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 시대의 철학자

bkjn review

그들에게도 당연히 사상적 기반이 있습니다.

트럼프 2.0 시대의 철학자

2025년 5월 13일

저는 상당히 비관적인 사람입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요 몇 년간의 사회적 갈등 상황은 압도적으로 느껴집니다. 나와 믿는 것이, 생각의 방식이 다른 누군가와 차분히 대화하기가 참 힘든 시절입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대선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는 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대안적 우파(alt-right)가 급부상하며 도널드 트럼프 2기 정권을 창출해 낸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주류 언론의 담론을 간단히 무력화한 트럼프 대통령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합니다. 트럼프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세계관은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국경보다 더 두껍고 높은 벽으로 나뉘어 있죠. 각각의 세계에서는 ‘사실’의 정의부터 달라지니까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우리가 트럼프 진영의 세계관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요? 그곳에서 우리는 아마도 하트 여왕의 모습을 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겁니다. 주변에는 측근들의 모습이 보이겠죠. JD 밴스 부통령도 있을 겁니다. 트럼프의 이상한 나라에서는 많은 등장인물이 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되뇌고 있을 텐데요, 바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라는 인물입니다.

르네 지라르

‘사상적 기반’이라는 말을 번역하면, ‘이 세계를 이해하는 생각의 방식’ 정도로 풀어낼 수 있을 겁니다. 트럼프 진영의 주요 인물 중 여럿이 르네 지라르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프랑스 학술원이 지난 2005년 불멸의 40인으로 꼽을 정도로 포스트모던 철학 사조에 깊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입니다. 지라르의 이론을 살펴보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진영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겠죠.

지라르의 철학을 대표하는 용어는 ‘욕망의 삼각형’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인간은 허기지면 먹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욕망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미식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느낍니다. 필요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욕망을 품게 될까요? 우리와 값비싼 미식 사이에 매개자가 있습니다. 바로 그 미식을 즐기는 다른 누군가입니다. 예를 들면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 같은 사람 말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며 경쟁하고 충돌하게 됩니다. 이래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겠죠. 그래서 공동체는 ‘희생양(Scapegoat)’을 필요로 합니다. 공동체 내의 갈등과 폭력 에너지를 희생양에 집중시켜 해소하는 겁니다. 이 공동의 폭력을 통해 사람들은 오히려 소속감을 갖게 되죠.

사실,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희생양을 만들어 왔습니다. 신에게 가축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고, 사람을 제물로 삼기도 했죠. 굉장히 폭력적인 의식입니다. 지라르는 이런 행위들이 폭력의 자가 증식을 막기 위해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경험해 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어린 시절, 작은 말다툼이 번져 친구들 여럿이 얽힌 몸싸움으로 번지는 경험 같은 것 말입니다. 인간 사회에 갈등이 존재하는 이상 폭력은 인간은 해치는 충동이 될 수 있습니다. 희생양을 향한 폭력이 이런 일을 막아줍니다. 

피터 틸

이런 지라르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꽤 많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피터 틸(Peter Thiel)입니다.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에어비앤비, 링크드인, 스페이스X 등을 키워 낸 거물 투자자죠. 페이스북의 첫 번째 외부 투자자로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AI 방위 산업 스타트업인 ‘팔란티어(Palantir)’의 공동 창업자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틸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지라르는 교수였고요. 학부생 시절 틸은 지라르가 주최하는 특별한 독서 모임에 참여하며 지라르의 철학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실리콘밸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모방 경쟁을 피하고 경쟁자의 손이 닿지 않는 독점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에 따라 페이스북에 투자하고 팔란티어를 창업했죠.

팔란티어의 사내 문화는 틸에게 꽤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팔란티어에서는 대부분의 직원이 ‘엔지니어’로 불릴 뿐, 소수의 임원진 외에는 별도의 직함이 없다고 합니다. 직함을 만들면 사람들이 ‘나도 그 직함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고 내부 정치와 경쟁을 유발할 수 있겠죠. 지라르가 주장한 모방 욕망의 관점입니다. 이와 같은 수평적 문화가 팔란티어에서는 꽤 잘 작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틸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지라르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그 결과, 틸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유 민주주의의 모습을 그려보죠. 인간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성적 토론과 다원주의를 통해 각종 사회 문제에 관해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죠. 그러나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만들어 낸 공적 합의는 논리에 따라 도출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라는 야만적 방법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고요. 결국, 공적 합의는 무력에 의한 통제 없이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경찰 행정력이나 사법부의 구속력 같은 것 말입니다.

