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워싱 주의보
2화

왜 지금 녹색인가

기후 세대, 1.5도를 논하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 정상 회의(Earth Summit)는 185개국 정부 대표단과 114개국 정상 및 정부 수반들이 참여해 지구 환경 보전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전 지구적 공동 노력으로 해결할 환경 문제로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산림 보전’이 선정됐고 관련 협약과 원칙도 만들어졌다. 환경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개발 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한 지구환경기금(GEF·Global Environment Facility) 또한 여기서 출범해, 지난 30년간 전 지구적 환경 문제에 수십조 원의 자금을 무상 지원해 왔다.

이처럼 ‘친환경’은 국제 사회의 관점에선 새롭게 대두되는 이슈가 아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후 대응에 관심을 보여 왔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춰 국제적인 협약 체결 및 후속 조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제서야 각종 정책과 마케팅에서 녹색이 대세가 되고 있는 걸까? 환경에 대한 시민 의식, 속칭 ‘녹색 시민 의식’은 왜 우리나라에서 특히 극적으로 이뤄졌을까? 그 배경엔 한국의 시대 상황과 맞물린 MZ세대의 등장이 있다.

그간 녹색 사업 개발이나 녹색 분야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아프리카 최빈국부터 북유럽 선진국까지 다양한 국가를 방문해 오며 느낀 것은, 사회의 발전 단계에 따라 시민들의 주된 관심사가 함께 변한다는 것이다. 아마존 열대 마을과 같이 아직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살며 환경 보존에 큰 관심을 가진다. 반면 성장에 막 돌입한 사회는 경제 발전을 우선적인 목표로 두고 다른 이슈는 최소한으로 다루거나 때로는 외면한다. 이후 산업화의 어느 궤도에 진입하며 인권, 소득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어느 정도 구축되면 그제야 비로소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고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바로 이 단계가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과 사회 갈등을 거쳐 대중들이 점차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게 된 현시점이 아닌가 싶다.

한국은 단기간에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전망 구축을 이룬 대표적인 나라다. 1961년 최초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후 1960~70년대에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1980년대에는 5·18민주화운동을 필두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했다. 이후 사회 보장 제도의 기틀이 점차 마련된 2010년대에 들어서며, 일반 시민들도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세계 최대 환경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 또한 2011년에 서울 사무소를 개소했다.

최근에는 이 흐름과 더불어 MZ세대의 등장이 친환경에 대한 시민 의식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경험과 취향을 중시하고 정치적 올바름과 진정성에 대한 관심이 높은 세대. 그들이 관심을 갖는 올바름과 진정성의 영역에선 ‘녹색’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3월 대한상공회의소가 MZ세대 남녀 380명으로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격을 더 지불하더라도 환경에 도움이 되는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응답자 비율이 60퍼센트 이상이었다. 또한 한국투자증권이 2022년 6월 발간한 〈2022 MZ세대 투자인식 보고서: MZ는 어떻게 생각할까?〉에 따르면 MZ세대는 ESG 요소 중 ‘환경’을 가장 중시하며, 기업이 가장 주력하는 ESG 분야 역시 ‘환경’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발맞추고자 기업들은 앞다투어 친환경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고, 녹색을 강조하는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종합해 보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국의 시대 상황과 MZ세대의 등장이 결합하며, 최근 2~3년간 우리나라에선 녹색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지금의 녹색 열풍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회 변화가 개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B2C(Business-to-Customer) 산업의 변화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기업 간 비즈니스가 주업인 B2B(Business-to-Business) 산업이나 정부 대상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B2G(Business-to-Government) 산업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음식료품과 패션 등 대중에게 친숙한 B2C 산업보다 도리어 반도체, 철강, 석유 화학, 전력 등 개별 소비자와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B2B와 B2G 산업에서 적극적으로 녹색 비전을 선포하고 녹색 경영을 추진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선 앞서 언급한 지구환경기금이 지원해 온 다음 여덟 개 분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 분야들은 지구의 땅, 숲, 물, 공기를 보전하면서 인류가 만들어 낸 유해 물질을 최소화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항목들이다.

