로 없어요. 다들 영화 봤다, 책 읽었다, 그걸 공부했다고 하죠. 저는 책상에 앉아서 창작하는 시간이 몸에 습관처럼 배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 시간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정도는 멍하게 앉아 있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쓸지 저런 이야기를 쓸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울은 얼마나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집중하는지가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지망생들은 작업 결과를 즉각적으로 얻을 수 없기에 일상적 과제들을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의무와 목표가 흐려지기 십상이다.

집중 모드로 변경됐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시각을 만들어 내는 일에 돌입해야 하는 시기다. 자신이 정한 소재나 대상에 대해 심도 깊게 자료를 조사하는 기간이다. 시나리오는 아이디어만으로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생각에 깊이를 더하고, 실제로 소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상상에 현실성을 더해야 한다. 자료 조사와 관찰을 거쳐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나서야 작품의 뼈대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시각 만들기에 돌입하면 지망생들은 이 기간만큼은 일상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시나리오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해 나간다. 지망생들은 자신이 그려 내고자 하는 대상에 놀라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윤아: 뭐 하나와 관련된 걸 써야겠다 싶으면 그 기간에는 항상 그 하나의 초점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 같아요.
(그 기간이 어느 정도예요?)
기간이요? 좀 애매하긴 한데 보통 시나리오 완성 전까지는 계속해요. 완성 못 하면 계속 생각해야 하고요. 생각을 계속해서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이 인물은 어떤 캐릭터일까. 주변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뭐, 엄마랑 있으면 무슨 얘기를 할까. 그런 거를 계속 구체화하는 수밖에 없죠.

주현: 레퍼런스는 관심을 갖고 보다 보면 여기저기서 나타나죠. 트위터를 보다가도 나타나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도 나타나고.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너무 많으니까 인터넷 검색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도서관에도 가고.

한울: 논문을 많이 찾아봐요. 국회 도서관을 굉장히 자주 가요. 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어서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종교 같은 주제. 그런데 논문 몇 편만 봐도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져요. 논문에는 남들 다 하는 뻔한 생각 말고도 다양한 시선들이 많잖아요. 저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게 공부한 사람들이 적어 놓은 게 있으니까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부분이 입체적으로 풍부해지고. 그런 걸 많이 활용하는 편이에요.

인터넷 자료 조사, 논문 검색, 도서관 방문 등의 문헌 검토, 인터뷰까지, 흔히 학자들이 연구할 때 거치는 과정과 비슷하다. 연구자가 하는 작업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말하자 지망생들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몇몇 지망생들은 마치 질적 연구를 하듯 현장에 직접 찾아가 참여 관찰을 하기도 했다. 대상을 직접 관찰하면서 이해를 넓히고, 현장에서 얻은 디테일로 시나리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현우: 안락사를 엄청 많이 공부했어요. 다큐 다 찾아보고. 책도 읽고 하다가, ‘아, 이걸로 졸업 영화 찍어야겠다. 이거다.’ 그렇게 정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장편 영화를 찍었어요. 근데 졸업 영화를 갖고 갔더니 교수님이 엄청 까는 거예요. 네가 뭘 아냐고. 어떻게 하나, 하다가 남들은 취직 준비할 동안 저는 3개월 내내 봉사 활동을 했어요. 목요일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 다리 주물러 드리고 집에 와서는 시나리오 쓰고. 그렇게 하면서 작업을 했어요.

윤진: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까, 아이가 아이답게 나오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 바로 앞 카페를 찾아가서 작업했어요. 거기서 하굣길의 애들은 뭐 하는지 보고. 얘들이 실제로 하는 말로 대사를 써야 하니까, 어떤 말을 주로 하는지 가장 중점적으로 듣고.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무슨 단어를 쓰는지. 몰래 막 적고. (웃음) 그런 과정에서 할 얘기가 구체화되는 것 같아요.

