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뉴스 시대의 연민 피로

24시간 뉴스 시대의 연민 피로

우리는 매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이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참상을 보면서 점점 무감각해지는 위험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2018년 4월 자칭 냉담한 이상주의자인 한 여성이 정치적 무감각을 극복하도록 도와 달라는 글을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에게 보냈다. 화가 나지만 실제 행동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현상은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라틴계, 아메리칸 인디언, 무슬림, 성 소수자들, 여성과 그 외 수많은 이들에 대한 정부의 처사에 계속 화가 났지만,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칼럼니스트 록산 게이(Roxane Gay)의 응답은 이렇게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 당신의 사연에 공감할 것입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서적인 집중력이 너무 늘어져서 가늘어졌을 때 공감 능력을 확대하기란 무척 힘듭니다.”

이런 상황은 점점 더 흔해지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면 지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쁜 뉴스가 너무 많아서 감정이 소진된 것이다. 나는 냉담한 이상주의자를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지난 몇 달 동안 서서히 다가온 정신적 탈진을 겪었다. 친구들이 그날의 사건에 대한 광란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어떻게 견디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멍한 상태로 지내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늘 이렇지는 않았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몇 달이 지난 뒤 나의 남편 존(John)은 우리가 살고 있는 콜로라도주 하원의원들의 전화번호를 출력해서 냉장고에 붙였다. 우리는 매주 그들에게 전화해서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1]을 방어하고 소수자와 이민자, 이주자, 총기 규제를 위해 우리 편에서 싸워 줄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애걸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분노와 두려움을 조리 있게 말하려다 보니 심박 수가 빨라졌다.

때때로 대중의 항의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함은 있지만 보편적인 건강 보험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인 오바마 케어(Affordable Care Act)를 폐지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공화당이 급히 마련한 법안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뒤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세금 개혁(tax reform)’이라는 미명 아래 헬스케어 예산을 수십억 달러 삭감했다. 나는 하원의원들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화당은 세제 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지역구 상원의원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구의 공화당 상원의원 사무실은 아예 전화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 그 자체는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셜 미디어 활동가들은 분노하라고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계속 분노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작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뉴스 클립이든 20초만 보면 알게 된다. 실제로 화를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국내외 뉴스들은 여전히 끔찍하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공포의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은 사라졌다.

무감각한 이상주의자와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의 임상적 명칭은 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다. 심리학자 찰스 피글리(Charles Figley)는 연민 피로를 ‘연민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어 생기는 생물학적, 생리학적, 정서적인 탈진과 기능 장애 상태’라고 정의했다. 증상은 행동 변화(쉽게 놀라거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신체적 변화(탈진, 불안, 심박 수 증가), 그리고 정서적 변화(무감각, 우울, 목적의식 감소)다. 간호와 같은 전문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간호사들이 트라우마에 과다 노출되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환자 치료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일반 대중에도 적용될 수 있고, 실제로 적용되어 왔다. 특히 우리가 어떤 관심사에 푹 빠져 있을 때 그러하다.

이 용어 자체는 새로운 것이지만 연민 피로에 관한 구상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최근 역사가 사무엘 모인(Samuel Moyn)은 연민 피로가 연민만큼 오래된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연민 피로를 인식할 때 동반되는 불안도 그만큼 오랜 연원을 가진다. 모인에 따르면 18세기 철학자와 도덕주의자들은 윤리가 감성과 동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노출되거나, 그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헌신할 때 윤리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같은 이유로 칸트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보다 객관적 대안인, 감정이 아닌 이성에 근거한 윤리를 제시했다.

연민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21세기까지 이어졌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행동에 공감이라는 주관적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주장, 나아가 공감이 도덕성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간의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극으로서 공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다. 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게 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우려는 생각이 지속될 수 있을까?

