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통령 선거는 시작되기도 전에 드라마가 너무 많았죠. 또 급하게 치러지는 선거이기도 합니다. 선거일까지 2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주요 공약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도드라지는 것은 색깔뿐입니다. 그래도 유권자는 새로운 대통령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부를 운영할 계획인지 들여다봐야겠죠.
각 후보의 공약 내용을 뜯어보면 의외로 비슷한 내용이 꽤 많습니다. GTX(Great Train eXpress) 관련 공약이 대표적이죠.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모두 GTX를 비수도권까지 확대하겠다고 장담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말이 좀 안 맞습니다. GTX의 정식 명칭이 ‘수도권 광역 급행 철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비수도권까지 확장하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할 겁니다. 게다가 GTX는 확대를 논하기보다 계획된 공사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부터 답을 찾아야 할 형편이고요. 그럼에도 대선 후보들이 GTX에 관한 약속을 더 얹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GTX의 현재
GTX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것이 2010년입니다. 그런데 첫 열차가 달린 것은 2024년 3월입니다. 14년이 걸렸죠. 지금 유일하게 개통된 GTX A 노선은 파주 운정역에서 화성 동탄역까지를 잇기로 되어있지만, 현재 운정에서 서울역까지, 수서에서 동탄까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간은 끊겨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유일하게 개통된 노선조차 완공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게다가 GTX B 민자 건설 구간, GTX C 노선의 경우에는 아예 삽도 뜨지 못한 상황이죠.
이유가 있습니다. 돈 문제입니다. 지하철이나 철도 등은 원래 건설에 돈이 많이 들지만, GTX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지하 40미터까지 땅을 파고들어 가 시속 18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속도로 기차가 달릴 레일을 깔아야 합니다. 나랏돈으로 전부 건설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민간 건설업체가 공사를 진행하고, 운임 등의 운영 수익을 가져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여기에 국가가 공사비 일부를 지원해 줍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운영 수익만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계약할 당시에 비해 물가가 올랐다는 겁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의 국제 정세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자재 가격이 크게 올랐죠. 그래서 건설업체가 공사비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부 당국은 그럴 의무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일부 정부 수주 공사에 대해 물가 상승에 따라 공사비를 올려주겠다는 대책이 나온 바 있지만, GTX 관련 계약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일단 정부가 일부 구간을 건설하고 있는 GTX B 노선의 경우 민자 구간도 이달 말부터 공사가 시작될 전망입니다. 하지만 전 구간이 민자 건설인 GTX C는 착공이 언제 될지 알 수 없습니다.
GTX의 정치
GTX를 호재로 보고 노선 근방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일입니다. 그래서 GTX 확대 공약은 딱히 획기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김이 새버린 키워드니까요. 그럼에도 이번 대선은 물론이고 이어질 몇 차례의 총선, 지선에서도 GTX는 반드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계를 2010년도로 돌려보죠. 지방 선거가 있던 해입니다. 당시 서울시를 뛰어넘는 격전지가 경기도였습니다. 경기도지사 자리를 두고 한나라당은 김문수 후보를, 민주당은 유시민 후보를 내세웠습니다. 진보신당에서는 심상정 후보가 출사표를 던졌고요. 지금 와서 보면 거물급 셋이 경기도에서 빅매치를 벌인 셈입니다.
각 후보가 내세운 핵심 공약은 명확히 갈렸습니다. 유시민 후보는 이념을 이야기했죠. ‘천안함’과 ‘4대강’이 키워드였습니다. 안보 위기를 극복하고 4대강 사업을 막아서겠다는 약속을 내세웠습니다. 반면, 재선에 도전한 김문수 후보는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경기도민의 교통 불편을 해소하겠다며 GTX 건설을 대표 공약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GTX는 김문수 후보의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 공약으로 세상에 처음 소개된 것입니다.
결과는 김문수 후보의 승리였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50만 명 이상의 경기도 대도시에서 대부분 승리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웬만한 광역 의원 자리를 민주당이 쓸어갔는데 도지사로는 김문수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이것은 한나라당의 승리가 아니라 김문수의 승리였습니다. GTX 공약이 제대로 먹힌 겁니다.
GTX의 욕망
GTX의 노선들은 사실 한국인의 욕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이라는 욕망 말입니다. 한국인이 원하는 삶은 서울에 있습니다. 교육도, 일자리도, 문화도 그렇죠. 지역별 욕망의 분포는 아파트 가격으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인구가 아무리 줄어도 서울의 집값이 여전히 공고한 까닭은 서울을 향한 욕망의 크기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GTX 노선은 인천에서, 파주 운정에서, 화성시 동탄이나 춘천시에서 서울이라는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기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파트 신규 분양 광고에서 접하게 되는 ‘강남까지 30분’이라는 문구는, 당신이 가진 돈으로도 강남이라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유혹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김문수 후보의 GTX 계획은 단순한 교통 인프라 건설 공약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도를 서울로 편입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적나라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김포시 서울 편입 시나리오’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모든 정당이 지방 소멸을 국가의 중대 과제로 강조하면서, 경기도와 충청, 강원 등을 서울에 더 가깝게 붙이겠다는, 일종의 ‘준(準)서울’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지난 총선 당시 국민의힘이 내놓았던 ‘메가 서울’이 정점을 찍었죠. 김포, 구리, 하남 등의 경기 일부 지역을 아예 서울로 편입시키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서울이 너무 커서 문제라는 인식은 어느새 구시대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서울이 커지는 것을 막겠다고 나부터 지방으로 이사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야기할수록 가식입니다. 그러니 서울 집중화 문제를 풀 현실적인 방법은 오히려 서울을 더 키워서 아예 대한민국 전체를 서울로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지방을 살리는 것보다는 현실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 보입니다. 서글프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2010년 이후 모든 선거는 GTX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 GTX D, E, F 노선 계획도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작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공사 일정도 나오지 않은 GTX C 노선의 착공식이 열렸고요. 이번 대선에서도 김이 빠졌든 차 있든 상관없이 GTX를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현재까지의 건설 기술로는 GTX보다 더 넓은 지역을 더 빠르게 서울로 끌어다 붙일 방법이 없습니다.
