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정치의 종말
완결

합의 정치의 종말

영국 신노동당이 내세운 ‘제3의 길’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쟁 없는 정치’의 꿈이 지금과 같은 분노의 시대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오늘날 영국의 정치는 노골적이다. 브렉시트 지지파와 EU 잔류파가 서로 으르렁대고 있고 연금생활자들은 밀레니얼 세대에 반감을 품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을,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을, 시골의 전통주의자들은 도시의 진보주의자들을 반대한다. 정당 정치는 경멸과 독단으로 특징지어진다. 수많은 정적의 눈에 비친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 영국 노동당 당수)은 과격주의자이고 국가 지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반면 코비니스타(Corbynista)로 불리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당내 비판 세력은 몹쓸 패배자이자 노동당의 배신자다. 상당수 비(非)보수당 유권자들과 하원의원들에게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정권은 금욕에 대한 비도덕적 실험이자 편견에 대한 영합이다.

얼핏 보기에 영국은 모든 근본적 문제에 있어 격동의 1970~1980년대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 소수자 권리, 국가의 규모, 경제 상황, 사회·문화적 가치, 심지어 관련된 정치적 사실의 진위와 선택을 놓고도 격렬히 맞서고 있다. 미국, 이탈리아, 호주 등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부족(部族)화, 단편화되었고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쟁 관계의 파벌끼리는 더 이상 합의는커녕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치적 대립을 싫어하고 대화와 타협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믿는 상당수 유권자에게 작금의 정치적 무질서는 끔찍하다. 베테랑 정치인들조차 진저리를 치고 당혹스러워 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 영국 총리는 2016년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 정치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치 평론가들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거듭 사용하는 형용사가 바로 ‘유독한(toxic)’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 정치가 이렇지는 않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 정치는 역사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평온했고 질서 정연했으며 안정적이었다. 당시에는 바람직한 정부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있었다. 빌 클린턴(Bill Clinton),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 토니 블레어처럼 합의를 추구하고 외견상 실용적이며 눈에 띄게 이념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주류 정당 대부분을 이끌었다. 많은 유권자들이 그들에게 만족한 듯 보였다. 네 명의 지도자 모두 재선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정계는 천천히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였다. 다시 말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대부분이 매년 전년도에 비해 큰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극적이지 않은 정치는 현대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에 뿌리를 뒀다. 저명한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1994년에 쓴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놀라운 신세계: 정치의 새로운 맥락(Brave New World: The New Context of Politics)〉에서 그는 대부분의 사회가 더 세계화, 개인주의화되고 있으며 전통과 부족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지금처럼 자본주의와 전 지구적 환경 위기에 연계되어 있는 유동적이고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는 평온하고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대화를 통해 논쟁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다룰 수 있는 공공의 장’이 있어야 한다. 이념이나 사회 계층, 정당, 기타 이익 집단 사이의 갈등은 과거의 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영국 신노동당(New Labor)은 기든스의 사상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노동당은 그의 사상에 확연히 드러나는 현대성에 매료되었고, 자신들을 교착 상태에 빠뜨리곤 했던 좌우 대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탈출구로 보았다. 기든스는 블레어가 추종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존경받는 사회학자 기든스와 총리직 수행을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했던 젊은 당수 토니 블레어는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제3의 길(the third way)’을 주창했고 이 철학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했다.

제3의 길이 지닌 세계관은 1997년 신노동당의 첫 총선 공약에 녹아들었다. 그 공약이란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영국을 분열시켜 온 (…중략…) 치열한 정쟁을 끝내려 한다. 공공과 민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 간의 갈등은 현대 세계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신노동당 정부는 그 전까지 반목해 온 이익 집단을 통합하고 영국이 직면한 문제를 냉철하게 해결하려 했다. 한마디로 ‘실효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결국 토니 블레어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듬해 그는 제3의 길이 ‘새로운 세기를 위한 새로운 정치’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국민 투표 형태의 내전이 되어 버린 브렉시트 투표, 그리고 당내에서 제3의 길을 가장 완강하게 반대해 온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을 장악한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합의 정치를 믿었던 많은 이들은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 3년 동안 언론과 소셜 미디어는 토니 블레어의 ‘새로운 정치’가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 ― 현대 세계의 문제에 대한 영구적 해결책이 아니라 지나가는 현상에 그친다는 사실 ― 을 인정하지 않는 중도파 정치인, 운동가, 언론인들로 가득했다. 한편 제3의 길에 덜 낙관적이었던 지지자들은 충격의 침묵에 휩싸였다. 기든스가 제3의 길을 다듬는 데 도움을 준 신노동당의 전직 장관은 “내가 지향하는 정치에 재앙이 닥쳤다”고까지 말했다.