공감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동기 부여가 된다면,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모든 충격적인 범죄와 정치 스캔들, 기후 재앙, 국지적이고 세계적인 재난의 세부 사항들이 매일 폭격하듯 쏟아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리아 전쟁, 난민 위기, 해빙이 녹는 것처럼 말이다. 정신적 외상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연민 피로의 징후를 살피는 훈련을 받지만, 요즘은 모든 사람이 같은 위험에 처한 것 같다. 불면과 심장 떨림을 유발한 ‘뉴스 중독’ 1년 뒤, 나는 뉴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세상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공감을 필요로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마치 간접흡연처럼 트라우마에 근접한 것 자체로 심리적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연민 피로라는 용어는 1992년 작가이자 역사가인 칼라 조인슨(Carla Joinson)이 처음 사용했다. 그는 응급실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관찰하면서 ‘돌봄 노동자에게 나타나는 소진(burnout)의 독특한 형태’를 발견했다. 최근 간호사 재키(Jackie)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깝게 지냈던 환자를 잃었다. 그 후 무기력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고 호소했다. 외과 간호사 마리안(Marian)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간호사를 그만둘 생각까지 들게 한 절망과 좌절의 시기를 겪었는데, 일종의 ‘전략적 제거’를 실행하기 전까지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공식적 명칭이 붙여지기 전, 연민 피로와 유사한 것을 인식한 의학 논문이 있었다. 1980년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는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를 인식하는 것으로도 트라우마가 된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마치 간접흡연처럼 트라우마에 근접한 것 자체로 심리적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1990년대 초반, 찰스 피글리는 이런 주장들을 더 깊이 탐색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에게 ‘연민적 지지(empathic support)’를 제공하는 전문인들에게 자기 환자와 같은 불안, 정서적 변화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에 따르면 의료 분야 종사자에게 트라우마가 나타나는 것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환자에게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돌봄, 즉 책임으로서의 공감이 때로 자아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근무했던 피글리는 칼라 조인슨의 용어를 채택하여 대중화했고 연민 피로 인지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

병든 부모나 자녀를 돌본 적이 있다면 스트레스 증가의 증상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질 낮은 수면, 불쾌한 감정, 위장 장애처럼 말이다. 나 역시 돌봄자의 연민 피로를 경험했다. 몇 년 전 남편 존의 만성 질환이 시작됐을 때,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몇 시간 동안 의자에서 꼼짝하지 못하곤 했다. 어느 날은 운전을 못할 정도로 어지럽거나,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했다. 더욱 염려스러웠던 것은 청력이었다. 한쪽 귀가 좋아지면 다른 쪽이 나빠지는 등 상태가 매일 요동쳤다. 그는 이명(耳鳴)을 헤어드라이어, 진공청소기, 제트 엔진, 사이렌, 심지어 UFO 착륙 소리에 비유했다. 그는 대학 강사였는데 이런 상태로는 일하기 힘들었다. 어떤 날은 거의, 또는 전혀 들을 수 없어서 일은커녕 나와 대화하기도 힘들었다. 존은 그때 30대였다.

존은 운전이나 통화를 하기 어려워서 내가 조수 역할을 맡았다. 그가 강의할 수 있으면 강의실로 데려다주고, 집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면 강의를 취소하고, 의사와 보험 회사에 전화하고 약속 장소까지 운전했다. 나도 전일 근무를 하고 있던 때였다. 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갑작스럽고 새로운 상황이 싫었지만, 내가 쉽게 좌절한다는 것이 더욱 싫었다. 바쁠 때 존이 도움을 청하면 잔소리를 해대는 내 모습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늦도록 잠 못 이루고 지쳐 있는 날들이 많았고, 그런 날은 걱정하고 말다툼하며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고는 했다.

스트레스라는 말로는 이 시기를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공포와 절망을 느꼈다. 나는 존을 걱정하면서도 연민에 굶주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돌봐 줬으면 하고 생각(부끄럽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 같다)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 정서적 자원은 존에게 전부 투입되었고, 존은 자기감정을 비축해서 자신에게 다 쓰는 것 같았다(사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동정심에 쓰기보다는 감정을 비축하는 것이 당연한 때가 있지 않나?).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 불안, 불확실성이 공감 수준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공감의 수요가 더 크기 때문에 공감이 더 빨리 소모되는 것 같았다.

연민 피로가 의료 분야 종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검증되었고 문서화되어 있다.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임상 현장에서 실수가 증가하며, 이직률이 높아진다. 돌봄자들은 이런 증상을 집으로 가져가는데 친구나 가족 관계에도 해가 된다. 그래서 돌봄자들은 연민 피로의 징후가 있는지 스스로를 살피도록 교육을 받는다.

