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3화

천재 협상가인가, 개자식인가?

“이 영화는 인생이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영혼이 없다는 걸 말하고 있다. 영화의 중심 테마는 최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사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영화 〈살인마 잭의 집〉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중국의 트럼프 공포 신드롬


2018년 6월 한 중국학자의 대학원 졸업사가 큰 화제가 됐다. 지린(吉林)대학 경제 금융 대학원 리샤오(李曉)는 중국이 미국이라는 “세계 제1의 패권국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연구”가 부족했다고 처절한 반성을 내놨다. 그는 또 “세심하게 생각하고 설계하며 논리가 매우 명확한”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의 탁월함을 과소평가했다며 반성했다. 이 연설문은 순식간에 SNS를 통해 회자됐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트럼프의 탁월함을 꿰뚫어 보는 그의 높은 식견과 솔직한 반성에 찬탄을 보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샤오의 트럼프에 대한 과거 과소평가와 오늘날 과대평가의 극과 극 전환은 미국을 잘 모르는 이들의 전형적 심리 반응이다. 트럼프는 리샤오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래를 치밀히 내다보는 설계자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아우라와 오만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축 통화와 첨단 무기의 힘이 이런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트럼프는 단지 이 후광을 등에 업은, 카오스의 시대에 걸맞은 천부적 동물적 감각을 가진 ‘개자식’일 뿐이다.

왜 사람들은 트럼프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혹은 반대로 과대평가할까? 우선 과소평가하는 심리에는 리버럴 지식인들의 편견이 스며들어 있다. 과거에 레이건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마이클 로긴(Michael Rogin)이란 리버럴 성향의 학자는 책 《로널드 레이건, 더 무비(Ronald Reagan, the Movie: and Other Episodes in Political Demonology)》에서 레이건은 자신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환상 속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황당하게 들리지만 어느 정도 진실이기는 하다. 당시 미국의 리버럴은 할리우드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마초 흉내나 내고 잠이나 많이 자는 B급 배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 상해하곤 했다. 하지만 균형감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레이건은 연기력뿐 아니라 시대의 결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진 정치가였다. 재선 이후에는 실용주의적 태도로 고르바초프와 손잡으며 소비에트와의 냉전을 극적으로 완화시켰다. 이는 이후 부시 시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토대였다.

물론 트럼프는 B급 영화배우를 넘어 쇼맨십이 화려한 프로 레슬링 선수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늘을 찌르는 리버럴들의 분노를 이해할 만하다. 미국과 한국의 리버럴 지식인들은 트럼프의 허장성세와 품위 없는 언사에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트럼프가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미국 체제의 불편한 진실에는 눈을 감는다. 그저 리버럴이 다시 집권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보수적 믿음을 가질 뿐이다. 사실 오바마보다 트럼프가 미국 체제의 누적된 위선을 더 잘 드러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리버럴의 합리주의와 지성주의 스타일은 트럼프식 진흙탕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이 가지는 어두운 그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뉴욕 맨해튼의 멋진 카페에 앉아 저 멀리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 지대)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열성 지지자들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트럼프에 대한 과소평가에는 이들 리버럴의 오만이 한몫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트럼프가 집권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과소평가하는 이들보다 과대평가하는 이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고정 관념이 온통 흔들리고 나니 또 다른 극단으로 쏠린다. 중국 지식인의 과잉 반성은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하지만 과대평가는 미국이라는 체제가 정교하게 짜인 음모와 천재적 전략으로만 굴러간다고 믿는 오래된 음모론의 변종이다. 미국 체제의 작동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미국이 때로는 엘리트들의 음모와 때로는 엘리트들의 바보 같은 착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클린턴 대통령은 우쭐해했지만 그는 매번 고립주의와 개입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당시 미국의 중동 정책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마틴 인딕(Martin Indyk)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의 외교 안보 스타일을 순진함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오죽하면 책 제목을 《국제 관계에서의 순진함(Innocent Abroad)》이라 붙였을까?

