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2화

하르키우의 안드레이 ; 방탄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

안드레이 클류치코(Andrii Kliuchko, 32세)는 하르키우(Kharkiv) 북부에 거주하던 IT 계열 종사자다. 전쟁 발발 이후 방탄조끼와 헬멧을 착용하고 민간 자원봉사 단체에 합류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전달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안전한 도피를 돕는 단체 ‘헬핑 투 리브(Helping to leave)’에서 봉사를 이어 가고 있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 도시지만 러시아 국경과 매우 인접한 곳으로, 지역에 따라 아직도 간헐적으로 폭격을 당하고 있다. 안드레이와는 2022년 8월 1일에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전쟁은 갑자기 찾아왔다


소개를 부탁한다.

안드레이 클류치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주(州)에 살고 있다. 전쟁 전 IT 계열 회사에서 시스템 아키텍쳐(system architecture)로 일했고 지금도 계속 근무 중이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3월 초부터는 현지에서 자원봉사를 함께 하고 있다.
안드레이 클류치코 ⓒMaxim Dondyuk
현재 안전한 곳에 있나. 하르키우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전쟁 전에는 하르키우 북쪽에 거주했었다. 3월 이후로는 너무 위험해서 그곳에서 살지 않는다. 전쟁 4일 차에 러시아군이 방어를 뚫고 주택 지역까지 들어온 적도 있다. 주택가 앞 도로에서 전투가 일어났었다. 현재는 하르키우 시내 중심에서 지내고 있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 도시로 매우 큰 도시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상황이 많이 다르다. 안전한 곳도 있고 안전하지 않은 곳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이곳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특히 6~7월은 매일 밤마다 도시가 폭격당했다. 도시의 인프라가 계속해 무너지고 있고 학교, 회사, 창고, 식당, 매장 등이 폭격을 당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르키우는 전선 바로 근처인데 하르키우에 위치한 주민 센터 두 곳이 현재 러시아군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전쟁 전 실제 침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나?

내 주변 어느 누구도 지금 상황처럼 전쟁이 진행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년간 전쟁 상황이 지속되고 있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 크름반도(Crimean Peninsula), 돈바스(Donbas) 지역[1] 등에서 상황이 악화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수도인 키이우(Kyiv)부터 북부인 하르키우, 심지어 러시아와 멀리 떨어진 서부의 르비우(Lviv)까지 사실상 우크라이나 전역에 폭격이 가해지며 침공이 일어날 거라곤 민간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2월 24일 당시 어디에 있었나?

단독 주택인 부모님 집에서 자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반려견들을 데리고 곧장 짐을 챙겨서 부모님이 계신 1층으로 내려가 부모님, 누나와 함께 지하 창고에 임시로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폭격이 시작된 이후 몇 시간 내로 전기와 인터넷을 연결하고, 따뜻한 옷을 옮기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창고에서 지낸 기간은 얼마나 되나?

약 3~4주간 아버지와 그래도 안전하게 지냈던 것 같다. 누나와 엄마, 반려견들과 고양이는 더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자동차를 주고 서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들은 폴란드에 갔다가 지금은 독일에 있다. 아버지와는 3월 말까지 지하 창고에 숨어지내며 가끔 화장실이나 부엌에 갈 때, 혹은 잠시 외출이 필요할 때만 밖으로 나왔다.

새로 지낼 안전한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 하르키우는 폭격 위험이 커서 아버지가 하르키우를 떠나시도록 설득했고, 다행히 아버지도 오래지 않아 가족들에게 합류하셨다. 아버지가 떠나시며 나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숙소를 옮기게 됐다. 하르키우 시내에서 자기 아파트를 에어비엔비(Airbnb)로 렌트하던 친구가 있는데 다행히 그 집이 비어 있었고, 마침 내가 일하던 자원봉사단의 창고가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곧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 현재까지 거주 중이다.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쟁이 시작되고 전기나 수도 등 인프라 시설이 마비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모든 상황이 악화하기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도시가 계속 폭격을 당했고 주민들이 살고 있던 주택 위에도 폭탄이 떨어져 전기가 끊기고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고 난방이 끊기기 시작했다. 시에서도 더 이상 대중교통을 운영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개인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것 역시 안전하지 못했다. 가장 심각한 건 물류였다. 각국에서 들어오는 물류가 끊기고 나니 마트나 매장이 운영될 수가 없었다.

