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6화

고위험 에너지의 재배치

 

무기력을 되풀이하다


혐오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사실 세대나 성별 집단의 일부다. 다수는 혐오 운동에 참여하기보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울타리 안에 머무르고자 한다. 콜린스는 사회적 유대가 느슨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서 무대 뒤의 인성, 즉 사생활 지향성이 발견된다고 한다.[1] 일상생활에서의 차별 경험으로 인해 을의 의식을 탑재하는 한국인에게서는 광범위한 무대 뒤 인성이 발견된다. 무대 위에서는 남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기한다. 자기소개서에 매사에 적극적이고, 남들과 잘 어울리며, 호기심과 열정을 겸비하고 국제적인 소통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잘 팔리는’ 인성을 펼쳐 놓는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소극적이고 무력한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기술(self-description)은 바람직한 인성에 대한 답안을 차용하는 과정이라는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의 관점에 따르면, 자기소개서는 기업에서 바라는 인물상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2] 자기소개서는 획일화된 방식으로 자신의 인성을 상품화하여 내다 파는 것이다. 그러나 잘 포장한 상품으로서의 인성이 공적 시장에서 인기가 없고 이윤을 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패배감을 느낀다. 자신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라는 가치가 폐기 처분되는 기분이 들어서다. 잘 팔리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포장할수록 개인은 시장의 가치에 더 순응하는 존재가 되며 동시에 무력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회학자 정수남과 김정환은 중·하층 청년들이 공적 영역에서 유리되어 무대 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3] 중간층의 청년들은 장기간 실업 상태에서 의지를 잃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진짜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목표를 낮추면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며 가족의 지원에 기대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자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한편, 연이은 실패로 정규직이 되기를 포기한 하층 청년들은 비숙련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 불안정 일자리가 지속되는 생애 궤도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자리가 반복 교체되는 현실에서는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약해지고, 직업을 통해 인격을 완성해 나가는 근대적 인간의 열정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는 청년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열심히 일했으나 회사에서 버림받고, 퇴직 후에는 성공 확률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자영업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중년 세대도 공적 영역에서 타인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몰개성적인 인격을 탑재하고 사는 대신, 무대 뒤의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인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한국과 같은 상황을 더 일찍 경험한 일본에서는 고도 성장기 이후 1990년대 경기 침체 속에서 성장한 청년을 사토리(悟り) 세대라고 부른다. 깨달음을 얻은 청년들이라는 뜻의 사토리 세대는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데 관심이 없고, 자동차나 내 집 마련, 연애, 여행,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 사는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 지수는 최근 40년 중에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寿)는 그 이유를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 명료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 청년들이 택한 방법은 무관심이나 묵인이었다. 이들은 조그만 마을에 사는 사람들처럼 동료들이 모인 온라인 속 작은 세계에서 재미를 발견하고 행복해한다.

한국 청년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며 노력하는 인간형을 냉소하고, 무언가에 몰입하다가도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는 말로 체념해 버린다.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고 휘게(hygge), 욜로(YOLO), 채식주의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한다. 이들에게 평범한 삶이란 소박함, 순수함, 탈세속 등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 윤리적이며 순응적인 모습이다.[5] 기성세대의 거대 담론에 담긴 청년의 이미지가 아니라 거창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은 휴대 전화나 온라인 서비스로 만들어진 무대 뒤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친구 개념으로 연결된 소규모의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간다. 늘 서로에게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강렬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사람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소셜 미디어 프로필이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수시로 상태를 알리고, 익명의 문답 공간인 애스크에프엠(Ask.fm)에서 상대의 반응을 확인한다. 어떤 이들은 유튜브 영상을 직접 제작하고, 어떤 이들은 게임 공간에서 팀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로 성장한다. 사생활 공간에서 저마다 안전한 방식으로 정체성 놀이를 하고 있다.

가상 공간에 몰두해 있는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생애 단계에 적합한 모험을 해나갈 것을 요구한다. 아동기에는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연습하고, 청소년기에는 타인과 관계 맺는 기술을 습득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성년기에는 독립을 통해 자신만의 친밀한 관계, 가족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난생 처음 해보는 위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청년 세대에게는 모험을 감수할 만큼의 확신이 없다. 인간의 성장에는 모험으로 비유되는 불확실성이 교차한다. 모험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긴장으로 가득한 모험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삶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6] 유동하는 사회에서 통제감을 상실한 청년에게 모험은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이들은 대신 액체 괴물이나 자율 감각 쾌락 반응(ASMR) 영상, 성의 없이 대충 그린 느낌의 밍밍이 이모티콘, 고독한 채팅방 등 무가치해 보이고 평범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들을 무민 세대(한자 없을 무無와 의미를 뜻하는 영단어 mean의 합성어)라 부르는 이유다.