정치 문화가 분노와 이념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다시 자극하게 된 데에는 2008년 금융 위기에서부터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 투표, 트위터, 영국 하원의원 활동비 스캔들까지 많은 원인이 있다. 그러나 갈등 없는 정치라는 유혹적인 약속 ―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영국의 실제 상황 ― 이 제3의 길 몰락에 영향을 줬는지에는 큰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갈등 없는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시도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건 아닐까?
 

해결책 없는 싸움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수다. 민주주의 정치는 반드시 당파성을 지녀야 한다.


신노동당이 총선에서 3회 연속 승리를 거둔 2005년, 벨기에 출신의 정치 이론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Political)》라는 짧지만 예리한 저서를 발간했다. 무페는 학계 외부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채 30여 년간 영국에 거주하며 교편을 잡아 왔다. 이 저서의 단조로운 표제 뒤에는 무페가 지난 20년간 가다듬어 온 독창적이면서도 불편한 주장이 숨어 있다.

무페는 급진 좌파의 지지자였지만,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같은 우파 사상가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을 규정했다.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장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보적인 이론가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근원적 실재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민주주의에서는 서로 다른 집단이 경제적 자원과 문화적·물리적 공간을 놓고 경쟁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에는 양립할 수 없는 선택과 ‘합리적인 해결책(즉 객관적인 해결책)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딜레마가 수반된다. 그러한 갈등의 끝에는 단지 일시적인 승리만이 있을 뿐이며, 사회적 또는 그 밖의 변화로 인해 승자와 패자 간의 힘의 균형이 바뀌게 되면 또 다시 갈등이 시작된다.

이러한 해결책 없는 싸움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수라고 무페는 주장했다. “열정을 동원하고 사람들의 욕구와 환상을 이용하기 위해 (…중략…) 민주주의 정치는 반드시 당파성을 지녀야 한다.” 그녀에 따르면 건강한 민주주의에는 ‘사람들이 식별할 수 있는 반대 진영’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정치적 참여를 위해서는 ‘우리’와 ‘그들’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합의를 도출하는 식으로 부족주의를 타파하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어떠한 합의도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페는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의 전형적인 예로 꼽았다. 그녀는 “더욱 성숙한 합의제 민주주의의 여건을 마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노동당이 억제하려 했던 갈등, 또는 애초에 그 존재조차 부인했던 갈등이 예전보다 더 악화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반대 진영은 더 이상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파멸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전반에 걸쳐 “선동 정치와 (…중략…) 정당에 대한 불만, 그리고 민족주의, 종교, 인종 같은 다양한 집단 정체성의 성장을 위한 여건이 무르익었다”고 무페는 경고했다. 특히 그녀는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을 예견했다.

무페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오늘날의 정치 세계를 예측했다. 그러나 2005년 당시 그녀의 책을 읽은 몇 안 되는 독자들은 지나친 기우라고 일축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몇몇 사람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의 모델은 효과가 없다. 영국 정치는 중심을 잡고 있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한 포퓰리즘 정당은 없다’고요.” 2005년 총선에서 영국독립당(UKIP)의 득표율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네, 당신 말이 맞아요. 포퓰리즘 정당과 파멸시켜야 할 적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여건은 이미 갖춰져 있어요’라고요.”