미국의 이러한 특성은 미국 체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온다. 미국은 북한과 달리 한순간 외교에서 실수해도 망하지 않는 ‘세계 국가’다. 물론 중국처럼 아래로부터 엄청난 단련을 거치며 한 단계씩 승진해 올라온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아니라 선거에서 퍼포먼스로 하루아침에 뽑힌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다. 오히려 준비된 대통령은 미국 정치에서 극히 예외다. 다만 미국 특유의 탁월한 실용주의 문화 속에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보좌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어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체제가 결함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중국의 체제가 일사불란하게 아래로부터 단련되었다 하더라도 선거를 거쳐 민심에 대한 반응성 및 정치적 근육을 키운 대통령과 그를 견제하기도 지원하기도 하는 공화국의 시스템이 훨씬 더 내구력이 있을 때가 많다. 미국에서도 타자인 소련과 중국의 지도자들을 천재 전략가이자 음모가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비밀 자료들의 보안이 해제되면서 이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오만했는지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매우 노회하다고 평가받았던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yov)의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응 과정에서의 수많은 실수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1]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지적처럼 우리는 잘 모르는 타자에 대해 뭔가 체계적이고 무서운 음모가 있는 것처럼 환상의 틀을 구성하기 쉽다. 트럼프라는 부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설명하기 힘든 존재의 부상은 트럼프에 대한 온갖 두려움과 환상을 만들어 냈다. 과거 부시 시절도 그랬다. 부시 대통령이 정상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무시한 에피소드에 대해 어느 기자는 나에게 음모론적인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의 답변은 부시가 그저 무례한 스타일이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노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반동적 포퓰리즘과 트위터 하이쿠의 환상적 조합


사실 트럼프는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시대의 분위기와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탁월하게 꿰뚫는 눈을 갖고 있다. 트럼프는 걸출한 포퓰리스트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샹탈 무페(Chantal Mouffe)라는 포퓰리즘 이론가의 수업을 좋아했는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포퓰리즘에 대한 왜곡된 정의를 바꾸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다 결국 포기했다. 한국에서 여전히 포퓰리즘은 인기 영합주의 정치가에게 찍는 주홍글씨다. 세계 학계의 보다 정확한 정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을 기득권으로 간주된 세력에 대해 국민이라는 집단의 반발을 동원하는 정치의 한 유형으로 본다. 만약 그 기득권이 자본이면 월가 시위와 같은 좌파 포퓰리즘, 기득권이 강남 좌파이면 티 파티 운동과 같은 우파 포퓰리즘이 나타난다. 이 정의만을 보면 포퓰리즘은 매우 상식적인 정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다. 여기서 민주주의(democracy)란 인민(demos)의 동원과 관련되어 있다. 포퓰리즘은 필연적으로 이 자유 민주주의 공식 어딘가에 내재한다. 이를 억지로 자유 민주주의 정치 바깥으로 몰아내려 하면 어두운 구석에 숨거나 반드시 귀환해서 복수한다. 무페는 최근 포퓰리즘도 국민 일반이라는 모호한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다원적 세력의 공존에 기반해 기득권과 싸우는 좋은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더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나는 트럼프를 포퓰리즘의 유형 이론에 근거해 ‘반동적 포퓰리즘(Reactionary Populism)’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반동적이란 시대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담론이란 의미다. 반동적 포퓰리즘은 양극화의 고통과 삶의 방식의 파괴에 대한 당혹감을 타자에 대한 폭력과 좋았던 시절에 대한 환상, 이를 대변한다고 믿는 위대한 정치가로 해결하려 한다. 파커 파머는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한다.

“이따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 자신의 고통이 완화되기라도 하는 양 그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 광적인 전략은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그리고 가난한 이에 대한 경멸 같은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2]

비통에 빠진 사람들은 타자 배제 전략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위대한 과거와 연결되려고 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는 자신의 자아를 넘어 위대함에 연결하고자 하는 큰 정치이자 일종의 영성 정치다.

영성과 트럼프? 물론 어색한 조합이다. 하지만 영성이 별것인가? 영성이란 무언가 위대한 실재에 연결되려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천박하고 무지하다고 경멸하는 힐러리와 같은 지성주의자들은 비통한 자들이 땅 위에서의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위대함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트럼프는 비록 품위 없고 혐오스럽지만 나름대로는 영성으로 가는 특급 열차다.