피글리의 저서에는 자가 진단과 관련해 자아 회복력, 자기 연민, 트라우마 후 성장 ― 충격적인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일부 생존자가 얻은 긍정적인 변화 ― 를 검사하는 내용이 있다. 미국에는 이런 긍정적 서사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있는 것 같다. 테러 같은 재난을 겪은 뒤 누군가가 “그 사건이 나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현실 세계의 트라우마에 대한 할리우드식 결말처럼 말이다.

돌봄자들은 예방이나 회복을 위한 자기 관리 지침을 준수하도록 교육받는다. 이 지침에는 건강한 식사, 수면 습관, 명상과 휴식 시간 만들기,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강력한 지지자’를 포함한 사회적 지지 네트워크 만들기 등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이행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트라우마가 전염성이 있다면 그 강력한 지지자들 역시 자신을 지지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을 권고한다.

“자기 생애 최악의 날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일하고 있어요.”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지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환자나 가족에게 너무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환자의 입장에 서거나 함께 느끼려고 애쓰지 않아요. 가끔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지만. 간호사가 된 첫해에 내 정서적 힘을 다 소진하지 않고 정서적 지구력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내 직업은 그런 끔찍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마케팅 분야에서 일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시민이 되려고 할 때면 내 정서적 지구력이 시험받는 느낌이 든다. 내 책상 옆 벽에는 ‘활동가가 되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하도 오래전에 붙여서 이젠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가끔 염려한다. 나는 나의 분노를 충실히 따르지 못하고 있다.
 

다른 신진대사 과정처럼 공감에도 비용이 든다. 배고픔이 먹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민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민 피로가 의료 분야의 개념으로 부각된 뒤 오래지 않아 미디어 관련 연구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나타났다. 뉴스를 통해 끔찍한 이미지들에 과다 노출된 시청자들이 이에 반응하는 대신 정보를 거부하고 정서적으로 마음을 닫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1999년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인 수전 몰러(Susan Moeller)는 연민 피로에 관한 저서에서 미디어가 질병, 기근, 전쟁과 죽음을 어떻게 팔고 있는지를 상세히 탐구했다. 그녀는 말한다. “미디어가 가난과 질병, 죽음으로 이어지는 트라우마 사이로 숨 막히는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문제들은 흐릿해진다. 여러 위기들은 통틀어 하나의 위기가 된다. 방대한 양의 좋지 않은 뉴스들이 대중들을 ‘연민 피로에 무너진 멍청이’로 몰아가고 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역시 2003년 출간된 저서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에서 유사한 질문과 싸운 바 있다. 여기서 ‘관하여’는 단순히 관련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충격과 분노를 일으키는 이미지의 홍수를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 가고 있으며, 연민이 한계에 달해 무감각해지고, 익숙한 진단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우리가 미디어 과부하로 인해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 무뎌졌고 연민이 이미 지쳤다고 말한다. 누구의 잘못일까? 우리인가, 미디어인가?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몰러는 연민 피로가 악순환의 구조라고 말한다. 전쟁과 기근 이야기가 계속되면 우리는 싫증을 느낀다. 이전에 이런 일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앙이 이전보다 더 심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1995년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국제 언론 보도 연구에 따르면 국제 뉴스가 지역 이야기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보다 극적이고 폭력적’이어야 한다.

광고 지원을 받는 미디어 채널들은 생존을 위해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게 된다. 굶주려서 퉁퉁 부어 있는 어린이들,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들. 그러나 디자인된 이런 영상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결국은 외면하게 한다. 이는 자기 보호의 한 형태다. 이야기가 더 화끈하지 않으면 1990년대에는 신문 판매 부수가 떨어졌고 오늘날에는 클릭 수가 줄어든다. AP통신에서 국제부 에디터를 지낸 톰 켄트(Tom Kent)는 몰러에게 “우리는 새로운 얘깃거리가 거의 없을 때까지 보도합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위기는 회복되기도 전에 지루해진다는 뜻이다.