굉장히 절망스러운 순간이었겠다.

도시 외곽부터 시내 중심까지 폭격이 이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르키우는 계속 버텼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고 버려지지 않았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에는 시의 도움이 컸다. 전기가 끊기거나 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 시에서 어떻게 해서든 시민들을 도와 주려고 노력했고 주민들의 신고에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려는 게 느껴졌다. 도시 인프라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는 상황이었지만 가장 위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속 시에서 복원 작업을 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없었나. 그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자원봉사를 할 생각을 했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적 지원이 있다고는 해도 국가나 시에서 도울 수 없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주로 그런 부분을 도맡았다. 사실 자원봉사는 어떻게 보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하다고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막상 닥쳤을 때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만약 그렇지 못한 상황이더라도 위험을 감수한 봉사의 대가로 얻게 되는 과실은 값지다.

그 과실은 자원봉사로 인한 보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정신적 도움이 된다. 우리에게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이겨낼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서로서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곧 도시의 방어 능력을 키워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봉사 활동의 시작은 어땠나? 막상 뭔가를 하려 해도 상황이 마땅치 않았을 터다.

자원봉사를 해야겠다는 것은 일찍부터 마음 먹었고 내 고민은 오히려 어떻게 돕는지에 있었다. 자동차도 가족들을 피신시키느라 이미 떠나보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붙잡고 자동차를 어디선가 구할 순 없을지, 중고차라도 구입할 수 없을지 계속 알아봤다. 다행히 자원봉사를 하던 지인에게 연락이 와 하르키우에서 자동차를 팔려고 내놓고 떠난 사람의 얘기를 해줬다. 전쟁으로 판매가 어렵다고 판단해 자원봉사자에게 기부하겠다고 하셔서 그 차를 쓸 수 있었다. 처음엔 친구와 함께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며 도시 상태를 체크했다.

도시의 상태는 어땠나?

내가 사는 곳은 주코프스키(Zhukovsky)라는 마을이었는데 폭격이 가장 심했던 살토프카(Saltivka) 지역과 도보로 15분 거리다. 주로 북동부 지역을 따라서 교전이 일어났는데, 러시아는 하르키우 북부의 치르쿠니(Tsyrkuny)를 점령해 살토프카를 비롯한 하르키우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살토프카는 길이만 10킬로미터가 넘는 넓은 동네라 지역 내 건물의 파괴 정도가 매우 달랐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은 대부분의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남부로 이동할수록 폭격의 흔적이 조금씩 줄었다. 치르쿠니가 5월에 해방되며 일부 지역엔 슈퍼마켓이 열리고 지하철이 운행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일상을 보내고 한쪽에서는 전쟁이 이어지는 묘한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유독 공습이 심한 지역에 있으니 억울한 마음도 들 것 같다.

복잡한 심정이다. 누군가가 투쟁할 때 누군가는 살아가야 한다. 때때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일상을 되찾은 것을 보면 억울한 마음도 들지만 전쟁 중인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이 하르키우의 위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더 버티고 견뎌야 서쪽 르비우에 있는 우리 지인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하루라도 더 안전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나. 우리 정부군이 하르키우를 버렸다거나 하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효율적인 곳으로 병력을 운용하는 과정일 거다.

 

그들에게 닿아야 한다


주변에 자원봉사자가 많은가?

그렇다. 나만 유일하게 하는 게 아니다. 내 지인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지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자녀의 안전을 위해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도시에 남아서 누구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을 돕고 있다.

각 자원봉사 단체들은 어떻게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나?

