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3.0
4화

그룹 안에서 살아남기

‘원픽’과 끊임없는 경쟁


팬덤은 비판적 해석의 공동체다. 이들이 팬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일반 소비자와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팬 개인이 팬덤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선호하는 해석 방식을 학습해야 한다.[1] 〈프로듀스 101〉의 서사는 경쟁을 통해 101명의 연습생 중 단 11명만을 데뷔시키는 것이다. 팬들의 투표를 통해 연습생에게 주어지는 데뷔의 기회가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였다. 이 과정에서 팬들 역시 여러 연습생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팬들이 파편화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프로젝트 그룹 팬덤이 선호하는 해독 방식이 파편화된 애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데뷔만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연습생이 1등을 하도록 해서 ‘센터’ 자리를 안겨 줘야 하는 서사 구조 또한 파편화에 영향을 끼쳤다. 데뷔 멤버가 되는 것을 넘어서 몇 등으로 데뷔하는지도 팬들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팬 개인들의 애정은 한 명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I.O.I가 탄생한 〈프로듀스 101〉 시즌1과 비교해 시즌2 팬들은 더 치열한 순위 경쟁을 했다. 팬들은 그 이유가 센터 경쟁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즌1 때는 투표를 할 때 아이돌 전체를 구성한다는 느낌이 컸어요. ‘내 원픽(pick)을 만든다’보다는 ‘얘도 데뷔하면 좋겠고, 쟤도 데뷔하면 좋겠고’. 그래서 여러 명을 ‘이렇게 뭉쳐 있으면 예쁘겠다’ 하면서 구성한 거죠. 마지막에는 투표 추이를 봤어요. 내가 좋아하는 여러 명 중에서 떨어질 것 같은 연습생에게 투표하는 거예요. ‘국민 프로듀서’가 그때 처음 생긴 말이잖아요. ‘프로듀서? 그럼 내가 구성을 해야 하나?’ 하고 그룹을 구성하는 느낌이 컸죠. ‘노래가 부족하니까 연정이 들어가야 하지 않아?’, ‘비주얼은 정채연과 김도연, 랩 파트는 유정이랑 나영이’ 식으로 구성해서 ‘우리가 프로듀싱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워너원 때는 그게 없어졌어요. 센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요. I.O.I가 활동하는 1년 동안 모든 예능에도 1, 2, 3등만 나오고, (1등이었던) 소미에게 ‘1위’, ‘국민 픽’ 타이틀이 붙었잖아요. 그걸 보고 ‘이건 무조건 센터 싸움이다’라는 생각이 박혀서 경쟁이 더 심해졌죠. 데뷔를 시키는 것만 문제인 줄 알고 ‘예쁘게 만들자’ 했는데 막상 활동하는 걸 보니까 1등만 뜨더라. 그래서 ‘내 새끼의 친구들 누굴 만들어 줄까?’가 문제가 아니고, ‘내 새끼를 1등으로 만들자’에 몰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훨씬 과열됐고요. (J)