1991년 몰러는 미국인이 아프리카의 기근과 같이 느리게 진행되는 국제적 위기보다 태풍이나 지진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자연 재난을 ‘특정한 해결책을 가진 단발적인 문제’로 봤기 때문이다. 자연 재난은 도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고 한정된 원조로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반면 기근은 자선 콘서트와 음반을 통해 수천만 달러의 인도주의적 원조금을 모금할 때만 해도 1980년대를 장식한 유명한 주제였지만 수년간 계속되었다. 기근은 많은 사람에게 다루기 힘든 위기로 인식된 것 같다.

서서히 진행되는 복합적인 재난의 경우 보도에 제한이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대중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여기서 무관심은 대중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퇴보(moral decrepitude)한 탓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실제 잔학 행위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감각은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피글리가 주장했듯 연민 피로는 원래 돕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민이 없이는 연민 피로도 없다. 위험에 처한 돌봄자는 누군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지만 늘 성공할 수는 없다. 연민 피로는 냉담이 아니라 이른바 ‘방해받은 연민’인 것이다.

돌봄자가 트라우마를 받은 사람을 돌보기 때문에 연민 피로의 위험에 처한다면, 연민이 많은 뉴스 소비자들은 뉴스를 소비하기 때문에 연민 피로의 위험에 처한다. 휴대폰으로 트위터를 열거나 술집에서 TV를 보기만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에 노출된다. 전화하기, 투표하기, 항의하기 등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이 참여해 만들 수 있는 변화는 미미해서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연민은 대체로 순수한 미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항상 사심이 없는 것일까? 심리학자 사이먼 배런-코헨(Simon Baron-Cohen)은 《악의 과학》에서 뇌의 ‘공감 회로’를 밝히는 여러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공감 회로란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손이 바늘로 찔리는 것 ―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에서 한 남자가 면도날로 여자의 눈알(실제로는 양의 눈이다)을 자르는 장면의 심리학 실험 버전이랄까 ― 을 볼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다.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해 움츠러들고 눈을 피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자기 연민의 한 방법이다.

배런-코헨은 인간의 공감 성향은 키나 다른 특징처럼 정상 분포, 소위 종형 곡선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인종 차별 반대 운동 활동가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같은 소수의 사람은 예외적으로 높은 공감 수준을 가진 반면, 자기애적 성격 장애나 사이코패스 같은 소수의 사람은 공감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어머니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제일 높은 두 직종이 외과 의사와 불교 승려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셨다. 아마도 상황과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모호한 과학처럼 들리지만 공감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나 깨달음에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배런-코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포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은 중간 정도의 공감 수준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가장 적절한 것일까? 종(種)의 확산이나 선한 윤리를 위해? 우리 지역의 번영 정책이 실제로 다른 지역에는 해로울 수 있으니까 적절한 수준에서만 공감해야 한다는 것인가?

평균적인 공감 수준으로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 내가 아는 호스피스가 말한 것처럼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식적이든 자동적이든 합리적인 반응일 따름이다. 다른 신진대사 과정처럼 공감에도 비용이 든다. 배고픔이 먹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민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면 감정 공급을 중단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든 모르든 그런 정보가 있다는 사실은 알기 때문에 그 인식만으로도 나는 피로를 느낀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례 없는 끔찍한 사건들을 매 순간 접하면서도 연민 피로를 피할 수 있을까? 대량 총기 난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시대에 살면서 무감각에 빠지지 않을 해결책을 찾던 중 2017년 11월에 가족 치료사가 쓴 기사를 발견했다.

“솔직히 말할까요? 텍사스 서덜랜드 스프링스의 교회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이 대부분 어린아이라는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페이지를 넘겼어요. 역겹고 화가 났죠. 총을 쏜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에게도요.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는 힘들지만, 총기 소지가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계속 경고하는 사회 과학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이 치료사는 희생자를 비난하는 반응을 연민 피로의 전형적인 사례로 규정하고,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첫째는 “비극을 개인화하라”는 것이다. 희생자의 이야기를 읽고, 이름 모를 희생자가 아닌 인간으로 그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간단한 행동으로 연민을 유지하고 무감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과연 그럴까? 특정 사건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모든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읽게 되면, 수백 개의 세부적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내용이 희미해지지는 않을까?). 둘째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지지 말고 분노하라”는 것이다(이것은 암에 대한 해결책으로 “암에 걸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그래도 정서적 소진을 느낀다면 주변에서 비극을 찾으라”는 것이다.