무페는 런던 북서부의 우아하지만 조금은 소박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이 지역은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 고(故) 스튜어트 홀(Stuart Hall) 같은 저명한 좌익 선동가들이 오랫동안 선호해 온 곳이다. 2018년 봄 내가 무페를 인터뷰했을 때 그녀는 합의 정치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자신의 경고가 늦게나마 인정을 받은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2005년에 제가 주장했던 것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죠.” 그녀는 진한 블랙커피를 마시며 거침없이 말했다. 현재 75세의 나이로 여전히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는 그녀는 저서에서뿐만 아니라 직접 만난 자리에서도 말을 돌려서 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과 최근 수년간 중도주의자들이 겪었던 모든 재난에도 불구하고 대립을 지양하는 정치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정치에 대한 열망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 열망은 오늘날 정치권의 혼란이 합리적이며 온건한 사람들에 의해 진정될 수 있다는 기대감의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2018년 4월 무페를 인터뷰한 지 2주 후, 지금까지도 신노동당에 가장 동조적인 영국 일요판 신문 《옵저버(The Observer)》의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러브필름(LoveFilm)의 공동 창업자이자 에드 밀리밴드(Ed Miliband) 전 노동당 당수의 비공식 자문을 지낸 사이먼 프랭크스(Simon Franks)의 주도로 전 노동당·보수당 후원자들로 구성된 부유층 단체가 영국 중도파 정당 창당을 고려하고 있다. 이 단체는 현 정치의 ‘부족주의’와 ‘양극화’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이 주창한 정당은 ‘좌파와 우파 양측 모두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정책 강령’을 갖게 된다고 했다. ‘변화를 위한 연대(United for Change)’라는 강령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합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단조롭지만 고무적이며, 온전한 블레어주의(Blairism)의 느낌을 준다.

언론과 전국 곳곳에서 오늘날 정치 상황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2018년 봄 이후 이런저런 중도파 신당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한편 노동당과 보수당, 의회와 선거구 내에서 여전히 합의 정치를 믿는 이들과 대립을 믿는 이들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벌어졌다. 브렉시트와 코빈주의를 둘러싼 대결 이면에는 더욱 큰 논쟁이 숨어 있다. 민주주의 정치의 풍조와 본질이 어떠해야 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는 인물로 나타내는 것이 블레어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1990년대 초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기처럼 느껴졌다. “자유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 봐야 합니다.” 기든스가 내게 말했다. “(구소련) 공산주의는 그런 식으로 사라졌어요.” 손가락을 튕기며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북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치적 화해가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언론과 학계를 통해 확산되었다. “기든스와 존 롤스(John Rawls) 같은 이들 덕분에 (주류) 정치 이론은 기본적으로 더 많은 합의가 이뤄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뒷받침하게 되었다”고 무페는 회상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극심한 분열을 초래했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전 영국 총리의 임기는 1990년에 끝났다. 1970~1980년대 정계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좌우 대립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1991년 노동당의 자신만만한 신진 하원의원 토니 블레어는 잡지 《마르크시즘 투데이(Marxism Today)》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 정치의 현주소를 살폈다. 그는 격정적으로 써 내려갔다. “정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떠한 생각이라도 가능하다. 새로운 시작이다.”