①산림 보전
②토지 황폐화
③수자원
④기후 변화
⑤오존층 파괴 물질
⑥화학 물질 및 폐기물
⑦잔류성 오염 물질(POPs·Persistent Organic Pollutants)[1]
⑧생물 다양성

여기서 네 번째 항목, ‘기후 변화’에 주목해 보자. 미국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로 지구가 이상 기후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기후 변화는 이미 해외 학계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일단락된 주제이며, 유튜브에 ‘기후 변화’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국내 유명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를 설명하는 영상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기후 변화가 진실인가’가 아닌, ‘왜 기후 변화가 다른 모든 환경 문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됐는가’이다.

가장 쉬운 대답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흔히 환경 이슈를 논할 때, 우리는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지구가 당장 멸망할 것이라는 심각한 공포를 토대로 논의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여덟 개 항목 중 중 대다수는 인류가 점진적으로 해결할, 그리고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다르다.

최근에 여러 매체에서 ‘2050 넷제로(Net-Zero)’, ‘2050 탄소 중립(Carbon Neutral)’과 같은 키워드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2050’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는 이유는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시간은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다. 산업 혁명 이후로 인류는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사용하며 발전을 이룩해 왔다. 화석 연료로 대량의 온실가스를 방출해 지구의 기온을 높였으며, 그 업보로 기후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UNFCCC COP21)에서 195개의 당사국이 참여한 가운데, 파리기후변화협약(The Paris Agreement)이 채택됐다. 협약의 핵심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이 상승하는 폭을 2도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1.5도 이하로 제한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2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직면해야 한다는 위기감은 선진국의 정부 부처 개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과 호주에는 환경부와 별도로 기후에너지부가 마련돼 있다. 영국의 에너지기후변화부(DECC·Department of Energy & Climate Change)는 기업부의 ‘에너지’ 업무와 환경부의 ‘기후 변화’ 업무를 따로 떼어 만든 하나의 정부 부처로, 2008년 출범 이후 화석 연료를 친환경 에너지로 바꾸는 에너지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호주 역시 같은 이유로 2022년 기후변화에너지환경수자원부(DCCEEW·Department of Climate Change, Energy, the Environment and Water)라는 정부 부처를 신설해 문자 그대로 기후 변화, 에너지, 환경과 수자원에 대한 정책을 세부적으로 검토 및 시행하고 있다.

최근 친환경 경영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기업은 주로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엄격히 부과된 B2B나 B2G 기업들이다. 물론 녹색 시민 의식에서 촉발한 고객사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B2C 산업 내에서 B2B로 녹색 경영을 추진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온실가스를 다배출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이 해당한다. 덴마크 국영 에너지 기업 오스테드(Orsted)의 경우 원래는 석유 가스 기업으로, 본래 기업명은 덴마크석유가스공사(DONG·Danish Oil and Natural Gas)였다. 그러나 배출권 거래제가 시작된 2005년 이후 화석 연료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유럽 기업들은 온실가스를 줄이라는 정부와 시민 단체의 압박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오스테드사는 전통 에너지 산업의 위기를 도리어 기회 삼아 10년간의 노력 끝에 2022년 전 세계 해상 풍력 발전의 30퍼센트를 개발하는 세계 최대 해상 풍력 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났으며, 세계 경제 포럼(WEF·World Economic Forum)에서 세계 1위의 지속 가능 경영 기업으로 선정됐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국내 대표적인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 분야로는 화력 발전, 철강, 시멘트, 석유 화학, 정유, 반도체, 디스플레이 관련 산업 등이 있다. 또한 제품 이용 단계에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항공, 선박 산업이나 데이터 센터에서 대량의 전력을 사용하는 IT 산업 역시 깊게 연관돼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앞서 언급한 여덟 가지 환경 분야 중 기후 변화는 비교적 관리해야 할 유해 물질이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산화 탄소를 비롯해서 메탄, 아산화 질소 등을 포함한 소위 ‘6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녹색 혁명의 시작이며, 현재로선 B2B 혹은 B2G 기업이 그 주축에 서 있다.

