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1화

프롤로그 ; 트럼프가 던지는 곤혹스러운 질문들과 죄수 운동법

갈수록 헷갈리는 ‘트럼프 수수께끼’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를 살아가는 이들의 머릿속을 다시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트럼프를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피스메이커라고 칭찬하던 사람들은 합의된 일정을 일방적으로 깨는 돌발 행동에 당혹스러워한다. 반대로 트럼프를 그저 장사꾼이라 폄하했던 이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혼을 빼놓는 신출귀몰한 제갈공명이라 칭찬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트럼프를 잘 알 것 같다던 사람들은 오늘 다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트럼프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예측이 가능한 인물인 걸까? 바로 다음 에피소드의 전개도 알 수 없는 ‘미드’ 시리즈 같은 트럼프 드라마를 예측할 단서는 없을까? 다가올 미래를 담담히 맞이하기에는 한반도와 세계, 그리고 개인의 생존이 달린 중차대한 문제다. 트럼프는 그 자체가 수수께끼다.

하지만 나에게는 트럼프 수수께끼를 한 방에 해결할 수학 공식은 없다. 미국 정치 전문가 행세를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언론으로부터 트럼프에 대한 해설을 요청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주저하며 말을 더듬곤 한다. 전문가라는 자신감이 때로는 모호한 진리에 대해 곤혹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재능을 제거한다는 작가 파커 파머(Parker Palmer)의 경고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문가들의 논평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인물로 느끼는 트럼프는 계속해서 곤혹스러운 의문을 던지고 있다.

보통 미국 대통령들은 아무리 준비되지 않은 채 집권해도 차츰 적응하고 배워 나가며 생각을 바꾼다. 누군가는 이를 학습을 통한 성장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이를 배신이라 부른다. 역대 대통령 어느 누구도 이 물리 법칙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성장 혹은 배신과 무관하다. 트럼프는 이유 없는 반항기를 겪는 청소년처럼 기존 질서를 거부한다. 일부 정치 평론가들이 집권 이후에는 포기할 것이라 예견했던 중국 때리기와 미국판 만리장성을 고집스럽게 추진한다. 오직 단기적 실익만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티브 배넌(Steve Bannon)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Robert Lighthizer)를 통해 미국 안과 바깥으로 문명의 충돌을 추구한다.

트럼프는 도대체 수십 년간 단단히 구축되어 온 질서를 해체한 자리에 무엇을 건설하려는 걸까? 우리가 아는 자유 민주주의는 이제 에너지를 다 소진한 걸까? 트럼프가 상징하는 지금의 혼돈은 자유주의 질서에서의 일시적 반항과 일탈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으로 가는 한 시대의 끝일까? 걸출한 국제 정치 이론가인 존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는 자유 민주주의 질서는 조금만 수선하면 그 어떤 대안보다 건강하다고 자신한다. 반면에 전략가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은 무질서라는 새판 속에서 고립주의 미국이 홀로 번영하는 시대가 열린다고 단언한다.

트럼프의 광폭 행보가 오만한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중국까지 흔들자 최근 일각에서는 트럼프 신격화가 진행되고 있다. 두려움에 떠는 중국학자들은 트럼프의 기이한 행보를 천재 전략가의 포석으로 해석한다. 반면 여전히 트럼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국 리버럴(liberal)들은 미국의 장기 이익을 훼손하는 근시안으로 격하시키기 분주하다. 리버럴 성향의 심리학자들은 ‘개자식 이론(Asshole Theory)’이란 학문적 논거로 이를 뒷받침한다. 트럼프는 제갈공명인가 아니면 그저 개자식일 뿐인가?

우리를 감동에 젖게 한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우리를 눈살 찌푸리게 하는 트럼프의 위대한 미국 비전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하지만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현미경을 들이대면 ‘담대한 희망’과 ‘위대한 미국’이 생각보다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대통령은 하강하는 미국호의 연착륙을 준비하고 상승하는 중국을 억제한다는 공통의 화두를 가지고 있다. 오바마의 연설에 눈시울을 붉히던 나로서는 곤혹스럽지만 이런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오바마와 얼마나 다를까?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트럼프 현상의 선구자들은 수없이 많다. 최소한 근대 중반부터만 살펴보아도 백인 인종의 배타성에 근거한 반동적 포퓰리즘으로 민주, 공화 양당제를 뒤흔든 ‘1960년대의 트럼프’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가 있다. 반동적 포퓰리즘을 B급 할리우드 배우의 연기력으로 변주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80년대의 트럼프다. 반동적 포퓰리즘에 영화의 스토리텔링, 거대한 신진 정치 세력을 결합한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 하원의장은 90년대의 트럼프다. 이들 중 트럼프 현상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트럼프의 2020 대선 패배와 트럼프주의의 생존


심지어 트럼프의 어젠다에 뼛속 깊이 공감하는 지지 기반 세력의 일부인 고졸 이하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피로증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의 오해와 달리 2018년 중간 선거는 구조적으로 유리한 지형하에서도 트럼프가 패배한 선거였다. 트럼프는 사실 선거의 황제가 아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패배해 단임에 그칠 수도 있다.