《마르크시즘 투데이》는 약소 정당인 영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였지만, 1980년대 말 이후 여러 측면에서 제3의 길의 전조라 할 만한 새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야심 차게 노력해 왔다. 그들이 기대한 정치는 독단과 부족주의를 지양하고,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새로운 시대(New Times)’, 다시 말해 지난 20년간 글로벌 자유시장 혁명이 가져온 큰 변화에 적합한 것이었다. 기든스가 그랬듯 《마르크시즘 투데이》 역시 이 혁명을 영구적인 것이라 보았고, 상당 부분이 수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동시에 이 혁명이 초래한 피해에 대한 해결책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시즘 투데이》는 노동당 안팎의 좌파 대부분이 대처주의자들에 비해 세계관과 전략 측면에 있어서 절망적일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탱크 앞에 선 기병대’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노동당 당수를 갈망했다. 편집장 마틴 자크(Martin Jacques)는 토니 블레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있으며,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분석에 적어도 일부는 동의하는 유능한 정치인임을 알아봤다. “나는 그를 뭔가 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크가 내게 말했다. “그는 노동당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죠(블레어의 아버지는 보수당원이었다). 또한 (1993년 섀도 캐비닛의 내무부 장관 재임 당시) 그가 ‘범죄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범죄자들을 엄벌하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을 것(tough on crime, tough on the causes of crime)’이라는 슬로건을 내놨을 때 기존 노동당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블레어는 범죄에 대해 자신이 내건 슬로건에 힘입어 처음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기발하게도 자신을 좌익인 동시에 우익으로 보이게 했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 덕분이었다. 범죄를 이념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단순히 대응한 것이다. 이듬해 블레어는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자신을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는 인물로 나타내는 것이 블레어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2000년 총리 재임 당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젊은 시절) 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노동당 당수와 총리로 지내던 초기 몇 년 동안 블레어의 이런 생각은 또 다른 정치 회의론자 제프 멀건(Geoff Mulgan)의 영향을 받았다. 멀건은 조숙하고 지적으로 참을성 없는 좌익 운동가 출신으로 1970~1980년대 사회주의자 대다수의 파벌주의와 꽉 막힌 사고방식에 금세 싫증을 느꼈다. 이후 《마르크시즘 투데이》와 신노동당에 이끌렸고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그 후에는 블레어의 자문으로 활동했다. 1994년 멀건은 영국에서의 경험, 서구 정치와 사회적 동향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저서 《반정치적 시대의 정치(Politics in an Antipolitical Age)》를 냈다. 이 책에 따르면 대립의 이념은 더 이상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거나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치는 상반된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기술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그는 밝혔다.

같은 해에 기든스는 사회주의의 거부와 20세기의 주요 이념들을 다룬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 The Future of Radical Politics)》를 출간했다. 그는 이념들이 21세기의 환경과 사회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진부하다고 주장했다. 멀건은 노동당의 오랜 지지자인 기든스를 알고 있었고, 기든스를 신노동당 핵심부로 초대해 그의 생각을 나누도록 했다.

두 사람 모두 때로는 도식적이고 조금은 비정한 글을 썼지만 그들의 확실성과 폭넓은 레퍼런스는 영국 의회의 배타적인 문화에 익숙한 정치인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 이들은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는 단도직입적이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1980년대에 멀건은 노동당 지지자들을 위해 투어용 승합차를 몰았다. 기든스의 아버지는 런던 교통국의 사무원이었다. 멀건과 기든스는 의욕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었는데, 같은 성향의 신노동당 지도부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상적인 불화와 야심의 충돌을 배제하고 보다 조화로운 정치를 펼치자는 그들의 비전은 토니 블레어의 기독교 신앙과도 맞아떨어졌다. 블레어는 본능적으로 연정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토니는 끌어들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멀건이 내게 말했다. “그는 항상 ‘모든 사람들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1993년 노동당 소속 기독교인들이 펴낸 에세이집에서 블레어는 자신의 정치가 “모든 인간에게 잠재력이 있다는 (…중략…)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1995년 블레어는 연설에서 캐치프레이즈로 제3의 길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노동당의 특정 정책을 설명하면서 산발적으로 언급하다가 급기야 정부에 대한 자신의 접근 방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더욱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당시 모호한 화법의 달인이었던 블레어는 결코 이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정치 저널리스트들은 이 거창한 문구에 머리를 긁적이거나 키득거렸다. 정통한 평론가들은 제3의 길이라는 용어가 반체제 마르크스주의자부터 이탈리아 파시스트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정치적 통설에 반기를 들려고 했던 이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지난 수십 년간 사용되어 왔다고 심드렁하게 지적했다.

블레어는 신노동당의 참신함과 반대 정당들의 진부함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알맹이라곤 거의 없는 은유적 표현 ‘제3의 길’을 3년 동안 광고 슬로건처럼 사용했다. 1998년이 되자 블레어와 기든스는 이 용어를 더욱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제3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팸플릿과 책을 출간했다. “이 말에 조금은 불편한 과거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했습니다”라고 기든스는 내게 말했다.

블레어가 만든 팸플릿은 힘이 넘쳤지만 초점이 불분명했다. 사회의 가치에 대한 모호한 발언, 그보다는 정확하지만 예측 가능한 ‘근본주의 좌파’를 향한 공격 ― 블레어가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공격 ― 과 ‘조세 정책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경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담하고 새로운 정치적 퓨전이라기보다는 중도 우파의 발언 같았다. 유럽의 기독교민주당들이 할 법한 말이었다.