 

지속 가능 금융의 등장


환경 및 기후 변화에 관심을 가져 온 사람이라면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들 수 있다. 기후 변화를 새로운 의제라고 할 수 있을까? 1992년 지구 정상 회의에서 이미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했고, 이후 교토의정서를 거쳐 파리협약까지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지 않았는가. 왜 지금, 단순히 녹색이 회자되는 시대를 넘어 정부 정책과 산업에서 녹색이 대세인 시대가 도래했나?

이에 대한 해답은 기후 금융에서 찾을 수 있다. 기후 금융은 온실가스를 감축하거나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향상하는 활동에 대한 투자 및 금융 상품을 통칭하는 말이다. 기후 금융에 기후 변화 외 다른 환경 문제를 아우르는 녹색 활동이 추가되면 ‘녹색 금융’으로 부르며, 이러한 녹색 금융에 사회 가치 창출 활동이 추가되면 ‘지속 가능 금융’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한다.

선진국 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은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중심으로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유럽연합은 2005년부터 유럽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EU ETS·EU Emission Trading System)를 통해 온실가스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배출하는 기업에 매년 목표 감축량을 부여해 왔다. EU ETS가 규제하는 기업들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 즉 배출권을 온실가스 원단위(tonCO2eq)로 받게 된다. 기업이 기존에 배출하던 온실가스보다 적은 양의 배출권을 할당 받고, 그만큼의 온실가스 양을 감축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업 자체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기업은 성공적 감축을 통해 배출권이 남는 반면 어떤 기업은 배출권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한다. 이 경우 배출권이 부족한 기업은 다른 기업이 보유한 여유분의 배출권을 구매해서 정부가 부과한 감축 목표를 달성해야 하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시 벌금을 지불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EU가 온실가스 배출권을 도입한 지 10년이 지난 2015년에 한국형 배출권 거래제(K-ETS)를 도입했다. 대표적으로 포스코, 현대제철, 삼성전자, 한국전력공사 산하 공기업 등이 적용을 받았다. 배출권 거래제 외에도 독일, 스위스, 노르웨이 등 EU 국가들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만큼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세(Carbon Tax)를 도입했는데, 특히 노르웨이의 경우 이미 1991년부터 탄소세를 부과해 왔다. 최근에는 
EU와 미국을 중심으로 탄소세를 관세 형태로 부과하는 탄소 국경 조정 제도(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에 대한 논의도 진행 중이다.

다만 이러한 규제들만으로는 기후 변화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 규제 강도를 높일 때는 늘 산업계의 반발이 뒤따르며,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폐수, 미세 먼지 등 육안으로 보기에도 충분한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는 다른 환경 오염 물질과 달리, 온실가스는 대중 입장에서 그 심각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수출 주도 경제 성장을 이뤄 온 국가의 경우, “정부의 규제 강도가 높아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만일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 규제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지금과 같이 녹색이 대세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오래전부터 규제를 시행해 온 선진국의 정책 의사 결정자들 또한 이런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기후 금융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게 된다.

기업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존재한다. 내부 이해관계자로는 대표적으로 임직원이 있을 것이고, 외부에는 내부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외부 이해관계자는 누구일까? 기업의 핵심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이해관계자를 세 유형만 꼽는다면 나는 투자자, 고객, 정부를 선택하겠다. 기업이 처한 환경에 따라 이해관계자 대응에 차이는 있겠지만, 어떠한 기업도 이 세 집단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기업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투자자, 고객, 정부가 기업에게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부는 이미 기업이 온실가스를 감축하도록 규제를 시행해 왔던 반면, 기존 투자자와 고객은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기업 측에서도 규제를 준수하는 소극적인 수준에 그쳐 왔다.

