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수 없는 여자들
1화

프롤로그; 독한 여자의 사회

지금의 직장에 자리 잡은 것이 2018년이니 석사 학위를 받은 2006년부터 꼬박 12년이 걸렸다. 긴 시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인으로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벽을 넘어야 하는지를 절절하게 체감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 연구원에서 3개월마다 계약을 연장해 가며 일했을 때다. 당시 선임은 다른 남성 연구원과 나를 자주 비교했다. “곧 석사급 정규직을 뽑을 건데 당신이 더 유리하다”며 나에게 더 많은 업무를 맡겼다. 그의 말에 기대를 걸고 밤낮없이 일했다. 그러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고, 혼자서 눕거나 일어서는 게 힘들 지경이 되어서야 퇴사를 결심했다. 정규직의 기회는 줄곧 비교 대상이 됐던 남성 연구원에게 돌아갔다.

박사 과정 중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결혼 초기 시댁과의 마찰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스스로를 다독일 틈도 없이 출산과 육아,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겨우 세 살이 된 딸을 데리고 홍콩의 한 대학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여한 적도 있다. 잠든 남편과 아이가 깰까 봐 호텔의 화장실에서 문을 반쯤 열고 쪼그려 앉아 발표문을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학위를 따고 시간 강사로 일할 무렵, 장례식장에서 알고 지내던 강사를 만났다. 어떻게 지냈냐는 그의 물음에 대학원에서의 생활을 간략하게 전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독하다, 독해. 얼마나 독하면 그런 상황에서 애까지 키우며 박사 학위를 받았대?”

누군가는 치열했던 나의 삶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격려해 주기를 바랐는데, 사람들은 나에게 독하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결혼까지 하고 박사 학위를 따려는 나에게 조언 아닌 조언도 많이 했다. 이만하면 열심히 했다며, 아이도 있으니 남편 월급 받으면서 편하게 지내라는 거였다. 하지만 남편이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물론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독한 사람이어서 해낸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버텼을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았다. 지도 교수도 내게 많은 실적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 엄마라고 해서 이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동료,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자유로운 편인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고 싶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가면 스트레스에 찌든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어린이집 대문을 열기 전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결혼과 출산, 양육 등의 문제로 직장 생활을 접는 쪽은 대부분 여성이다. 출산 후에 직장으로 복귀하면 동료 남성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여서 뒤처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겠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그렇게 어떻게든 직장에 다니며 고위직에 오른 여성에게는 여지없이 ‘욕심이 많다’거나 ‘독하다’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수년 전 한국 사회는 알파걸의 등장을 반겼다. 기성세대에 비해 학력이 높고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노동 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왔다. 그러나 남녀의 격차와 차별은 여전히 문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평균 임금이 낮고, 고위직 승진 기회도 적다. 여성은 더 높은 학위를 받아서 성차별을 극복하려 하지만, 한국 노동 시장에서는 고학력이 양질의 일자리로 연결되는 학력 프리미엄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2003년 미국에서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I Don’t Know How She Does It)》라는 소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작품은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흥행했다. 주인공은 ‘잘나가는’ 맞벌이 여성이다. 그는 영화 제목처럼 멋진 구두를 신고 열심히 달린다. 회사에서는 경쟁 상대인 남성에게 능력으로 승리하고, 일과 가정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당히 일을 고른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워킹맘인데도 그렇다.

반면 한국에서 최근까지도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은 알파걸로 자란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고학력 여성이 당당히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스토리보다,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의미다.

한국에도 여성 관련 정책들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남는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지원책들은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불이익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실정이다. 저출산과 경력 단절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2년제 전문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지닌 이들을 고학력 여성으로 분류하는 학계의 기준에 비춰 보면, 지금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 여성은 대부분 고학력에 해당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고학력 여성의 일자리에 대한 논쟁은 사치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한국 여성이 어떤 노동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살피고, 여성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미래에는 더 나은 세상에서 배운 만큼 기여할 수 있는 기회의 통로가 만들어지기를, 한국 사회가 성실하고 능력 있는 여성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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