우크라이나 사회는 서로 돕는 마음이 강하다. 민간 자원봉사를 중앙에서 통제하는 조직은 없다. 대부분의 자원봉사 단체는 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조직되었다. 그래서 분산되어 있고, 서로를 알아도 활동에서의 교차점이 생기진 않는다. 어떤 팀은 식료품을 어떤 팀은 약품을 어떤 팀은 군사 지원을 어떤 팀은 피난 지원을 하고 어떤 팀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챙긴다. 이 모든 일은 조직적이지도 않고 매우 즉흥적이지만 그럼에도 조화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까지 진행했던 ‘케어박스(Carebox)’는 어떤 프로젝트였나?

케어박스는 각 주소지로 식료품을 배달하는 이니셔티브(Initiative)였다. 크게 세 가지 업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성금 모금, 구호품 구입, 그리고 배달이다. 성금은 해외의 인도적 지원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도네이션(기부금)을 받아 진행했다. 앞서 말했듯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첫 한두 달 동안은 대체로 도시 인프라가 작동되지 않고 식료품점도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르키우 내에서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거의 없었다. 노인이나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나 저소득층에게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음식을 구할 수 없는 분들의 연락처를 모집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신청을 받아서 그분들에게 직접 음식을 배달하는 게 주요 활동이었다. 비교적 더 안전한 도시였던 폴타바(Poltava)나 드니프로 의 마트에서 식료품을 구입해 퀵 배달처럼 전달했다. 당시엔 의약품을 구할 곳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배송 물품에는 의약품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땠나?

도시는 굶주린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집이나 동네에만 갇혀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지인들도 떠난 상태로 불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지냈고 바깥소식도 접하지 못 한 상태였다. 심지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식료품 배달 요청을 한 사실도 몰라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감동하셨던 분들도 있다.
ⓒMaxim Dondyuk
ⓒMaxim Dondyuk
하루에 몇 건이나 배달을 했나?

처음엔 신청 인원수가 많지 않았는데 우리 이니셔티브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원해야 할 인원수가 크게 늘었다. 상황이 가장 악화했을 때는 포장과 배달을 포함해 하루에 80~100건의 패키지를 전달했다.

번아웃이 왔을 것 같기도 하다. 나름의 해법이 있었나?

우리가 돕는 사람들과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일단은 폭격 위험이 심한 곳에 자주 머무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긴장 상태에서 여러 건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배송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분들의 삶을 알면 알수록 감정을 추스르는 게 어려워졌다. 걱정과 슬픔이 밀려오면 집중력을 잃게 되고 초점과 통제력, 안정감을 잃게 된다. 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 지금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만 생각하려고 했다. 기계적이고 신속하게. 지금도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수많은 아픈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그들과 일정 부분 슬픔을 나누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케어박스 활동을 도중에 멈췄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케어박스 활동을 일과로 표현하면 아침에 주소 목록을 받은 후 식료품이 도착하면 안전한 경로를 계산하고, 배달 준비를 마친 운전 기사들에게 나눠 주소지로 배송하는 프로세스다. 배송지가 하르키우에 한정되어 있었을 땐 최적의 경로를 구성해 빠르게 배달하는 것이 이슈였다. 폭격이 이어지던 3~4월에는 도로에 차도 거의 없었고 신호등도 작동하지 않아 배달을 신속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지난 5월에 상황이 바뀌었다.

5월이면 하르키우의 상황이 약간 호전되었을 때 아닌가?

그렇다. 5월 중순쯤부터 많은 사람들이 하르키우에 돌아왔다. 케어박스의 배달도 전반적으로 느려졌다. 지하철이나 대중교통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시에서 이를 무료로 운영했다. 매장이나 식료품점도 다시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이니셔티브의 일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일이 아니게 됐다. 그래서 더 위험한 지역들에 포커스를 맞춰서 외곽으로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케어박스가 아닌 또 다른 자원봉사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새로 참여하게 된 자원봉사 단체는 무엇이고 어떤 활동을 하는가?