그동안의 아이돌 그룹은 〈프로듀스 101〉처럼 센터 위주의 체제는 아니었다. 센터는 팀의 콘셉트나 곡의 분위기에서 중심을 잡아 줄 멤버를 뜻하는 용어일 뿐이었고, 곡에 따라 센터가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런데 〈프로듀스 101〉은 센터를 시청자 투표 1위에 대한 보상으로 바꿔 놓았다. 이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참여 전략 중 하나로, 시청자를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리얼리티 쇼의 재미를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였다. 출연자들이 센터를 두고 벌이는 경쟁은 〈프로듀스 101〉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센터 전쟁’은 팬뿐만 아니라 연습생에게도 중요한 서사로 작동했다.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한 모든 연습생도 센터가 되기 위해 경쟁했다. 그들은 “프로듀스 101은 센터 위주니까요”, “(이번에 떨어지게 될 거 같아서) 꼭 센터는 해보고 가야겠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생존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이 센터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과거의 팬덤에는 개인 팬을 이른바 ‘악개(악성 개인 팬)’로 칭하며 경계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와 달리 프로젝트 그룹의 경쟁 구조는 수용자가 개인 팬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개인 팬을 경계했던 팬덤 내부의 암묵적인 규칙이 방송사라는 자본이 제시한 규칙에 의해 깨지고, 새로운 규율과 실천이 생겨난 것이다. 최종적으로 뽑힌 11명의 연습생은 국민 프로듀서들의 원픽 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순서대로 모인 만큼 하나의 그룹이지만 파편화되어 있다. 팬들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아이돌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기존 그룹은 애초에 하나의 상품으로 기획되어 시장에 나오기 때문에 그룹 내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프로젝트 그룹은 멤버가 역할별로 모이는 방식이 아니라 인기순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각자의 역할과 포지션을 새로 짜야 한다. 그러다 보니 멤버들의 포지션이 겹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워너원처럼 메인 댄서가 2명이고, 메인 래퍼도 2명이며, 메인 보컬도 2명이 되는 식이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메인이라는 역할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의 상품으로 기획되어 나온 기존 그룹은 보컬 파트, 댄스 파트, 랩 파트를 나누고 각 역할을 맡을 이들이 모여서 구성된다. 여기에서 ‘메인’은 각 파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멤버를 뜻한다. 하지만 워너원의 경우에는 각 파트를 소화할 구성원을 기준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브랜드 가치를 평가해 11명의 브랜드가 모여서 이루어진 그룹이다. 이런 프로젝트 구조에서는 개인의 여러 능력 중 가장 ‘메인’이 되는 능력이 그룹 내에서 개인의 포지션이 된다.

프로젝트 그룹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개방성과 확장성이다. 101명의 연습생 중 누구라도 데뷔 멤버가 될 수 있는 구조였다는 점에서 개방적이고, 다시 11명이 뽑히는 경쟁 서사가 시즌제로 반복된다는 점에서 확장적이다. 이것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한, 프로젝트 그룹 내 멤버들은 완전히 합쳐질 수 없다. 〈프로듀스 101〉은 그룹이 아니라 개인에게 애정을 갖는 팬이 핵심이 되는 구조로 설계됐다. 101명의 연습생 중 누구에게나 애정을 품을 수 있다. 이런 팬들은 센터를 그룹 내 역할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팀 전체를 좋아하기 이전에 특정 멤버로부터 애정이 시작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3세대 팬들이다.

 

사라진 올팬


투표를 통해 데뷔한 프로젝트 그룹에서는 팀보다 특정 멤버에게 더 집중하는 이른바 ‘개인 팬덤’ 현상이 팬 실천의 주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과거의 팬 실천과 다른 점이다. 과거에는 한 그룹의 팬이라면 그 그룹의 모든 구성원을 똑같이 좋아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랑을 주거나, 적어도 그런 척을 했다. 개별 멤버의 팬클럽이 생기면 모든 멤버의 팬클럽에 똑같이 가입하는 식이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과 구성원 간의 관계가 팬들에게 중요한 서사였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룹 구성원 간의 관계를 좋아했고, 이를 독려했다. 팬덤의 내부 규율에 ‘개인 팬 성향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규칙이 존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2세대에도 드러나지만, 특히 1세대에게 더 두드러진다.
 
전 진짜 올팬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은지원, 강성훈, 제이워크, 이재진 팬클럽 다 가입하고 똑같이 활동했어요. 다 똑같이 콘서트 가고, 팬 미팅 가고, 앨범 샀는데 그걸 강요해서 된 게 아니라 그때는 그냥 그랬다는 느낌. 그래서 진짜로 그룹을 사랑한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그게 많이 약해져서 (사람들이) 한 멤버만 좋아하지만……. (D)
 
과거에는 내가 올팬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사실 나도 사람인데 누굴 더 좋아하고, 누군 별로고, 그런 감정은 분명히 있었는데 티를 못 냈죠. 1명이라도 안 좋으면 탈덕이지 개인 팬은 있을 수가 없었어요. (J)