문제는 설령 트럼프가 패배하더라도 그것이 트럼프주의의 패배는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제 어쩌면 오바마의 얼굴과 품위를 갖춘 트럼프주의와 더 힘들게 싸워야 할지 모른다. 혹은 오바마의 친절한 얼굴에 냉혹한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기업주의 제국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리버럴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가진 이들은 앞으로 한반도와 세계 질서의 미래에 대한 그들의 행보에 수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한반도를 살아가는 이들은 트럼프의 장기 집권을 염원한다. 한반도 평화 체제로의 지각 변동을 열었다는 점에서 트럼프에게 노벨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트럼프의 화려한 스펙터클 이벤트 이후 지루한 여정은 물론이고 트럼프 없는 미국의 갈팡질팡 행보를 예상해야 한다. 미·중 간 헤게모니 게임이 격화되고,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 행성의 파국이 예고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미래를 맞이해야 할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 자체보다 답을 찾기 위한 태도와 방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조금 엉뚱한 비유이지만, 나는 ‘죄수 운동법’으로 트럼프 시대를 읽어 내야 한다고 믿는다. 몸 근육 만들기에 흠뻑 빠진 내게 폴 웨이드(Paul Wade)의 책 《죄수 운동법(Convict Conditioning)》은 성경이다. 죄수 운동법은 죄수들이 거친 감옥에서 맨몸으로 트레이닝하는 방식을 말한다. 죄수 운동법의 요체는 세 가지 현장, 식별력, 융·복합이다.

우선 현장을 보자. 죄수들은 쿨한 헬스클럽이 없는 감옥이라는 거친 현장에서 체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세계는 수십 년간 다듬어져 온 자유주의 질서의 세상이 아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는 혼돈의 현장이란 점에서 거친 감옥 세계를 닮았다. 지성주의자들의 안락한 연구실 창이 아니라 거친 전사들의 쇠창살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려고 해야 하는 시대다.

둘째로 식별력이다. 죄수 운동법은 운동의 본질적 의도를 묻는다. 단순히 근육의 부피를 늘려 마동석처럼 보이게 하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실제로 체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목적인가? 값비싼 헬스 기구와 트레이닝 시스템이 없는 감옥은 눈에 보이는 근육 증강의 환상보다는 실제 체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차가운 겨울과 같은 트럼프 시대는 그동안 간과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기다. 지금 미국의 리버럴들은 이 식별력을 키울 중요한 겨울이라는 시간을 표피적 근육 증강에 빼앗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융·복합이다. 감옥에서는 월요일은 가슴, 화요일은 등 근육 같은 세부 프로그램을 돕는 기구들을 활용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철봉 하나만 있어도 동시에 모든 근육을 키울 수 있다. 탈근대 시기이자 전환기의 트럼프 시대는 세부 사항을 나누는 근대의 분절적 분석이 아니라 철봉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융·복합적 시야를 동원해야만 전체상이 보인다.

죄수 운동법이 지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주제라고 느껴진다면 주저 없이 나심 탈레브(Nassim Taleb)의 《안티프래질(Antifragile)》과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을 추천한다. 이 책들은 지성적 세계의 죄수 운동법이다. 탈근대 이론과 현장에 둘 다 능통한 나심 탈레브는 합리성, 질서, 경직성, 예측 가능성, 이론 교과서 등의 근대적 사고를 버리고 광기, 무질서, 탄력성, 불확실성, 현장 등의 탈근대적 사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많은 미국과 국내 지식인들이 트럼프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건 박사 논문 쓰듯이 트럼프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말하자면 시라소니 또는 정주영이다. 태권도 교본을 백날 연습해도 경기장이 아닌 길거리 싸움에서는 시라소니의 예측 불가능한 공격을 막아내기란 어렵다. 미국 명문대 교수의 경영학 교과서를 백날 읽어 봐야 정신 나간 짓처럼 생각된 정주영의 조선소 건립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광기와 협잡의 시장판 등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세상을 진보 교과서로 배운 리버럴일수록 트럼프는 기이하게만 보인다.