이러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대표적 교과서는 레이건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모델인 레이건 대통령은 당시 뉴딜 진보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이들 리버럴 엘리트들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였다. 한국에서 《조선일보》가 성공적으로 마케팅한 강남 좌파론이란 레이건의 리무진 리버럴을 베낀 것이다. 레이건은 노조, 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들을 괴물로 몰았다. 그들과 대비하여 가족의 가치와 같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며 아름다웠던 복고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도대체 어떤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걸까? 동성애자가 없고(물론 그들의 눈앞에) 남성이 지배자이고 흑인이 노예였던 그 ‘아름다운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아름다운 시절은 미국이 잔혹한 패권을 마구 휘두르고 동맹국들이 얌전하게 무임승차하던 때를 의미한다. 레이건은 플라자 합의(더 정확하게는 압박)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팔을 비틀어 일본의 부상을 꺾어 버렸다. 또한 레이건은 소비에트와의 냉전에서 유럽 동맹을 장기판의 말처럼 여겨 약한 자를 괴롭히는 국가라는 오명까지 받기도 했다.[3]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트럼프는 이미 오래된 미국의 불리(bully·약자를 괴롭히는 학생) 전통을 복원한 것뿐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레이건의 구호를 (Let’s만 빼고) 천연덕스럽게 자기 브랜드로 만들었다. 사실 트럼프는 오늘날 극단적 양극화로 고통받고 진보적 가치의 확대 속에서 피로감을 느낀 저소득층 대중의 분노와 혐오를 잘 읽어 냈다. 트럼프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인민들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듯이 대중을 기막히게 자극한다. 소수자들과 멕시코 이민자 등 타자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을 활용해서 스토리를 짜고 국경 장벽이라는 상징의 정치로 전화(轉化)시킨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월가 인민 반란과 이를 선동하는 악당 베인은 트럼프 현상을 예고한 것처럼 잘 보여 준다. 물론 트럼프는 집권하고 나서 최대의 업적으로 부자에 대한 감세 조치를 꼽고 있지만 그의 열성 지지자들은 ‘억만장자 포퓰리즘’이란 기묘한 단어 조합이 가지는 모순에 눈을 감는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운동이다. 캠페인 시절 트럼프가 자주 언급한 단어는 ‘에너지’였다. 내 기억으로 미국 양당 대선 캠페인 역사상 에너지라는 단어가 그렇게 자주 등장한 건 처음인 것 같다. 마치 UFC 대회를 연상시키는 단어에 다른 대선 주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공화당의 지성주의 후보인 젭 부시(Jeb Bush)는 트럼프가 에너지 레벨이 낮다고 비판할 때 황당한 표정을 짓곤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이 에너지라는 키워드야말로 트럼프 포퓰리즘의 역동성을 제대로 보여 준다. 포퓰리즘은 지성주의적 운동이 아니라 기성 체제에 대한 혁명적 열정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수미(Brian Massumi) 등은 이를 정동 정치(Politics of Affect)라는 개념으로 잘 표현한다. 미국의 합리주의 철학 전통에서는 이 육체의 꿈틀거리는 분노와 열정의 표출에 담긴 혁명성을 읽어 내기 어렵다.

트럼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이 떠오른다. 〈파이트 클럽〉은 파시즘의 매혹을 다루는 영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에 억눌린 에너지의 남성적이고 폭력적 표출을 보여 준다. 나는 이 영화를 좌파 급진주의로 해석하는 지젝을 이해하기 어렵다. 금융 독점 자본에 대한 분노와 테러리즘을 선동하는 것은 좌파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 나치즘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 남성들의 폭력에 대한 광기 어린 매혹은 트럼프를 쉽게 연상시킨다. 북한 같은 소위 불량 국가를 상대로 미치광이로 행동해야 한다는 광인 이론의 트럼프 말이다.

물론 트럼프의 독자적 발명품은 하나도 없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레이건의 발명이라면 광인 이론은 닉슨의 발명품이다. 다만 닉슨은 광인처럼 행동하려 한 계산가였지만, 트럼프는 광인과 ‘광인처럼’의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움직인다. 닉슨은 압박 전술과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는 압박의 차이를 이해했지만 트럼프는 이 미묘한 차이에 관심이 없다. 리샤오는 세심하게 설계하는 사업가 기질의 트럼프를 말했지만 사실 트럼프의 장점은 이 세심하지 않은 광기에 있다. 주한 미군 가족들에 대한 본국 소개령을 지시하려 했던 트럼프는 압박 전술과 실제 우발적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는 미친 짓의 차이를 구별할 줄 모른다.