연민이 바닥났음에도 비극을 찾으라는 마지막 조언이 특히 어리석게 다가왔다. 연민 피로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비극에 마비되고 무관심하면 세상이 더 나빠질 것을 염려해서가 아닌가? 나는 공감이라는 감정 자체를 위해 공감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 특히 주변의 비극을 통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비극은 있다. 내 남편의 상태는 진단은 받았지만 증상이 악화되고 알려진 치료 방법이 없어 그의 말대로 ‘피로스의 승리’(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친구의 아내는 암으로 죽어 가고 있다. 그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아내의 치료비를 충당해야 했다.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비극을 지니고 있다.

몰러는 연민 피로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디어가 판에 박히고 선정적인 보도를 피함으로써 연민 피로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래픽이 더 많아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수전 손택은 연민 피로가 끔찍한 이미지들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말했다. “부패가 존재한다는 것에 계속 놀라고, 인간이 소름 끼치는 방법으로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직접적인 잔혹 행위를 하는지, 증거를 보고도 계속해서 환멸을 느끼며 심지어는 믿기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성인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연민 피로는 성숙에 대한 개념이다.

반면에 우리가 무관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하다면, 이는 도덕적 게으름에 대한 손쉬운 변명일 수도 있다. 2000년 《뉴요커(New Yorker)》에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돈을 구걸하는 노숙자 옆을 지나가는 만화가 실린 적이 있다.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연민 피로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네.”

나는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으로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머릿속으로는 느끼지만 몸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나는 전문 돌봄자가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보통 사람으로서, ‘정서적 지구력’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관리 지침을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친구와 외출을 하고, 유튜브에서 옛날 포커 토너먼트를 찾아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를 두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위험 회피에 가까운 느낌이다.

무기력하게 분노하는 것보다는 거리를 두는 것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책임은 무엇일까? 나는 전 세계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하며, 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 24시간 뉴스, 휴대폰 알림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연민은 석기 시대나 칸트 시대보다 훨씬 더 크다. 이 요구가 너무 압도적이고 심지어 감각이 마비될 지경이어서 내 주변에서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든 모르든 그런 정보가 있다는 사실은 알기 때문에 그 인식만으로도 나는 피로를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믿는 운명론은 연민 피로의 논리적 확장이며, 운명론에 굴복하는 것은 매우 쉽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기분이 나쁠 필요가 있을까?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저서 《동정에 반하여(Against Empathy)》에서 편향되고 신뢰할 수 없는 공감이라는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느끼는 동정의 양에 비례해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블룸에 따르면 지속 가능하지 않은 동정을 모든 이들에게 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동정을 내려놓아야 문제에 더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공감의 침식’을 악과 동일시하는 배런 코헨도 공감 능력이 전혀 없으면서 완고하게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체계화함으로써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선한 윤리가 공감에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다.

2017년 새해 첫날, 존과 나는 알고 지내는 활동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조직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활동 계획을 짜는 동안, 나는 요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넋두리를 했다. 그 친구는 “절망에 빠져 있지 말아요! 그건 전략이 아닙니다”라고 내게 쏘아붙였다.

몇 달 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목소리를 높인 것을 사과했고 다양한 형태의 실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당신의 실천 방식은 글을 쓰는 것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동안 나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대중 시위를 여러 번 건너뛰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석한 것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그들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다. 군중의 규모에 감명을 받았다. 우리 모두가 믿고 있는 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길거리를 행진할 시간과 에너지를 가졌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우리가 너무 지쳐서 싸울 수 없을 때 다른 누군가가 앞장서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위로가 된다. 어쩌면 너무 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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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차별을 받지 않고, 모든 공공 서비스, 편의 시설, 통신 및 교통 시설 이용의 접근성 보장 등 장애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90년 미국에서 제정된 법이다. 세계 여러 국가에서 장애인 차별 금지 법률을 제정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특수교육학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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