그에 비해 기든스의 책은 사려 깊고 미묘했다. 합의 정치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정부라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예를 들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금융업계를 견제하고, 실업수당 청구자뿐만 아니라 회사도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그런 결정 말이다. 하지만 블레어와 기든스 두 사람 모두 원칙적으로 글로벌 자유시장을 받아들이고, 실질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두도록 하는 것이 제3의 길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블레어는 영국과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지에서 정기 개최되고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때로는 어느 정도 자축의 의미가 있는 국제 행사에 참석해 제3의 길을 전파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명목상 중도 좌파 정당의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외견상 애매모호한 정치 영역으로 이동해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기든스도 이따금 행사에 참석했지만 최근 들어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 기든스는 내게 “저는 (블레어의) 자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단지 함께 논의했던 구성원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다.

1999년 6월 블레어와 슈뢰더는 신노동당 당사(신노동당은 2년 전 이곳에서 총선 승리를 진두지휘했다)가 위치한 런던의 밀뱅크 타워에서 제3의 길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슈뢰더는 이를 ‘새로운 중도’라고 칭했다). 성명서는 “(유럽) 연합 내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제3의 길은 승리를 거둔 듯했다.
 

서구 국가들은 포스트 민주주의 상태로 가고 있다. 선거는 다 거기서 거기인 정치인들을 돌아가며 뽑아 주는 데 그칠 뿐이다.


2001년에 실시된 차기 영국 총선은 정치적 화합과 균형의 새 시대를 알렸다. 의석수의 95퍼센트가 이전 선거와 같은 정당으로 유지된 것은 거의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신노동당은 1997년부터 지켜 온 다수당 지위를 거의 완벽하게 유지했다.[1]

하지만 두 총선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2001년 총선은 83년 만의 최저 투표율(59.4퍼센트)을 기록했다. 상당수 평론가들과 노동당 인사들은 일방적인 선거의 결과라며 이런 지적을 일축했다. 보수당은 여전히 유권자들이 싫증을 느끼는 대처주의 정책을 제시하고 있었고, 윌리엄 헤이그(William Hague)가 서툴게 당을 이끄는 양상이었다. 신노동당의 데이비드 밀리밴드(David Miliband)[2]는 “보수당의 약세 때문에 투표율이 저조하게 나왔다. 영국 정치는 한 손으로 박수를 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기든스는 이 상황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2007년 그는 인터넷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이른바 ‘일상의 민주화’, 다시 말해 인터넷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는 유권자의 삶에서 선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저조한 투표율이 반드시 정부에 대한 불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제3의 길에 불만족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는 조짐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가 다소 거창하고 야심 차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후퇴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매우 협소했다”고 자크는 말한다. 이념상의 범주가 없고, 경제·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평이 없고, 블레어가 두리뭉실하게 언급한 ‘보수주의의 힘’ 외에 규정된 적이 없는 신노동당의 정치는 빈약했다. 정부는 기능을 수행하고 측정하는 기관이 되었다. 2000년 블레어 정부의 공식적인 ‘우선순위’는 600건에 달했다. 때로 블레어조차 정부의 낮은 자질을 비판했다. 그는 2002년 연설에서 “가끔씩 정부 행위가 기술 분야 전문가의 활동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잘 운영되든 그렇지 않든, 가장 중요한 도덕적 목적이 결여된 활동 말이다”라고 말했다.

제3의 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구 정계의 약점은 정치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피터 마이어(Peter Mair)는 2006년 에세이 《공백의 통치(Ruling the Void)》에서 정치의 ‘공동화(hollowing)’를 지적했다. 유권자들이 그들의 민주주의적 기능을 잃었다는 주장인데, 많은 쟁점들이 신노동당과 외국의 협상 상대들에 의해 사회적 토론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0년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서구 국가들이 ‘포스트 민주주의’ 상태로 가고 있으며 선거는 다 거기서 거기인 정치인들을 돌아가며 뽑아 주는 데 그칠 뿐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제3의 길 정치에 대하여 가장 노골적인 비난은 2006년 보수 성향의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로부터 나왔다. 그는 “지금 정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칠 줄 모르고 떠드는 사람이다. 그들이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타협안을 찾기를 기대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정치는 “가장 형체 없는 괴물이며 (…중략…) 그것이 건드리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순해지고 평범해진다.”