그룹 내의 특정 멤버만 좋아하거나, 그룹에 한 명이라도 좋아할 수 없는 멤버가 있으면 차라리 팬이기를 포기하며 ‘탈덕’해야 했던 과거 팬덤의 내부 규율은 3세대로 넘어오면서 약해지고, 팬들은 점차 개인화되었다. 특히 워너원처럼 한 명의 연습생만을 골라 지지해야 하는 구조에서 탄생한 그룹의 경우 그룹 전체를 좋아하는 개념인 ‘올팬’은 나오기 어렵다. 2개월 동안 지속해서 경쟁해 왔던 경쟁자들과 갑자기 감정적인 연대를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팬일 수가 없어요. 어쨌든 내 최애와 포지션이 겹치는 멤버가 있고, 마치 그 멤버가 전부인 양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거든요. 그래서 저는 ‘최애만 보인다’[2]에 가까워요. 다른 멤버는 솔직히 최애와의 관계성이 아니면 관심조차 가지 않아요. 갓 데뷔를 했을 때는 ‘완전한 개인 팬’ 성향에 더 가까웠어요. 내 최애의 무대 분량이 얼마인지, 내 최애 파트인데 카메라가 왜 다른 멤버를 비춰 주는지, 내 최애가 더 잘하는데 왜 다른 멤버만 언급하는지 등등.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팬질을 하는 것이 너무 피곤해졌고, 주변의 다른 멤버의 팬인 친구의 영향도 받고, 내 최애가 사이좋게 잘 지내는 멤버들이 생기면서 다른 멤버들에게도 마음을 연 것 같아요. 각자의 영역에서 잘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내 멤버의 입지는 뺏지 않으면 좋겠고, 특정 멤버보다는 11명이 고루고루 비춰지면 좋겠고요. 서로 싸움 나지 않고, 피곤해지지 않도록. (P)

파편화된 이들이 감정적 연대를 느끼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최애와 연관된 순간일 때가 많았다. 혹은 과도한 개인 팬 성향 때문에 내부 경쟁이 심해지자 ‘서로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일종의 규칙을 만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젠킨스는 팬덤의 모든 활동이 정서적 몰입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3] 팬덤이 하나의 통일된 구조를 가진 문화 구성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팬들이 감정적으로 공유하는 감수성(sensibility) 덕이다. 감수성은 차별(discrimination)과 구별(distinction)을 통해 작동한다.[4] 기존 아이돌 그룹 팬덤의 경우 차별과 구별이 다른 그룹 팬덤에 대해 작동했다면, 워너원 팬덤에서는 팬덤 내부로 향한다. 각 멤버별 팬덤이 다른 멤버 팬덤과의 구별 짓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민현이네는 데뷔하고 나서 유입이 엄청 늘었잖아요. 팬 유입은 공중파에 얼마나 노출되느냐에 따르는데, 민현이가 예능에 엄청 나왔어요. 확실히 그게 걔네(황민현) 팬덤이 갑자기 크게 인기를 끈 요인인 거 같아요. 다니엘, 민현이, 지훈이 팬덤은 딱 돈 쓰는 층이죠. 20대. 그런데 우리 팬덤은 완전히 극과 극이야. 20대가 별로 없더라고요. (A)

과거에는 한 그룹의 팬이면 모두 같은 정체성을 갖고, 특정 멤버의 탈퇴설이라도 나오는 경우에는 팬들의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5] 그러나 워너원의 팬덤은 끊임없이 다른 멤버의 팬덤을 타자화한다. 그리고 인기도부터 각 팬덤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까지 구분하는 특성을 보인다. 인터뷰를 진행한 모든 참여자는 공통적으로 개인 팬 성향을 보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워너원이라는 그룹을 좋아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멤버에게 무관심하기도 했다.
 
제 친구는 공방(공개 방송)을 정말 열심히 다녀요. 사녹(사전 녹화) 하면 무대를 세 번, 네 번 하잖아요. 그리고 거기 가면 원래 모르는 사이이던 팬들이 친구가 돼요. 그러면 녹화 끝나고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최애가 아닌 멤버는 어디에 서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예요. 만약 A가 분홍 셔츠를 입어서 그 팬이 다른 사람한테 ‘A 분홍 셔츠 너무 예뻤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다른 멤버 팬이니까 A가 셔츠를 입었는지, 티셔츠를 입었는지조차 모르는 거죠.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만 보는 거예요.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C, 20대 후반, 2‧3세대 팬덤 경험, 지방 팬클럽 버스 총대 경험)