군사 분쟁 지역에서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돕는 ‘헬핑 투 리브(Helping to leave)’라는 단체다. 우크라이나인들과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인이 함께하는 기관이다.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된 동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계속 러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유럽 등 안전 지역으로 피난할 수 있게 돕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미니밴(minivan)을 끌고 위험 지역에 가서 피난을 희망하시는 분들을 모셔 온다. 주로 얼마 전까지 점령 상태에 있거나 폭격이 이어지던 곳들이다. 텔레그램 등으로 신청을 받고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사람들에게 최신 정보를 제공하며, 필요한 경우 의료 지원을 하거나 학대당한 여성을 지원할 수 있는 전문가를 연결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보나 드라이버 및 자원봉사자들의 연락처는 팩트 체커 팀에서 확인 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연결하게 된다.
헬핑 투 리브 홈페이지의 소개 글 ⓒhelping to leave
인터넷이 정말 중요하겠다. 전쟁 전의 직업이 자원봉사에도 도움이 됐나?

그렇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힘이 정말 크다. 사람들, 특히 노년층에게 다양한 디바이스의 사용법을 알려 주거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곳에 기술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자원봉사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 역시 IT 관련 직종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운영하고 연락망을 구축하는 프로세스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원봉사에 유리한 지점이 있다. 또 전쟁 전 취미 생활 중 하나가 ‘오토 퀘스트(Auto-quest)’였다. 도시에서 하는 야외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팀을 나눈 후 목적지를 정하고 그 과정에서 목표를 달성하며 계속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는 보물찾기 같은 게임이다. 약 세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 동안 이어진다. 친구들과 이런 게임을 즐겨 했기 때문에 자동차로 최적의 동선을 짜는 데 굉장히 유리했다.

 

방탄조끼와 헬멧


자원봉사 과정에서 다양한 위험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포로로 잡힐 위험이 존재한다. 전선과 인접한 지역으로 다닐 경우 상대편 군인에게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 나는 겪지 않은 일이지만 주변에 유사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자동차를 타고 다닐 일이 많아 휘발유가 많이 필요한데 전쟁 상황으로 인해 안정적 수급이 어렵다. 또한 어떤 물품을 구입해야 할 때 지원받은 돈이 떨어지거나 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어려움은 우리가 공격을 받아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활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체로 민간인들이 도시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게 되는 이유는 폭탄의 파편 조각을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은 보통 헬멧을 쓰거나 방탄조끼를 입고 이동한다. 나 역시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우선적으로 한 일이 헬멧과 방탄조끼를 구하는 것이었다. 처음 그것을 입었을 때의 기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밖에 이동할 때 훨씬 더 안심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상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외부에 노출되기 때문에 안전한 루트를 짜야 했고 빠른 이동이 필요했는데, 방탄조끼와 헬멧은 이런 활동을 함에 있어서 든든한 장비였다.

실제로 경험한 폭격 상황이 있었나?

나를 포함해 내가 관리했던 운전 요원들 모두 폭격을 당해 근처에 있는 지하 방공호로 뛰어가야 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주로 3~4월의 일이다. 한 번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북부 지역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전달하러 갔었다. 배달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주민분들이 몇 분 나와 계시기에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네고 이런저런 도시 상황을 여쭙고 있었는데 대화를 마치고 차에 들어가자마자 폭격이 시작됐다.

폭격이 일어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나름의 매뉴얼이 있나?

원칙적으로 행동 규칙이 명확하다. 최대한 빨리 몸을 피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과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실 그 이외에는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별로 없다. 그저 그 상황이 끝나길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전쟁 상황에서 살다 보면 이것이 실제 폭격인지 아닌지, 아군의 공격인지 적군의 공격인지도 헷갈리게 된다. 처음엔 아군이 공격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주민분들이 급히 피신하시며 손짓하시기에 자동차, 차 키, 휴대폰을 다 내팽개치고 얼른 아파트 옆 지하실로 따라 내려갔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겪는데, 가장 긴장이 될 때는 차에 타고 도로 위에 있을 때다. 차 안에 있으면 도무지 바깥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소리가 어디서 난 것인지, 폭격 방향이 어디인지도 알기 어려워서다. 전쟁 초기에는 바람과 엔진 소리가 상황 파악을 방해하지 않도록 창문을 내린 상태로 속도를 낮춰서 다녔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어떤 순간이었나?