트럼프와 혼돈의 시대에 대한 보다 정치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려는 이가 있다면 철학계의 죄수 운동법 전도사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일 것이다. 니체는 마치 조커가 배트맨의 기성 기득권 질서 유지 시도를 비웃는 것과 같은 철학계의 조커다. 근대로 진입해서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과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있다. 기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비웃었던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아버지인 레닌은 인간의 광기와 불확정적인 정세 포착에 유연한 현장 이론가이기도 하다. 레닌이 좌파의 조커라면 슈미트는 우파의 조커다. 슈미트는 정통 리버럴이 중시하는 정교한 절차와 경쟁의 규칙이 사실은 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인간의 필연적 광기를 억지로 옷장에 밀어 넣은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다. 슈미트는 무기력하고 말만 무성한 의회 민주주의 대신에 활력과 열정으로 가득 찬 파시즘의 정치를 이론화했다. 슈미트와 레닌은 오늘날 트럼프와 시진핑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곤혹스러운 의문에 대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세계가 평평한 네트워크로 확장되던 제국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질서 이탈’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미국 국내 정치 사이클 중 질서 해체와 부조화 시기에 대한 스커러닉의 이 개념이 오늘날 국제 질서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본다. 과거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가 야심 차게 주장했던 자유주의 제국의 질서 속 평형은 이미 오래전 깨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백인 인종의 헤게모니와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 트럼프는 이 해체기를 상징하고 촉진하는 카오스의 제왕이다. 트럼프는 그저 미국인의 일시적 변덕과 호기심의 실험이 아니다. 트럼프는 자유주의 제국의 가식과 위선을 드러내는 정치의 조커다. 마치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배트맨이 보호하려는 온정적 자유주의 질서에 대해 신랄하게 야유하듯이 말이다. 물론 충동적이고 자기애에 가득 찬 ‘개자식(asshole)’ 심리 유형인 트럼프는 흔히 그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분석과 달리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질서 이탈 시대정신의 우연한 스피커인 트럼프는 그간 조 말론 향수로 숨겨 온 자신과 미국의 온갖 악취를 드러내며 기존 질서의 붕괴를 촉진할 것이다. 우아한 명언을 남기며 사라진 맥아더 장군이나 결국 시대 질서에 순응하며 내려온 닉슨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는 그냥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트럼프와 반트럼프 진영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내전은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다.

트럼프 시대 이후의 미국은 향후 진로를 놓고 세 정치 세력의 사활을 건 패권 다툼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더 예의 바른 트럼프가 주장하는 문명 충돌론, 더 왼쪽으로 이동한 오바마 유형의 기업주의 리버럴, 기존 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 뉴욕 하원의원으로 상징되는 포스트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력이 그들이다. 국제적으로도 미국 앞에는 혼돈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제국의 팽창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낙관주의도 오류지만 세계 문제에서 철수하고 자족적으로 번영하는 미국이라는 자이한의 또 다른 낙관주의 또한 가능성이 낮다. 과연 현실주의자인 스티븐 월트(Stephen Walt)가 주장하듯이 미국은 개입과 억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월트의 바람과 달리 오히려 미국과 세계는 기후 변화와 양극화라는 난제 속에서 부단히 좌충우돌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권은 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실험하며 갈등과 혼돈을 겪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혼돈과 질서 이탈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에는 새로운 상상력, 사상, 어젠다 및 태도의 무장이 시급하다. 이제 한국의 진보와 보수들은 자신의 방을 가득 채운 ‘심리적 고물’들을 정리의 여왕, 곤도 마리에(近藤麻理恵)처럼 과감히 내다 버려야 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광범위하지만 사실은 본격적인 답을 정리하기 이전의 생각 메모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깊이 있는 주제의 단행본을 준비하던 중 이 책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트럼프에 대한 짧지만 종합적인 리포트가 오늘날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일 수 있다는 김하나 에디터의 끈기 있는 설득이 없었다면 감히 시도하지 않았을 책이다. 나는 앞서 2016년 미국 대선 캠페인 초기에 펴낸 책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에서 거대한 문명적 전환이 어떻게 기업주의 국가론의 힐러리와 백인의 황혼기로 돌아가려는 트럼프의 대격돌을 낳았는지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에는 앞선 문제의식과 핵심 주장들이 전반적으로 녹아 있다. 기본적으로 위 화두를 견지한 채 트럼프의 그간 몇 년을 돌아본 단상이다. 여기서 던진 질문들을 나는 앞으로 수년간 답을 만들어 가는 여정에서 하나의 등대로 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나의 글의 친절한 첫 편집장이자 엄격한 멘토인 이주영 님에게 동반 여정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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