이러한 특징은 어느 정도 경험적 학습의 결과이기도 하다. 과거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하는 것을 본 팬들은 더 이상 그룹이라는 정체성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룹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개인은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한 개인만 보고 가는 거죠. 그래서 개인이 얼마나 상품 가치가 있느냐가 중요해요. 10년 치 상품 가치를 갖는다면 그걸 보고, 그때부터 걔를 서포트해 주는 거죠. 그룹 팬을 하려면 이 그림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는 허구의 믿음이 있어야 해요. 우리는 하나고, 영원할 거라는 게 동력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아이돌 그룹들은) 멤버들이 다 나갔으니까……. (C)

C가 이야기한 것처럼, 2세대를 거치면서 팬들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룹의 의미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워너원 이전의 팬덤에도 어느 정도 개인 팬 성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 팬 성향은 3세대 프로젝트 그룹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며 워너원 팬덤의 상징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저랑 친구랑 ‘서울가요대상’ 갔을 때, 저희 앞에 B그룹(2세대 아이돌) 팬이 있었어요. 저희가 워너원이랑 뉴이스트 보러 왔다고 하니까. “어? 최애가 누구예요?” 바로 그렇게 물어보더라고요. 12살인가 13살, 초등학생이었는데! 그냥 자동이에요. 워너원이라고 하면, “최애가 누구세요?”, “그중에 누구?” 꼭 이렇게 물어보잖아요. 그래서 저는 황민현이라고 하고, 걔한테 너는 최애가 누구냐고 했더니, “저는 올팬인데요?” (E)

우리는 ‘프듀(프로듀스 101)’ 출신이니까 최애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죠. 근데 자기는 B그룹이니까 올팬이라는 거죠. “나도 뉴이스트 올팬이야!!” 그랬는데 걔가 우리는 그럴 리가 없대요. (F)

저희도 계속 물어봤어요. “솔직히 말해. 어떻게 올팬이야, 빨리 말해 봐” 그러니까 결국에는 A 멤버라 하더라고요. 그런데 되게 쑥스럽다는 듯, 되게 숨기는 거 마냥, “난 올팬이야. 근데 굳이 고르자면, A 멤버.” 그런데 저희한테는 당연하다는 듯이 올팬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워너원은 진짜 판도가 달라지는 거 같아요. (E)

‘최애’라는 단어가 3세대 팬덤 내에서 비교적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자기표현 방식이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최애는 ‘최애 영화’, ‘최애 유튜버’, ‘최애 캐릭터’와 같이 문화 콘텐츠 전반에서 취향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수용자가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팬덤 문화가 변화하면서, 1세대 아이돌 그룹을 오랜 기간 좋아해 왔던 팬덤은 혼란을 겪기도 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과거의 올팬 문화에 부담을 느끼고, 이 문화가 자기 검열을 불러온다고 생각하며 결국 개인적인 팬 활동을 선택한 팬도 있었다.
 
저는 젝스키스 인장을 달고 트위터에서 움짤을 만드는데, 제일 좋아하는 멤버가 있어요. 그런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 멤버의 움짤만 엄청 많은 거죠. 그러면 다른 젝키 팬들이 달려와서 뭐라고 과녁 저격하는 거예요. ‘왜 젝키 팬 인장 달면서 특정 멤버 사진만 올리냐, 개인 팬 아니냐’.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나는 올팬이 맞는지 계속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사진도 하나 제대로 못 올리겠는 거예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요. 왜 내가 스스로 검열해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그래서 그 트위터 팔로우 수도 엄청 많았는데, 그 계정 그냥 버리고 저만 아는 비공개 계정을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엄청 편해요. 마음대로 사진 올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생각했죠. 어차피 혼자 하던 덕질, 그냥 나 혼자 해야겠다고. (O, 30대 초반, 1세대 팬덤 경험, 트위터 계정 운영, 스밍단 활동가)


 

줄 세우기 문화


파편화된 애정을 가진 팬덤은 끊임없이 경쟁한다. 특히 워너원은 해체 시기가 정해져 있는 그룹이고, 해체 후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과거보다 더 고도화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 팬덤이 타 그룹과의 경쟁을 통해 스타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면, 지금은 더 세부적인 단위에서도 경쟁이 벌어진다. 타 그룹과의 경쟁에도 신경을 쓰면서 동시에 그룹 내 멤버들과도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팬덤은 이를 위해 매일 노동을 반복하고 전략을 짠다. 각 멤버들은 프로젝트 그룹 해체 후에는 각자 스타로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룹 내 생존이 중요하다. 그래서 팬들은 전략가이자 홍보 및 마케팅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했다.