신노동당의 전직 장관들은 그런 식으로 싸잡아서 일축하는 것은 최저 임금제 도입, 북아일랜드의 성 금요일 협정[3] 같은 정부의 수많은 업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불평한다.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말한다. “우리는 야드(yard) 단위로 전진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야드에 사니까요.” 멀건도 의견을 더했다. “비교적 작은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한동안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또한 멀건은 신노동당의 관리주의적인 접근이 당에만 국한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블레어는 부분적으로 사업체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사업체의 세계관이란 점차 진보적이고 세계적인 성향을 띠고, 신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세심한 데이터 수집, 고객 중심 그룹, 효과적인 홍보를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앞서 언급한 무엇보다도 결과, 다시 말해 ‘효과적인 것’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신노동당의 전직 인사들이 정부에 대한 비판에 세부적인 정책으로 자주 대응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들에게는 정책이 정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기업에서도 그렇지만 정부 내에서 대중적 호소의 근거를 역량과 효율성에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대처주의가 초래한 사회 문제 해결 등 블레어의 야심 찬 정책 일부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거나, 아예 실패로 끝나자 유권자들은 크게 실망했고, 신노동당은 감정적 또는 이념적 충성심에 호소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책이 성공을 거뒀을 때조차도 유권자들은 타블로이드 신문의 왜곡 보도 때문에 정책의 성공을 믿지 못하곤 했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신노동당의 구애가 이어지고 블레어의 높은 인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겁을 먹은 초기 몇 년 동안 비교적 공정하게 정부를 평가했다. 이는 신노동당이 일상적인 정쟁을 극복했다는 깊은 인상을 준 휴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초기의 블레어 열풍이 사그라들자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노동당 공격으로 선회했다. 블레어 정부는 그에 따른 피해를 입었다. 2000년대 초 라디오 방송의 전화 연결에 참여한 청취자들은 범죄를 줄이는 일처럼 정부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정부를 비난했다. 제3의 길 이론가와 신노동당 장관들의 눈에 비친 정치는 전보다 평온했을지 몰라도 신문사와 거실에서는 여전히 아주 오래된 적대감과 새로운 불만이 넘쳐났다.
 

2007년 블레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제3의 길이 언급된 횟수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1980~1990년대 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은 선거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주류 정당들이 중도로 결집하면서 생겨난 빈 정치 공간을 포퓰리즘 정당이 비집고 들어왔다. 1994년 기든스는 유럽 대륙의 ‘거리로 되돌아온 신(新)파시스트’에 대해 우려가 담긴 글을 썼다. 1993년에 창당된 영국독립당(UKIP)은 서투른 초기 활동에도 불구하고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16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처럼 확산되고 있는 대립의 정치는 신노동당 내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고든 브라운의 비서에서 하원의원을 거쳐 장관 자리까지 숨 가쁘게 올라온 에드 밀리밴드는 이렇게 회상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외르크 하이더(Jörg Haider)의 (극우) 자유당에 대한 지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아주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형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은 우리가 정부에서 거둔 성취와 선거 제도 덕분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노동당 내의 다른 이들은 제3의 길이 나름대로 포퓰리즘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국민’을 언급하기를 좋아했다. 1999년 노동당 회의 석상에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정계와 영국을 이끌어 온 원로 중진들’을 공격했다. 그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전직 법정 변호사(barrister)였고 그가 이끄는 하원의원들도 과거 그 어떤 때보다 중산층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기성 체제에 반하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1980~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노동당은 영국의 오랜 권력 중심, 가령 ‘시티 오브 런던’ 등으로부터 외면을 받아 왔다. 1997년 총선에서 수백만 유권자들이 노동당에 표를 던진 것은 모호한 반항심에서였으며 오랜 집권 여당을 몰아내고 개혁 정부를 세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블레어 정권이 연장되고 핵심 인물들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이자 신노동당이 지녔던 포퓰리즘 반란군의 이미지는 점차 약해졌다. 신노동당의 한 전직 장관은 노골적이고 관료주의적 말투로 “정부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앗아 간다”고 했다.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정치인 에드 밀리밴드는 2005년 무페의 저서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가 출간되자 이를 읽었다. “제3의 길이 ‘적 없는 정치’를 표방하고 있다는 내용을 봤을 때 ‘무페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제3의 길에는 기업에 좋은 것이 항상 직원에게도 좋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우버 기사에게도 똑같이 한번 말해 보세요! 그런 대립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2000년대 중반 밀리밴드는 신노동당 내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의 인물이었다. 정부 내의 많은 이들이 그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블레어주의는 자기 비판적인 문화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고 정치학자 앨런 핀레이슨(Alan Finlayson)은 지적한다. 그의 2003년 저서 《신노동당에 대한 이해(Making Sense of New Labour)》는 대체로 모호했던 블레어 정부를 다룬 몇 안 되는 연구 사례로 남아 있다. “블레어주의자들은 1970~1980년대 당시 노동당 내 좌우 분열 이후 내부의 비판을 두려워했다. 또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반지식인적인 태도를 보였다. 글로벌화가 마치 날씨와 같다고 믿었으며 현대 세계를 독특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핀레이슨은 지적했다.