하지만 이제는 투자자들이 나서서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이 기후 변화로 인한 리스크와 기회 요인을 파악하고, 이에 따른 재무적 영향을 측정해 기업 가치에 반영할 것을 기대한다. 2020년 1월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인 블랙록(BlackRock)의 CEO, 래리 핑크(Larry Fink)가 보낸 연례 서한은 우리나라의 녹색 금융과 ESG 열풍을 촉발하는 하나의 큰 계기였다. 래리 핑크는 “기후 변화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이러한 투자자 서한은 국내 기업의 경영진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거엔 지속 가능성이 기업 내 실무자 단계에서 ‘문제가 없는 선에서 잘 처리하면 되는’ 이슈였다면, 이젠 경영진이 투자자 대응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핵심 안건으로 격상한 것이다.

결국 네거티브 규제만으로는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선진국 정책 의사 결정자들은 자본의 힘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연금 기금 등 선진국의 기관 투자자들은 글로벌 금융 시장의 큰손이다. 이러한 기관 투자자들이 나서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 규모를 줄이겠다는 방침을 세운다면 자산 운용사, 사모 펀드, 은행 등 관련 금융 기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후 금융이 금융 시장의 새로운 규범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투자자 요구는 기업의 자체 생산 설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해당 기업의 협력사에도 영향을 미쳐, 해외 기업들의 협력사로 있는 국내 기업에게도 동일한 수준의 책임을 요구한다. 결국 선진국 기관 투자자로부터 촉발한 기후 금융의 움직임이 금융 기관과 고객을 통해 국내 기업에게 직접적인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기후 금융, 정확히는 기후 변화로 인한 재무적 영향을 투자자에게 공시하도록 요구하는 정부 규제(TCFD·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가 탄생했다. 이로써 투자자, 고객, 정부가 기업이 기후 변화에 대응할 것을 한목소리로 요구하게 됐다. 기존부터 중요하게 논의돼 온 기후 변화 의제와 더불어, 기업을 운영하고자 자본의 힘을 얻으려는 움직임이 얽히며 지금의 ESG 열풍이 도래한 것이다.

현 ESG 열풍의 탄생을 분석할 때 앞으로 이뤄질 일들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무 성과와 기업 가치다. 투자자들은 정성적인 수치, 거칠게 표현하자면 ‘장황하게 말로 설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투자 의사 결정에 즉각적으로 활용 가능한 정량적 수치, 가능하다면 화폐 가치화된 수치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자자의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이 여러 ESG 이슈 중에서도 기후 변화다. 즉 기후 변화라는 이슈가 가진 재무적 특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녹색과 ESG 시대의 미래 방향성을 예측하는 데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기후 변화를 막는 데 동참하고, 녹색 경영을 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왜 어려울까? 철저히 투자자 관점에서 본다면, 기업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 결국 재무 성과와 기업 가치에 얼마큼 영향을 미치는지 산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도 사회의 한 구성원인 만큼 사회 발전을 도모하고 사회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얘기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투자자를 통해 기업을 움직이고자 한다면, 이러한 단순한 접근은 한계에 부딪친다. 기업의 환경·사회·지배 구조 관련 활동이 어떠한 재무적 영향으로 연결되고, 궁극적으로 기업의 가치를 제고할 활동인지를 정량적으로 분석할 때 투자자들은 비로소 기업을 움직일 힘을 갖는다.