 

을들의 전쟁을 넘어서


불안에서 비롯되는 수치심, 무력감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혐오의 정치 운동을 만든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많은 정치 운동은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민주주의의 장을 열기 위한 저항적 사회 참여였다. 시대 상황과 세대의 감수성이 맞물려 절박한 저항의 자세에서 벗어난 새로운 참여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활약,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국에서의 촛불 시위, 2016년 국정 농단 사건에서 촉발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세대는 문화, 쾌락, 개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유형의 참여 문화를 만들었다.[7]

그러나 이제는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한 가운데 혐오의 정치 운동이 부상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꿈꿀 기회를 박탈당하고,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에 옥죄이고 있는데도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8]거나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는 말로 저항의 주체가 되기를 종용한다.[9]

이제 변혁의 주체인 청년은 없다. 대부분의 청년은 보통의 삶을 소망하며 자기만의 작은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부정의한 현실에 저항하는 대신 인접 집단에 대한 혐오를 강화해 간다. 현재 세대 갈등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대적 경계와 계급적 경계가 혼재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성세대 안에는 상층 노인 대 하류 노인이라는 격차가, 청년 세대 안에는 금수저 대 흙수저라는 격차가 존재한다. 상층 노인(부모 세대)이 금수저(자녀 세대)에게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대물림하는 것이 계급 재생산의 논리였다. 그리고 최근 세대 갈등으로 지적되는 집주인 노인과 세입자 청년의 격차, 즉 근로 소득보다 부동산 임대나 금융 자산을 통한 가계 소득의 차이로 벌어지는 빈부 격차는 상층 노인과 흙수저 청년 사이에 분배를 두고 벌어지는 계급 갈등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청년이 연금충, 틀딱충 등으로 부르는 노인은 연금에 목숨 걸고, 지하철을 타고 다닐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흙수저 청년과 동일한 계급에 놓여 있는 하층 내부의 노인들이다. 노인들은 이들의 막말에 상처를 받고, 자신들의 청년 시절과 비교하여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요즘 것들’을 비난한다. 결국 세대 갈등에서 상층 노인은 사라지고, 갈등은 하류 노인과 흙수저 청년 사이의 인정 투쟁으로 변모한다.
불평등과 불안이 중첩된 현실 속에서 인정 투쟁은 세대 간의 단절과 혐오로 번진다. 세대만이 아니라 결혼, 외모, 취향 등의 미시적 차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계들이 생성되며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있다. 사람들을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도와주고, 바람직한 거래나 교환을 촉진하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집합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이 신뢰다.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득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지 않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내가 오늘 베푸는 혜택이 미래에 보상받으리라는 확신, 상대방이 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9]

그러나 경계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신뢰가 줄고, 협력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저항적 사회 참여를 위해서는 다수 개인의 사심 없는 협동인 신뢰가 필요하다. 저항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 경쟁, 공정한 성과의 배분에 대한 의구심 속에 점차 줄어들고 있다. 생계와 취업, 결혼, 퇴직, 노후로 이어지는 생활 불안과 전쟁, 범죄, 기후, 재난과 같은 구조 불안은 직접적으로 정치적, 저항적 사회 참여를 감소시킨다. 이제 개인을 보호하고 사회적 관계를 중재했던 사회는 사라졌다. 마치 자연 상태와도 같이 방치된 개인에게는 저항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저항하는 대신 국지적인 영역에서 혐오를 실천한다.

심리학에서 개인이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껏해야 여덟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10] 직접 문제에 맞서 해결하는 방법 외에는 모두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와 연결되어 있다. 문제 해결은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는 합리적 행동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신의 행위로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은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낀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불안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성숙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긍정 강화’라는 방법, 지금의 불안이 없었을 상황을 상상하며 극복하려는 ‘소망 사고’의 방법, 음주, 폭식, 도박이나 복권, 일에의 몰두, 폭력과 같은 방식을 택하는 ‘긴장 완화’의 방법 등을 사용한다.

태극기 노인이나 일베는 노스탤지어라는 소망 사고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분노를 전환하는 방식을 택하며, 집단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삶의 에너지를 고양하고자 한다. 메갈리아나 워마드의 여성 운동도 기성세대의 페미니즘 운동이나 남성과의 거리를 두고, 협소한 집단의 도덕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이들의 집합 운동에 동력이 되는 에너지는 분노나 회한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고위험 에너지다.

집단적으로 혐오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과 달리 대다수의 불안한 사람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거나 자책과 고립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된다. 고립은 사회적 의미의 상실로 인한 우울과 자기혐오라는 또 다른 부정적 에너지로 축적될 수 있다. 개인 수준에서 불안의 처리 방식은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므로 유사한 감정을 내재한 사람들과 서로 결합하거나 반목하며 사회 균열을 촉진한다.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 결과라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11]
[1]
랜들 콜린스(진수미 譯), 《사회적 삶의 에너지》, 한울아카데미, 2009.
[2]
에바 일루즈(김정아 譯), 《감정 자본주의》, 돌베개, 2010.
[3]
정수남·김정환, 〈‘잠재적 청년 실업자’들의 방황과 계급적 실천〉, 《문화와 사회》, 2017, 195-264쪽.
[4]
후루이치 노리토시(이언숙 譯),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민음사, 2014.
[5]
정수남·김정환, 〈‘잠재적 청년 실업자’들의 방황과 계급적 실천〉, 《문화와 사회》, 2017, 195-264쪽.
[6]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윤미애 譯),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225쪽.
[7]
김남옥·석승혜·장안식, 〈왜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 참여는 감소하는가?〉, 《사회와 이론》, 2016, 33-67쪽.
송호근, 《위기의 청년 세대》, 나남출판, 2010, 18-21쪽.
[8]
우석훈·박권일, 《88만원 세대》, 레디앙, 2007.
[9]
강준만,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인물과사상사, 2015.
[10]
랜들 콜린스(김승욱 譯), 《사회학 본능》, 알마, 2014, 30쪽.
[11]
Albert Einstein, 《Ideas and opinions》, Broadway Books, 1995.
[12]
카롤린 엠케(정지인 譯),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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