위 두 사람의 의견은 신노동당 의원들이 《마르크시즘 투데이》나 기든스의 저서와 같이 자신들을 편애하는 글에서 보고 싶은 것 ― 특히 글로벌화와 대처주의가 영국을 크게 바꿔 놨다는 사실 ―만 보고, 그 글이 잠재적으로 폭력을 촉발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메시지는 무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 기든스는 말한다. “신노동당의 가장 근본적인 결함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통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어 정부가 대외 군사 문제에 개입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동생과 비교해 더 정통적인 신노동당 인물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동의한다. “우리는 글로벌화가 그토록 불공평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중략…) 경제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핀레이슨은 제3의 길이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놓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라는 수사 뒤에 우파적 가설이 숨어 있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비이념적이라고 주장하며 달아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핀레이슨은 말한다. 이념은 블레어주의자들로 이뤄진 당 지도부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고 당내 좌파를 가차 없이 소외시켰다. 신노동당이 맞닥뜨린 역설 ―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중 한 가지는 합의 정치를 만들기 위해 먼저 합의 정치를 믿지 않는 이들을 굴복시켜야 했다는 사실이다.

제3의 길이 현대적인 것, 거의 과학적인 표현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3의 길을 설계한 이들과 열성적인 신봉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구식이었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가치관 또한 청년 시절의 정치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들은 1970년대 들어 좌파가 지나치게 강해졌고 공격적이라는 생각, 1980년대에는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처주의가 영국을 구해 냈다는 생각과 함께 성장했다. 200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97년 노동당이 마침내 정권을 되찾을 때까지 좌파와 우파가 모두 쇠퇴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의 힘이 약하고 은행의 힘이 막강한 나라 영국은 더 이상 좌파를 억제하고 기업을 떠받드는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노동당과 제3의 길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맹신한 나머지 자유시장의 성공 사례로 여겼던 영국이 시대에 뒤쳐졌을 때에도 사상과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또 그들은 좌파가 여전히 갈등과 좌우 분열을 믿고 있는 것이 구태의연하다며 몹시 경멸했다. 그 결과 불안정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타당한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핀레이슨은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화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덫에 걸린 거죠.”