데뷔 후 워너원 팬덤 내부에서는 신곡이 나올 때마다 분량 논쟁이 벌어졌다. 멤버별로 노래를 몇 분간 불렀는지 확인한 후, 분량이 적은 멤버의 팬들은 트위터 내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데뷔 투표 1등을 했던 강다니엘의 경우 1위이자 센터임에도 분량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항의가 빗발쳤고, 이후 공개되는 무대 대부분에서는 시작과 끝을 모두 이 멤버가 담당하게 되었다. 2등을 했던 박지훈 역시 데뷔 곡에서의 분량은 꼴찌라는 이유로 팬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팬들의 항의는 문제 제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냈다. 데뷔 곡 〈에너제틱〉에서 강다니엘의 분량은 7.9퍼센트로 다섯 번째 순위였는데, 다음 앨범 타이틀곡 〈beautiful〉에서는 16.9퍼센트로 분량 1등을, 박지훈은 9.2퍼센트로 네 번째 순위가 되었다. 기존 아이돌 그룹에서는 그룹의 메인 보컬이 곡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면, 워너원에서는 데뷔 순위와 인기도가 분량 배분에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분량 논쟁은 워너원 멤버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줄 세우기 문화는 팬들의 소비를 촉진하는 산업의 전략이기도 하다. 워너원이 광고하는 모든 제품은 치약, 티셔츠, 과자까지도 멤버별로 판매했다. 한때 이들이 광고하는 물건을 파는 업체에서 프로모션 중 재고를 그대로 공개했다가 멤버별로 다른 수량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팬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인기가 많은 멤버만 많은 수량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다른 멤버의 팬들은 불만을 가졌고, 구매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줄 세우기 전략은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와 관련된 소비 활동의 이유이자 동력이 되고, 이는 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팬과 산업의 관계를 강화하기도 했다. 팬의 몰입도가 증가하는 동시에 제작자도 팬들에게 더 많은 역할을 맡기면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줄 세우기가 또 팬질을 하게 되는 동력인 거 같아요. 매번 순위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그게 동력이 되는 거죠. 내가 내 가수한테 더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내 가수도 팬한테 더 고마움을 느끼게 될 거 같고요. 또 유닛 팀명 고르는 거나 팬클럽 이름부터 그룹 이름까지 다 팬에게 정하라고 하니까 우리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Q)

팬덤 내 경쟁은 프로젝트 그룹의 공통된 현상이다.
 
어쨌든 경쟁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보니까 쇼케이스든 콘서트든 팬들이 함성 소리로 싸워요. 다른 아이돌 콘서트나 무대를 보면 한 명 한 명이 나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데. JBJ 같은 경우에는 멤버들이 한 명씩 자기 파트를 하면 팬들끼리 싸우듯이 소리를 지르고. 멘트를 할 때도 함성 소리로 경쟁을 하는 것 같이. (G)

경쟁은 한 멤버의 팬덤 내부를 파편화시키기도 한다. 워너원 멤버 중에는 〈프로듀스 101〉에 출연하기 전에 다른 그룹의 멤버였던 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워너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이전 그룹 멤버로서의 정체성이 중첩되면서 팬덤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황민현은 〈프로듀스 101〉에 출연하기 전에 그룹 뉴이스트의 멤버이기도 했다. 한 멤버가 두 그룹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워너원으로서의 황민현’을 좋아하는 팬덤과 ‘뉴이스트로서의 황민현’을 좋아하는 팬덤은 구별된다. 이때 타 그룹에 대한 경쟁이 생기는 동시에 그룹 내 경쟁까지 수행하는 두 가지 방향의 복잡한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3세대 팬덤의 고도화된 경쟁 구조를 잘 보여 준다.
 