게다가 민주주의 또한 모방 욕망을 자극하는 시스템입니다. 권력과 자원의 분배를 선거라는 경쟁 시스템에 맡기니까요. 이러한 경쟁은 모방 욕망을 확대하고 결국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틸의 결론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합하면 폭발적인 모방 욕망과 혼란을 낳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틸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질서와 리더십이 필요하죠. 틸이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극우 블로거, 커티스 야빈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시스템이므로 정부가 “스타트업처럼 운영되는 군주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딘지 일론 머스크 미국 정부 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 수장의 얼굴이 떠오르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사실 공무원을 대규모로 해고하고 정부 관료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JD 밴스 부통령이었습니다.

JD 밴스

틸의 신념은 지라르의 철학 그대로라기보다는 지라르의 사상을 기본으로 삼아 스스로 쌓아 올린 것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틸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입니다. 생각을 영향력으로 환전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죠. 틸은 지라르의 사상을 주춧돌 삼아 현실 세계에 신전을 건설합니다. 지라르의 사상을 연구하고 전파하기 위한 단체, ‘이미타티오(Imitatio)’를 설립하고 지라르의 강연 시리즈를 기획해 국제적 규모의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죠. 이 모든 것이 틸의 재력으로 뒷받침됐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치적 신념도 돈으로 관철시켰습니다. 트럼프 1기의 탄생은 틸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당시에는 실리콘밸리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죠. 그런데 트럼프 2기 때에는 틸이 직접적인 후원에서 빠집니다. 대신 1기 때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죠. 바로 신인 정치인에 불과했던 JD 밴스를 부통령으로 만든 겁니다.

밴스와 틸의 관계는 2011년 시작됩니다. 당시 예일대 로스쿨에 재학 중이었던 밴스는 강연자로 방문한 틸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습니다. 틸은 엘리트 사회가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끝없는 경쟁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했죠. 이때 밴스는 자신이 성취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합니다. 밴스는 로스쿨을 졸업한 뒤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틸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틸의 자금 지원을 통해 벤처 투자 회사 나리아 캐피탈(Narya Capital)을 창업하기도 했죠.

이런 인연이 쌓여 틸은 정치가로 변신한 밴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합니다. 그 결과 2023년 선거에서 밴스는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죠. 선거가 돈으로만 되는 게임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선거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선거에 틸이 후원한 금액은 1000만 달러에 이릅니다. 이쯤 되면 후원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깝죠.

밴스를 트럼프에게 소개하고 부통령 후보로 추천한 사람도 바로 틸입니다. 밴스에게 틸은 일종의 멘토입니다. 그리고 지라르는 멘토의 사상적 기반이고요. 밴스가 지라르의 철학에 깊이 빠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특히 희생양 개념에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힐빌리의 노래》를 통해 묘사했듯, 밴스는 빈곤과 절망으로 가득 찬 곳에서 성장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는데, 지라르의 영향으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사회가 설정한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행위를 멈추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고요.

그런데 밴스는 지라르의 철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2024년 9월,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밴스는 아이티 난민들이 이웃의 반려동물을 잡아먹고 있다는 허위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설화에 따른 여파가 커지자 언론이 미국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좀 기울이라는 취지에서 필요한 이야기였다고 항변했죠. 즉, 미국 언론이 ‘미국의 진짜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얘깁니다.

다시, 지라르

비슷한 현상은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한 팟캐스트 진행자는 2020년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BlackLives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가 경찰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어떠한 저항이나 비판,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희생양 삼기’로 규정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지라르 본인도 이러한 현상을 생전에 우려한 바 있습니다.

결국, 트럼프의 이상한 나라에서는 위대한 미국이 희생양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다양성과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미국을 희생양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한편, 미국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모방 욕구에 따른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 에너지를 해소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미국인은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민자가 좋은 희생양입니다.

동시에 갈등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정부는 강력한 통제권을 쥔 CEO가 회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운영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관료 조직은 CEO의 통치에 방해가 됩니다. 기술 엘리트가 정부의 중심에 서야겠죠. 필요하다면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라르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틸과 밴스의 세계관에 동의했을까요? 지라르는 1970년대에 출간된 저서 《폭력과 성스러운 것(Violence and the Sacred)》에서 외국인이나 장애를 가진 이, 혹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로 희생양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트럼프의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말이죠. 어쩌면 MAGA 진영의 진정한 희생양은 지라르 본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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