트럼프가 광인 이론에 능한 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공포라는 걸 야수의 본능으로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 캠페인 시절 힐러리와의 토론을 보면 그는 하이에나를 닮았다. 힐러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혐오스러운 입김을 내뿜는 트럼프를 소름 끼쳐 했다고 한다. 사실 힐러리와의 토론에서 잠시 보여 준 모습은 트럼프가 살아온 역사의 압축판이다.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 항상 먹잇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맴돌다가 야비하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먹잇감에 달려들었다. 만약 공포 전략이 소기의 성과를 내면 만족해서 물러선다. 자기 배가 어느 정도만 채워지면 주변에 먹잇감이 추가로 있어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머지 작은 고깃덩어리들(세부 협상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대선과 대통령 임기 중에 본 트럼프의 모습은 과거 사업가 시절의 재판(再版)에 불과하다. 그는 예를 들어 먹잇감으로 설정한 별장을 직접 사지 않고 주변에 자기 건물을 세워 경관을 해치는 덫을 놓고 별장 가격을 떨어뜨려 상대를 외통수로 몰아넣었다. 그러고 나서 먹잇감을 싼값에 낚아챘다. 우리는 똑같은 행태를 주한 미군 철수 협박으로 방위비 협상을 외통수로 몰아가는 행태나 전쟁 위협을 통한 북미 협상 혹은 협상 일정 파기 등에서 반복적으로 목격한 바 있다.

트럼프의 가공할 포퓰리즘의 연료가 분노와 광기, 그리고 공포의 동물적 에너지라면 분노를 실어 나를 ICBM은 트윗이다. 물론 이 또한 트럼프의 발명품은 아니다. 트럼프가 아니라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제 역사상 최초의 SNS 대통령이었다. 오바마는 최저 임금 논쟁 당시 ‘당신도 한번 그 돈으로 살아 보라(Go Try It)’라는 감동적인 트윗으로 정세를 돌파했다. 인종 갈등과 총기 규제 논쟁으로 이어진 흑인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 추도식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부르는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확산되면서 초당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오바마의 SNS 활용이 리버럴다운 지성주의적 메시지라면 트럼프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조커처럼 리얼리티 쇼와 SNS의 어두운 파괴력을 제대로 분출시킨다. 트위터 사용에서도 다크 나이트 오바마와 조커 트럼프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셈이다.

레이건의 퍼포먼스가 싸구려 감동을 주는 B급 할리우드 영화의 재현이라면 트럼프의 트윗은 미국 드라마를 닮았다. 트럼프의 퍼포먼스에서 총감독과 연출, 마케팅은 모두 트럼프가 담당한다. 소재는 폭스 채널과 CNN에서 귀신같이 낚아챈다. 대략 각본이 구상되면 ‘미드’처럼 자극적인 사전 마케팅으로 출발한다. 트럼프는 본격 개봉하기도 전에 이미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시간 파괴의 미드 문법에 충실하다.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면서 터득한 테크닉이다. 트럼프는 그 짧은 트윗 메시지 안에 그의 지지 기반이 열광하는 강렬한 분노와 어두운 혐오, 비틀린 조롱의 메시지를 명징하게 담는다. 메시지를 발사하고 나서는 어떤 게 먹히고 어떤 게 안 먹히는지를 자체 분석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소재 거리를 찾아 폭스 뉴스 채널과 CNN 채널을 하이에나처럼 배회한다.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탁월하게 표출하는 〈블랙 미러(Black Mirror)〉나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시리즈의 제작 과정을 보는 것 같다.