대부분의 ESG 이슈가 까다로운 것이 바로 이 부분에서다. 예컨대 사회 취약 계층을 지원하거나 인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해당 기업의 재무적 성과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줄지 숫자로 제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환경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환경 오염 물질을 적게 배출하면 벌금은 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에게 그 외에 어떤 재무적 영향을 안겨 주는지 분석하긴 어렵다. 경제학점 관점으로 보자면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외부 효과(externality)[2]를 재무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기후 변화는 다른 환경, 사회 문제 대비 외부 효과를 내재화하여 재무적 가치로 전환하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후 변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실가스’라는 단일 물질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외부 효과를 재무적 가치로 환산해 기업 가치에 내재화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이를 투자 의사 결정에 반영할 수 있다.

새로운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인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의 진정한 가치는 기업에게 온실가스 배출 감축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온실가스라는 환경 유해 물질의 가치와 비용을 재무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2022년 현재 EU는 온실가스 1톤당 약 80유로, 한화 11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배출
권을 구매하도록 한다. 반대로 온실가스 1톤을 감축할 수 있는 기업의 경우, 다른 기업에게 배출권을 판매해 해당 금액만큼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배출권의 가치는 시장 참여자를 통해 형성되며,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한다. 과도기적으로는 탄소 국경 조정 제도를 통해 국가 간 배출권 가격 차이를 조정하는 작업이 관세 부과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향후 모든 국가에서 배출권 거래제를 실행하고 이를 연동하는 국가 간 협약을 체결할 경우 탄소 배출권은 석유나 비트코인과 같이 전 세계적인 호환성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배출권 거래제는 투자자들이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사 결정에 반영하기 위한 정량적 기반이다. 최근 ESG 관련 가장 중요한 화두는 국제회계기준(IFRS·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 재단이 설립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International Sustainability Standards Board)의 지속 가능성 기준이다. 기존의 ESG 기준이 정부 기관, 시민 사회 단체, 임직원 등 기업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온 반면, 이 기준은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정보 공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ESG 이슈 중에서도 투자자가 가장 관심을 갖는 기업의 재무 성과에 영향을 미칠 부문에 집중하며, 정량적 환산이 가장 용이한 기후 변화 이슈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업은 회계 기준에 기반한 재무제표(financial statement)를 통해 재무 성과를 측정해 왔으며, 회계 법인의 외부 감사를 통해 그 신뢰성을 인증받았다. S&P, 무디스, 피치와 같은 글로벌 신용 평가사들은 재무 성과를 토대로 기업에게 신용 등급을 부여했고, 투자자들은 이러한 정보를 활용해 투자 의사 결정을 진행했다.

유사한 시스템이 녹색과 ESG 이슈에도 마련될 것이며 향후 기업은 지속 가능성 기준에 기반한 지속 가능 제표(sustainability statement)를 통해 재무적 영향을 미치는 성과를 측정하고 공시하는 의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에 상장한 기업을 대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측정해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규제의 초안을 2022년 4월 마련했다. 상장 기업들은 자사 온실가스 배출량의 공신력을 입증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외부 기관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기후 변화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도 이러한 정산 및 거래, 감시 시스템이 작동해야만 그린워싱을 방지하는 사회적 안전 장치가 마련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녹색도 데이터다


녹색 성과 창출은 단순히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효과를 넘어 자금을 확보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에는 녹색에 관심이 없던 기업의 경영진들이 이제는 나서서 녹색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대두되는 것이 그린워싱이다.

그린워싱(Greenwashing)이란 친환경이라고 볼 수 없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녹색으로 포장 또는 위장하여 커뮤니케이션하는 행태를 의미하며, 소위 ‘위장 환경 주의’로 불린다. 그린워싱이 오늘날 하나의 현상으로 굳어진 것은 녹색이 일종의 뉴 노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 금융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드레스 코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기업은 자본 시장에 입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1000조 원 이상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세계 2위 연기금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는 반-녹색에 해당하는 투자 금지 기업을 지정했는데, 국내 기업으로는 석탄 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전력과 담배를 생산하는 KT&G 등이 포함됐다. 국내 최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경우 책임 투자를 위해 투자 대상 기업에 대한 ESG 평가를 수행하고 있으며 ESG 이슈가 존재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주주 활동을 통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투자 제한 대상 1순위로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인 석탄 기업을 선정하고 상세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있다.