2000년대 중반 신노동당은 제3의 길이라는 표현을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2003년 이라크전과 이를 둘러싼 비참한 서막과 여파, 더욱 확연해진 블레어와 브라운의 불화로 인해 신노동당이 합의 정치를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을 유지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2007년 블레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제3의 길이 언급된 횟수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기든스는 책에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부에서 일할 당시에는 파이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 굳이 어려운 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요즘 들어 전 블레어주의자들은 좀처럼 제3의 길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합의 정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여전하다. 에드 밀리밴드를 제외하면 내가 인터뷰한 그 누구도 코빈이 노동당을 다시 대립적인 정당으로 만든 것이 옳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페가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똑같은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어요. 평생을 바쳐 하나의 이론을 변호해 온 사람들이 ‘내가 틀렸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대체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젊음과 목이 없는 셔츠, 통합 정치에서 1990년대의 블레어를 발견할 수 있다.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마크롱은 프랑스의 모더나이저(moderniser)다!”라며 옹호하는 듯이 말했다. 무페도 여기에 동의하며 “마크롱은 블레어가 했던 일을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임기가 겨우 1년 지난 상황에서 하락하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은 합의 정치가 예전만큼 유혹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오늘날 서구의 분노의 정치가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포퓰리즘은 당선 전까지 인기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멀건은 영국과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분위기가 ‘순환’한다고 주장한다. 1970~1980년대는 대립의 정치, 1990~2000년대는 합의의 정치였는데, 현재는 다시 대립의 정치다. 멀건의 주장에 따르면 각 단계는 결국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즉, 합의가 불편해지면 유권자와 정치인은 불화를 찾게 되고, 대립으로 지치게 되면 양측은 평정을 찾는다. 그의 주장을 확장해 보면 영국 민주주의에 두 가지 유형의 정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성을 지르는 하원의원들과 맹렬한 총리의 모습을 빈번하게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적인 타협’과 ‘절제’를 높이 떠받든다.

하지만 핀레이슨은 합의 정치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정치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라크전과 금융 위기로 인해 중도파는 정당성을 크게 상실했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중도주의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핀레이슨은 소셜 미디어로 인해 정치가 영원히 단편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예전만큼 대다수 사람들에게 좋은 삶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앞으로도 치열할 것임을 의미한다고 했다.

내가 인터뷰한 전직 신노동당 인물들 가운데 낙관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이를 두고 ‘줄어드는 파이의 정치’라고 했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정부에서 일할 당시에는 파이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 굳이 어려운 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제3의 길은 누가 권력과 부를 획득하게 되는지에 대한 아주 오래된, 어떤 점에서는 피곤한, 정치적 질문을 회피했다. 결국 그런 접근은 좋은 시절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런던 북부 아파트의 작은 거실에서 무페는 더 어려운 시기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합의 정치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지 않았다. “큰 싸움은 좌익과 우익의 포퓰리즘 사이에서 벌어질 겁니다. 그 결과 더욱 권위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 ― 법령과 규제 완화에 의한 트럼프식 정부의 확산 ― 또는 훨씬 더 민주적인 새 정치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무페는 코빈의 거대하고도 논쟁적인 노동당에서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무페는 덧붙여 말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즉 갈등은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적의 존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로 되돌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녀는 마시던 블랙커피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나는 그 정도로 낙관적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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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민주주의 #가디언 #세계
[1]
2001년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집권당인 노동당은 전체 659석 가운데 413석을 차지해 166석에 그친 보수당에 압승했다. 노동당 100년 역사에서 최대의 승리로 기록된 1997년 총선(418석)에 비해 5석밖에 줄어들지 않은 결과였다.
[2]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다. 29세였던 1994년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의 당수 토니 블레어의 정책 보좌진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1997년 블레어 정부 출범 이후에는 총리실 정책실장을 맡아 노동당의 ‘브레인’으로 꼽혔다. 30대에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고, 41세의 나이로 최연소 외교 장관을 지냈다. 블레어가 주창한 중도 지향적 제3의 길 노선을 걸었으나 2010년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동생 에드 밀리밴드에게 패했다. 201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노동당의 정치인 에드 밀리밴드는 고든 브라운 전 총리의 재무장관 시절 비서 출신으로, 브라운 정부에서 내각 장관, 에너지·기후 변화 장관을 지냈다. 형과는 달리, 전통적인 좌파 노선을 택했고, 2010년 당수로 취임한 직후 제3의 길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2015년 당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3]
‘북아일랜드 성 금요일 협정’은 1998년 4월 10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버티 아언(Bertie Ahern) 아일랜드 총리의 중재로 북아일랜드 신·구교도 정파 사이에 체결된 평화 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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