GTX의 탄소
우리의 욕망이 GTX를 계속 달리게 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을 공공선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GTX가 수도권 쏠림을 심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선을 따라 인구를 분산시킬 수 있도록 정책을 짜는 겁니다.
일본의 경우 신칸센의 개통 이후 도쿄와 오사카라는 두 곳의 대도시로 사람과 돈이 모두 몰려버리는 ‘빨대 효과’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GTX와 유사한 광역급행철도 ‘쓰쿠바 익스프레스’를 개통할 때는 역 인근 주거 지역 복합 개발을 함께
추진했죠.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부천 정도와 비교할 수 있는 지바현의 나가레야마 지역의 경우 이 복합 개발과 함께 2023년 일본 내의 중소 도시 중 인구 증가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통망 중심의 도시 개발은 신도시를 일단 지어 두고 그다음에 도로망과 대중교통 노선을 연결하는 우리나라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모델입니다.
또 한 가지 GTX 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모달 시프트(Modal Shift)’
개념입니다. 환경 논의입니다. 철도는 도로에 비해 무척 효율적인 운송 수단입니다. 특히 탄소 배출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단위 수송량당 에너지 소비량이 승용차 대비 10분의 1 정도입니다. 탄소 배출은 5분의 1
수준이고요. 즉,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인원을 철도를 이용하는 승객으로 전환하면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을 일컫는 용어가 모달 시프트입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후 위기 완화 대책입니다.
경기 남부 지역이나 북부 지역 쪽을 둘러보면 큰 도로를 따라 띄엄띄엄 큰 카페나 식당 등의 상업 시설이 늘어선 곳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마포구 상암동에서 고양시 쪽으로 조금만 빠져도 그런 곳이 있죠. 이렇게 낮은 밀도로 형성된 상업 지구는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방문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즉, 기차역처럼 많은 인구가 한꺼번에 몰리기 힘들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상업 지구가 확장해도 여전히 낮은 밀도로 퍼집니다. 주거 시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가용이 필요한 지역이 되죠.
반면, 기차역 주변은 유동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니 상업 시설의 밀도 또한 높아집니다. 상업 시설의 수요에 따라 사람들이 더 몰리죠. 사람이 늘어나니 가게가 더 생깁니다. 선순환입니다. 기차는 대중교통이고, 기차역으로는 버스 노선도 자연스럽게 생기죠. 대중교통이 닿는 곳에 상업 시설이 밀도 있게 생기면 자가용 이용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모달 시프트가 일어납니다.
GTX 건설에도 비슷한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GTX는 지하철이 아니라 지하 기차입니다. 그것도 급행 기차죠. 역 간의 거리를 짧게 잡으면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줄어들어 효율이 떨어집니다. 효율이 떨어지면 이용객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도로를 달리나 GTX를 타나 비슷하게 시간이 걸린다면 지하 40미터를 내려가야 탈 수 있는 GTX를 선택할 유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 논리에 따라 노선과 역이 정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동네에 GTX 역이 생기면 집값이 뛸 테니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필사적으로 GTX 역을 늘리려고 합니다. 정치의 논리대로 노선을 그리고 공사를 진행하면 GTX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모달 시프트의 논리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GTX 노선을 수도권 바깥으로 확장하겠다는 대선 후보들의 공약도 일리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저 멀리 춘천에서 청량리역, 서울역까지 무정차로 한 번에 도착하는 GTX 노선이라면 이용자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춘천 GTX역 근처를 중심으로 상권도 살아나고 자가용으로 서울을 오가던 사람들을 GTX에 태울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춘천에 집을 마련하고 서울로 출퇴근할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계획되어 있는 GTX B 노선에 따르면 춘천과 청량리역 사이에는 6개의 역이 더 있습니다.
선거는 좋은 계기입니다. 2010년도의 경기도지사 선거를 계기로 GTX가 놓이면서 파주 출판 단지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삶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빨간 버스에 실려 편도 한 시간 넘는 시간을 길에 버리던 사람들이 이제 서울역에서 21분이면 파주 운정역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공공재에 해당하는 교통 인프라 건설과 도시 설계를 정치의 논리에만 맡겨 둬서는 곤란합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GTX가 정말 확대된다면, 노선도를 그리고 역의 개수를 정하는 과정에는 좀 다른 논리가 필요합니다. 2025년의 시대 정신에 맞는 논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