레이건과 트럼프의 공통점은 대중의 사랑을 갈구하는 배우 기질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리버럴 진영에서는 클린턴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트럼프는 심리학자 애런 제임스(Aaron James)의 지적처럼 청중들이 자기를 얼마나 혐오하는지에 무감각한 ‘관종(관심 종자)’ 캐릭터에 가깝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약간씩 강조점이 다르다. 데이비드 로스코프(David Rothkopf)가 지적하듯 케네디와 부시 가문은 대통령직을 마치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 운명을 중시하는 가문 출신으로 트럼프와의 싸구려 연기 경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의 귀족주의적 성향으로서는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싸움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트럼프의 가장 큰 강점은 입에 착 달라붙는 메시지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능력이다. 리버럴은 트럼프의 트위터를 그저 왕자병 환자이자 ‘초딩’ 수준의 어법이 드러나는 취미 생활로만 본다. 너무 증오하는 나머지 트럼프의 탁월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트럼프의 트윗을 볼 때마다 그의 시적 재능에 감탄한다. 마치 짧은 몇 줄의 강렬한 시구로 이루어진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보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렇게 사태의 본질을 명징하게, 그러나 어둡게, 그리고 자기 위주로 포착하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이 하이쿠는 출시될 때마다 의회를 우회해서 세상을 흔들고 지지 기반을 다진다. 하이쿠에 의한 대중 호소(going public)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우연히 뉴욕 스트랜드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저자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로버트 시어스(Robert Sears)라는 작가는 2017년 트럼프의 트윗 메시지를 재구성해 《도널드 트럼프의 아름다운 시(The Beautiful Poetry of Donald Trump)》라는 단행본을 냈다. 만약 김정은이 트럼프를 더 자세히 알고 싶고, 협상에서 최종 승리하고 싶다면 이 시 모음집을 프로이트의 자세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이 시집을 김정은에게 강력 추천한다.

 

개자식 자본주의가 낳은 포퓰리스트 배우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의 시대 분위기에 대한 감각과 포퓰리스트 배우로서의 동물적 재능이 그의 성격 유형과 조합되면 다양한 변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애런 제임스는 2016년 출간한 《개자식 - 도날드 트럼프 이론(Assholes - A Theory of Donald Trump)》에서 트럼프의 성격 유형을 개자식 이론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저속한 비난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개념 정의다. 제임스에 따르면 개자식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아주 일관되게 자신의 특권을 추구한다. 둘째, 자신은 애초부터 특별한 자격을 지닌 인간이라는 왜곡된 관념에 의해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고 사과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저자는 우체국에서 급한 상황도 아닌데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새치기하거나 세 차선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인간이면 틀림없이 이 성격 유형이라 진단한다. 트럼프는 자신이 부자이고 승자이며 최고이기에 초월적 자유를 가진다고 진정으로 믿는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보다 더 적절하게 트럼프를 묘사하는 개념을 본 적이 없다. 세상에, 자신의 기존 발언이 녹화된 영상을 눈앞에 놓고도 태연하게 가짜 영상이라 주장하는 대통령은 아마 트럼프가 유일할 것이다. 푸틴도 그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다.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분석을 엮은 책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를 보면 다른 정신과 의사들도 대체로 트럼프가 병적인 나르시스트라는 비슷한 진단을 내리는 것 같다.

제임스는 다만 트럼프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이코패스 유형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이들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아예 제로이며 고양이가 쥐를 죽일 때와 같은 뇌파를 가진 자들이다. 트럼프는 밉상이지만 그런 인간 말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때로는 소박하고 솔직한 태도에 인간적 매력을 풍기기까지 한다. 생각해 보라. 왜 우리는 경멸하면서도 계속 트럼프 트윗의 다음 메시지를 확인할까? 당신은 힐러리와 트럼프 중 굳이 선택한다면 누구와 기차 여행을 떠나겠는가? 힐러리 여사 옆에서 지적인 강의를 들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지루해진다.