워너원으로서의 민현이를 좋아하는 팬덤은 워너원에 차애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뉴이스트 다른 멤버에는 입덕을 못한 거죠. 그런 경우에 뉴이스트는 아예 다른 그룹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E)

워너원에서도 어차피 내부 경쟁이잖아요. 서열이 정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민현이의 경우엔 이 사람을 워너원 민현이 팬들도 좋아하고, 뉴이스트 팬들도 좋아해요. 그렇게 양쪽에서 좋아하니까 (팬덤이) 커지잖아요. 그런데 이게 워너원의 다른 멤버 팬덤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 있죠. 경쟁해야 하는데 저 그룹 팬까지 얘를 좋아해 주니까. (F)

복잡한 경쟁 구도 속에서 팬덤은 어떻게 움직여야 더 이득이 될지를 팬 실천의 기준으로 삼는다. 워너원의 한 개인 멤버 팬 커뮤니티는 통합 검색 추이를 활용해 멤버별 개인 브랜드의 파급력 순위를 집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팬덤이 검색 순위 1위가 되도록 팬들에게 검색을 반복하는 노동을 강요했다는 정황이 그룹 전체의 팬 커뮤니티에 포착돼 논란이 됐다.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발생한 후에 그룹 커뮤니티에서는 팬덤 내부 규율을 만들기도 했다. 워너원과 관련된 기사 등에 댓글을 달 때 지켜야 하는 내부 규칙이다.

하지만 내부 규칙에는 강제성이 없고, 경쟁은 여전하다. 팬덤 내 경쟁은 그룹의 유닛 활동에서 더 두드러졌다. 워너원은 엠넷의 음악 리얼리티 프로그램 〈워너원 고 : 엑스콘〉을 통해 네 개의 팀으로 나뉘어 활동하기도 했다.
 
유닛 활동에서 그게 더 드러난 거 같아요. 오히려 멤버별로 유닛을 구성해서 음반을 내니까 음원 순위나 앨범 판매량이 더 신경 쓰이는 거죠. 그냥 워너원 자체였을 때는 음원 순위가 그렇게 신경 안 쓰였었는데……. 유닛 구성되자마자 가장 기대되는 유닛 투표도 기사로 떴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잖아요. (Q)

순위에 집착할수록 스트리밍 등 노동의 강도는 더 심해진다. 순위나 검색량을 경쟁적으로 올리려 하는 과열된 현상 속에서 몇몇 팬들이 다른 팬에게 노동을 강요하게 되거나, 그에 부담을 느끼는 팬이 생기기도 한다. 애정을 기반으로 모인 팬덤이지만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면서 팬덤 내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팬덤은 디지털 경제 속에서 무임 노동(free labour)을 하면서 스타의 그룹 내 생존을 위해 치열한 팬 실천을 하고 있었다.
[1]
Henry Jenkins, 《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and participatory culture》, Routledge, 1992.
[2]
올팬과 개인 팬 성향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뷰 대상자에게 개인 팬 성향 척도를 만들어 질문했다. 1에 가까울수록 올팬, 5에 가까울수록 개인 팬 성향이다. 팬 성향 척도는 다음과 같다.
① 올팬이다(모든 멤버를 다 똑같이 좋아하고, 다 똑같이 관심이 있다).
② 그룹을 다 좋아하지만 최애가 있다(하지만 그 ‘최애’를 표현하는 일은 마음에 꺼린다).
③ 그룹을 좋아하고, ‘최애’를 표현할 수 있다(‘최애’가 있어서 그룹이 좋아진 경우다).
④ 최애만 보인다(개인 팬 성향이 강하다, 다른 멤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⑤ 완전한 ‘개인 팬’이다(다른 멤버와 내 ‘최애’는 경쟁 관계다).
[3]
헨리 젠킨스(정현진 譯), 《팬, 블로거, 게이머》, 비즈앤비즈, 2008, 13쪽.
[4]
 존 피스크, 〈팬덤의 문화 경제학〉, 《문화, 일상, 대중》, 한나래, 2012.
[5]
동방신기의 경우, 멤버 탈퇴설이 돌자 팬들이 ‘5-1=0’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공개 방송에 참여하는 등 멤버 5명의 영원한 지지를 뜻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민희,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 얄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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