단순히 벌금을 부과하거나 자금을 끊는 네거티브 접근은 기업의 녹색 활동을 유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 리스크 관리와 안정적인 이익 창출도 기업에게 중요한 요소지만, 기업 경영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회사의 성장과 이를 위한 신사업 발굴이다. 기후 변화를 막는 데 기여하고 친환경 성과를 창출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에게 매력적인 사업 영역이 된다면, 정부 차원의 압박이나 규제 없이도 기업들이 앞다투어 해당 사업에 뛰어들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에게 투자자가 몰리고 이 자금으로 해당 기업이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린워싱이 아닌 유의미한 성과의 프로젝트가 속속들이 등장할 것이다.

테슬라가 변화시킨 자동차 시장이 대표적이다. 지속적인 적자에도 투자자들은 테슬라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으며, 결국 테슬라는 내연차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기차를 필두로 에너지 저장 장치, 태양광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업을 통해 2020년 한 해 동안 총 500만 톤의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기여했으며, 2021년에는 동 수치가 840만 톤으로 증가했다. 이렇듯 실질적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일은 온실가스 감축을 포함해 친환경 성과를 창출하는 기업에게 소위 ‘돈쭐’을 내줄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을 계속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만 모든 친환경 성과를 화폐 가치화하고 이를 재무적 성과로 연계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기후 변화만 해도 전 지구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이슈고 온실가스가 유해 물질임을 많은 전문가들이 반복해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에 화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우선은 친환경 성과를 정량화하는 활동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 기업들은 이미 폐기물 절감량, 수자원 재이용량, 대기 오염 물질 저감량 등 주요 환경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측정하고 외부에 공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삼성전자를 포함해 현대자동차, LG화학 등 대기업들은 관련 정보를 매년 지속 가능 보고서를 통해 공시하고 있다.

특히 최근 온실가스에 대해서는 스코프 3(Scope 3·제품 생산 시 폐기물 처리, 전력 사용 등 기업이 통제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공정 영역)까지 온실가스를 측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임직원이 출장 시 사용하는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등 아주 미세한 것부터 가장 핵심적으로는 협력사가 배출하는 온실가스, 예컨대 금융 기관의 경우 투자 대상 회사가 배출하는 온실가스 등이 포함된다. 결국 해당 기업은 협력사와 투자 대상 회사에까지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기업의 환경 성과가 데이터베이스로 누적된다면 어느 기업이 규모 대비 더 나은 결과를 창출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모든 기업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동종 업종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사 규모의 기업 간 비교는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애플과 삼성전자가 각각 아이폰과 갤럭시를 한 대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지 비교하는 것과 같다. 다만 아직까지는 모델별 차이, 제품 수명 등의 변수를 통제한 동일 선상의 비교가 어렵고 판매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이러한 정보를 기업 스스로 공개하는 경우는 드문 게 현실이다.

따라서 반-기후, 반-녹색 활동을 하는 기업은 부정적 영향에 비례해 비용을 부담하고, 친-기후, 친-녹색 활동을 하는 기업은 긍정적 영향에 비례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정부는 제삼자 검토나 외부 감사 등의 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기후 금융과 녹색 금융에 자금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등 제도적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친-녹색과 반-녹색, 각각의 기준은 무엇인가? 혹은 두 얼굴을 가진 그린워싱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를 판단할 기준들에 대해선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자연에서 분해되지 않고 먹이 사슬을 통해 동식물 체내에 축적돼 면역 체계 교란· 중추 신경계 손상 등을 초래하는 유해 물질. 독성, 생물 농축성, 잔류성, 장거리 이동성 등의 특성을 가졌으며 대표적으로 다이옥신과 수은이 있다.
[2]
금전적 거래 없이 어떤 경제 주체의 행위가 다른 경제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효과 혹은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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