소재에 대한 시각을 만들고 나면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성 단계로 넘어간다. 시나리오 작성 과정에서 지망생들은 이성적으로 이야기와 주제를 조율해 나간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이성과 감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긴장을 요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는 주로 감성적인 능력이, 주제를 만들어 가는 데에는 이성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소영: 이야기가 있고 주제가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별개예요. 내가 어떤 주제를 쓰고 싶어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다 풀고 나면 내가 생각했던 주제가 아닐 때가 있어요. 이야기는 아는 만큼만 나오는데, 제가 이 주제를 생각했던 것보다 잘 알지 못한 거죠. 이야기와 주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행착오를 계속 반복해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제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배워 가요. ‘아,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이게 아니구나. 다른 이야기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현우: 구조 만드는 건 머리를 쓰는 거잖아요. 인물 관계나 주제를 만들기 위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쓴다고 주제에 연결될 순 없죠. 보통 글 쓰는 사람들이 가장 처음 실수하는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길 가다가 무언가를 보고 이미지상으로 되게 그럴 듯한 게 떠올랐어. 이 사람이 이러면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 그렇게 쓰기 시작하면 주제에 절대 닿을 수 없어요. 진짜. 절대로. 한 달 동안 틀어박혀서 써도 안 나와. 만약 그런 식으로 주제를 만들면 억지로 퍼즐을 맞춘 게 다 보인단 말이에요.

지망생들은 시나리오 작업을 설명할 때 시나리오의 스토리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인 것처럼 설명하곤 했다. 이야기가 나타내는 바와 자신이 전하고 싶은 바가 별개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망생들은 이야기의 생명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야기 구조와 인물 관계 설정부터 시작해,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조율은 계속된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는 조율을 멈추고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작업해야 하는 장면들도 있다. 이러한 장면을 써 내려갈 때에는 감성적인 영역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전율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대사를 따라 하기도 한다. 쓰는 사람이 이야기에 빠져들어야 보는 사람도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수빈과 현우, 태식은 중요한 장면에서 본인들이 정서적으로 완벽히 몰입해야 관객들도 그 정서를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수빈: 쓰면서 내가 찌릿찌릿한 거 있잖아요. 그렇게 쓰면 무조건 재미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읽혀 봐도 재미있다고 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재미없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재미없으면 다른 사람 중에도 재미있다는 사람이 없어요.

현우: 재미있는 게, 쓰는 사람이 기분이나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면 다 알더라고요. 그니까 제가 울면서 쓰면 보는 사람들도 울어요. 근데 정말 생각 없이 써야지 해서 채우면 지루해지는 거죠.

태식: 정신노동인데, 하고 나면은 육체노동이에요. 예를 들어서 장편 같은 거, 한 신(scene)을 쓰는데 그 신이 되게 텐션(tension)이 강해야 하면 거기에 거의 온 신경을 몰두해요. 어떤 말을 할까, 막 혼자 대사를 말해 보기도 하면서. 그러면 정서적으로도 피로감이 쌓여요. 크리에이티브 활동도 육체적으로 힘든 거 같아요. 뇌도 육체니까.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과정을 넘나들며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한없이 멍을 때리고 있다가도 연구자처럼 꼼꼼히 자료 조사를 해야 한다. 객관적 시각으로 치밀하게 구조를 짜야 하는 순간이 있는 반면 시나리오 속 인물에 빙의되기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많은 작품을 감상하며 다음 소재를 준비하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슬럼프도 극복해야 한다.
[1]
이상범은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의 작가의 위상과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이 차이가 난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 과정의 작가 시스템 작동 과정에 대해 비교 분석했다. 이 연구는 기존의 다양한 자료들을 재분석해 갑으로서의 드라마 작가와는 다르게, 을로서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서술하고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제작사와 계약을 할 때 저작권 일괄 양도를 하는 방식의 계약을 체결하며, 그 이후에 영화가 잘 되었을 때에 어떠한 추가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이상범, 〈드라마작가와 시나리오작가의 구조적 시스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15,  66-82쪽.
[2]
트리트먼트(treatment)는 장소에 따라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 등을 써 놓은 원고다. 장면별로 줄거리를 적은 것이기 때문에, 트리트먼트에 대사만 추가하면 시나리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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