폭격은 워낙 일상다반사고 만약 벌어지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솔직히 그렇게 무섭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정말로 무서웠던 건 다른 에피소드다. 3월 초였다. 내가 있던 주코프스키 마을은 당시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있고 길 위엔 우리 군 검문소가 있어 들어오고 나갈 때 늘 검문을 받았다. 봉사 활동을 끝내고 밤에 평소처럼 차로 돌아오고 있었다. 도로 위엔 나 혼자였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커다란 장갑차가 내 차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기관총, 군인, 거대한 바퀴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군과 적군의 장비는 굉장히 비슷하고 군사 표식도 잘 보이지 않아서 순간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우리 마을이 공격을 당해버린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미 수차례 러시아 군대가 방어를 뚫고 도시로 진입한 뉴스가 많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 차량을 폭격하는 영상도 많이 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장갑차는 내 차를 그냥 지나쳐 갔고 마을은 무사했다.

다치거나 죽은 동료가 있나?

자원봉사를 함께하던 가까운 친구가 있다. 3월 2일 살토프카 지역에 식료품 패키지 배달 후 돌아오는 길에 차량에 떨어진 폭탄의 파편을 머리에 맞아 사망했다. 살토프카는 러시아의 점령과 공격이 주로 이어진 곳이다 보니 아무리 위험해도 자원봉사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지역이었다. 하르키우의 수백 명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친구다. 이외에 나와 함께 했던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다행히도 모두 무사하다.
ⓒMaxim Dondyuk
우크라이나 정부는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길 원하는 것 같다. 전쟁이 더 길어질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시민들은 어떤 마음인가?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고 내가 그 모두를 대표해서 말할 수는 없다. 전쟁을 견디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대체로 사람들은 지난 2월 24일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돌려받기 전에는 휴전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은 전쟁으로 분단을 경험했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언제든 위기가 고조될 수 있어, 이 전쟁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전 한국 전쟁에 비유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가장 가까운 민족인데 외부의 개입이나 국제 정치적 상황에 의해 내전과 비슷한 일을 겪게 된 것이 참 안타깝다. 물론 이 두 전쟁이 일어난 경위와 시대는 완전히 다르고 국제적 상황도 굉장히 다르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이런 분쟁이 평화롭게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전쟁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하르키우처럼 국경과 가까이 접한 곳의 민간인 피해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 길어질 것 같다. 한국 독자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디 한국에는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자원봉사를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터뷰를 보는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나?

우크라이나는 다양한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당연히 군사 지원이나 인도적 지원들일 것이다. 이외에도 개인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하는 많은 재단이 있고 그 재단들은 활동 성격에 따라 필요한 것도 다르다. 다만 민간 차원에서 하는 자원봉사는 대체로 성금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는 그 돈으로 식료품과 약을 사거나 민간인을 피신시키는 데 사용되는 모든 물품을 구매한다. 대부분의 자원봉사 단체가 경제적 지원이 절실하다. 내가 활동하는 헬핑 투 리브를 돕고 싶다면 홈페이지를 통해 금전적으로 우리를 지원할 수 있다. 우리의 활동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잘 소개되어 있다.
[1]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반도다. 2014년 친러 정부에 대항한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을 시작으로 러시아는 친러 성향인 크름반도에 침투했다. 결국 주민 투표를 거쳐 2014년 3월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여 러시아로 합병됐다. 일련의 시도는 러시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돈바스로 확장됐다. 도네츠크(Donetsk)와 루한스크(Lugansk)를 중심으로 분리주의 세력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상대로 8년이 넘게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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