트럼프보다는 덜 매력적이지만 과거 뱀 같다는 수식어가 붙었던 딕 체니(Dick Cheney) 전 부통령, 동료 의원들의 기피 대상 1호인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Ted Cruz) 상원의원 등 워싱턴 정가에는 개자식 유형이 널려 있다. 사실 이 개자식 유형은 미국 문화 최악의 경향들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라파이유(Clotaire Rapaille)라는 인류학자는 저서 《컬쳐 코드》에서 미국을 청년기 특징을 가지는 나라라고 통찰력 있게 규정한 바 있다. 청년기 남성은 보통 에너지가 넘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서 충동적이고 극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폭력적이다. 물론 청년기에는 장점도 많다. 오늘날 미국이 노년기 일본과 달리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실험적인 특성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이유다. 다만 부정적 측면이 극단적으로 발현되면 트럼프가 되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유사하게 미국 문화의 가장 삭막한 특징인 “사춘기의 충동성, 부와 권력에 대한 고삐 풀린 탐욕, 폭력 취향, 못 말리는 자기애, 그리고 엄청난 오만”을 트럼프가 구현한다고 적절히 지적한다.[4] 남성 사춘기의 충동성과 폭력성에 자본주의의 부정적 기질이 결합한 셈이다. 제임스는 이를 ‘개자식 자본주의’라 명명한다.

트럼프의 시대 분위기를 포착하는 감각과 포퓰리스트 배우로서의 기질이 개자식 캐릭터와 잘 조합될 때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력한 자신감과 사과할 줄 모르는 캐릭터는 카리스마적이고 마초적인 포퓰리즘 퍼포먼스와 무척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와 자기애의 퍼포먼스가 빠진 포퓰리즘은 마치 지루한 목사의 연설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트럼프 지지자들 중 일부 광적인 이들은 트럼프를 마치 예수의 재림으로까지 생각한다.

레이건의 마초 연기는 자신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라고 생각했기에 진정성이 있었다. 질서와 법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의 연기는 보수적 중산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트럼프는 자신을 천재 전략가이자 비전가로 생각한다. 그 연기는 진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지지자들에게 불패의 믿음을 준다. 비록 사업에서도 실패했고 중간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지지자들은 그를 불패의 화신이자 미국을 위대한 시대로 돌려줄 유일한 대안으로 믿는다. 탈레브가 《스킨 인 더 게임》에서 지적하듯이 실패해 본 경험이 오히려 트럼프를 박제된 리버럴보다 더 현실감 있는 인물로 만든다.

하지만 트럼프의 포퓰리즘과 개자식 기질의 조합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실리를 잃어버린다. 기존 기득권을 타파하는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오바마의 환태평양 공동체 협정(TPP)을 잘못된 세계화의 전형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고립시키고 중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중국의 거친 제국 확장 전략은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고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5]에 대한 반발만 일으켰지만 말이다. 트럼프는 또 주변 참모들과 긴밀한 상의 없이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의 절반 감축을 명령해 탈레반과의 협상력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성급한 발 빼기는 그간 불완전하게 형성되어 온 민주화와 인권의 기반이 훼손될 가능성에 무감각한 태도다.[6] 시리아에서 철군한다는 트럼프의 즉흥적인 발언에 당황한 참모들은 트럼프의 말을 부인하고 점진적 철수 입장을 밝혀 미국 국가 안보 시스템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보여 준 바 있다. 이 혼란은 미국과 이란의 기존 협상안 거부까지 결합해 중동에서 러시아, 중국의 영향력을 키워 주고 트럼프 정부를 중동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만 낳았다. 트럼프 시대에 들어 중동은 3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될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의 이러한 포퓰리스트적 충동과 개자식 기질의 부정적 조합은 냉정하게 실익을 계산하는 상대와의 협상에서는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1]
안병진, 《예정된 위기 -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모던아카이브, 2018.
[2]
파커 J. 파머(김찬호·정하린 譯),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글항아리, 2018, 218쪽.
[3]
David Rothkoph, 《Running the World: The Inside Story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and the Architects of American Power》, 2005, p. 224.
[4]
파커 J. 파머(김찬호·정하린 譯),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글항아리, 2018, 173쪽.
[5]
일대일로란 중국 주도의 ‘신(新)실크로드 전략 구상’으로, 내륙과 해상의 실크로드 경제 벨트를 지칭한다. 2014년부터 2049년까지 35년간 고대 동서양의 교통로인 현대판 실크로드를 다시 구축해, 중국과 주변 국가의 경제․무역 합작 확대의 길을 연다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2017년 현재 100여 개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다. 내륙 3개, 해상 2개 등 총 5개의 노선으로 추진되고 있다.
〈일대일로〉, 《중국 현대를 읽는 키워드 100》.
[6]
Antony J. Blinken, 〈No People. No Process. No Policy.〉, 《The New York Times》, 2019.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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