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루이지애나주 메리빌 외곽 지역에는 여의도 면적의 다섯 배 정도 되는 소나무 숲이 있습니다. 41.4제곱킬로미터 면적에 슬래시 파인(slash pine) 종이 대부분이었죠. 상업적으로 가치가 높은 수종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숲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슬래시 파인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왕솔나무(long leaf pine)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왕솔나무는 현재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솔나무는 붉은 뺨 딱따구리와 같은 또 다른 위기 생물의 서식지가 되어주는 나무입니다. 산불에 대한 저항력도 높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인 가치는 낮은 편이라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는 중이죠. 숲에서 슬래시 파인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왕솔나무를 심은 이유입니다. 이 숲의 상업적 가치는 낮아졌지만, 생물 다양성은 높아졌습니다.
이런 일을 진행한 주체는 스웨덴의 투자사, 칼보(Qarlbo)입니다. 사회공헌 활동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팩트 투자를 표방하는 이 회사에서 주목하고 있는 분야 중에는 생물 다양성도 포함되는데, 특히 생물 다양성 크레딧(biodiversity credits)을 중요한 사업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칼보는 미국 내에서 첫 번째 생물다양성 크레딧 판매에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죠. 바로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DX(Device eXperience)부문의 탄소 중립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대폰을 만드는 부문에서 탄소를 하나도 배출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조림 사업을 지원하는 등의 노력 등으로 탄소 배출을 상쇄하는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부족합니다. 그래서 탄소 배출권을 구입합니다. 탄소 저감에 기여한 회사나 지역에서 탄소 크레딧을 구입하면 그만큼의 탄소 배출을 상쇄한 것으로 치는 겁니다.
생물 다양성 크레딧도 비슷한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DMZ 인근 지역에 골프장을 건설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다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측에서는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골프장이 들어서는 곳에 살던 곤충과 동물, 나무와 풀은 사라지고 말겠죠. 이걸 생물 다양성 훼손으로 보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생물 다양성을 증진시킨 곳에서 크레딧을 구입하도록 합니다. 현재 영국과 호주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미국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습니다.
지구의 권장소비자가격
인류에게는 두 가지 자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 자아와 환경적 자아 말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개발하고 싶어 합니다. 공장을 짓고 화석 연료를 캐냅니다. 반면 기후 위기에도 큰 관심을 둡니다. 조각난 빙하 위에 올라앉은 북극곰에 공감하고 탄소 저감에 신경 씁니다. 재생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고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만듭니다. 공기 중의 탄소를 모아 땅속에 묻어버리는 탄소 포집 관련 기술 개발에도 큰돈을 투자하죠.
마치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암묵적 합의라도 된 듯합니다. 탄소를 내뿜는 곳 따로, 탄소 저감을 위한 노력은 또 따로라는 식이죠. 즉, 친환경은 사회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지, 돈을 버는 일은 아니라는 전제가 우리 사회 전체에 깔린 겁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기후 위기가 기업에도 위험 요소로 돌아올 것이라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주의 펀드 등을 중심으로 DEI 경영, ESG 경영 요구가 나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장부상의 숫자와는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기후 친화적인 의사 결정과는 상관없이 경영자는 결국 이익을 얼마나 냈느냐의 여부로 판단 받기 마련이지요. 당장 경기가 침체하고 트럼프 2.0 시대가 도래하자 관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주춤해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데이터나 지표, 회계 장부의 숫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쯤 의심해 볼 법도 한데 말이죠.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살 만한 기온에도 가격표가 붙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환경을 지탱하고 있는 복잡하고 경이로운 생태계에도 마찬가지고요. 회계 장부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은 가치이기 때문에 외면받고 있을 뿐이죠. 실제로 영국 정부의 의뢰로 케임브리지대학의 파르타 다스굽타(Partha Dasgupta) 교수가 작성한 〈생물다양성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자연자본(na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 재화를 생산하는 기본적인 공식에 지금까지는 당연하게 생각해 온 자연 환경의 기여를 포함해 계산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공해상의 참치를 잡아 올려 팔았다면, 이는 당연히 자연이 품고 있던 생명을 인간이 수익화한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1차 산업이 아니더라도 모든 산업은 필연적으로 지구의 환경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영양분을 재순환하고, 물을 정화하며 대기 중 탄소를 흡수합니다. 더워지면 차갑게 식히고 오염되면 시간을 들여 정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자연이 제공하는 용역(서비스)’이라고 정의한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루어낸 성취라고 생각했던 것의 많은 부분이 실은 자연 자본의 기여 덕분이었음을 계산해 낼 수 있습니다. 구글도 오픈AI도, 농심도 자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곳간을 털어 쓴 대가
다스굽타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1992년에서 2014년까지 기계나 건물과 같은 물적 자본은 2배로 증가했고 인적 자본은 13퍼센트 증가했습니다. 반면, 자연 자본은 40퍼센트 감소했죠, 인류는 현재 지구 1.6개 분량의 환경 자원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자연 자원이 고갈된다면 전 세계 GDP의 성장 자체가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이 다스굽타 교수의 결론입니다.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얘기죠. 곳간이 비어가고 있는데, 그건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익 계산을 해 왔다는 겁니다. 마치 곳간 속에서 야금야금 빼내어 왔던 재물들을 내가 어디서 직접 벌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계산을 맞춰야 합니다.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로는 부족합니다. 화석 연료 사용 외에도 우리는 자연에 빚지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1970년 이후 인류가 남긴 생태 발자국 중 탄소 사용에서 비롯된 것은 60퍼센트 정도입니다. 농작물 재배를 위한 토지 용도 변경, 연료나 목재, 펄프 생산을 위한 벌채 등 직접적인 생태계 파괴가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계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생물 다양성도 비슷한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발 빠르게 법제화해 정착시킨 국가는 영국입니다. 2021년 법을 제정했고 2024년부터 생물 다양성 순이익(Biodiversity Net Gain, BNG) 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개발 사업으로 훼손된 자연 생태계를 110퍼센트 회복시키도록 강제합니다. 개발 지역이나 그 인근을 복구하는 방법도 있고 크레딧을 구입하는 방법도 있죠.
규제는 경제적 충격을 낳습니다. 법이 제정된 2021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의 부동산 거래 중 46퍼센트가 기업이나 투자 펀드 등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파트를 올리기 위해 땅을 사들인 것이 아닙니다. 이탄 지대 복원, 조림 사업 등을 통해 탄소 배출권 거래에 뛰어들기 위한 투자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생물 다양성 크레딧 거래 가능성이
투자의 매력을 높였죠.
2025년, 영국의 농민 일부는 농사를 짓는 것보다 농지를 다시 재자연화(rewiding)하는 편이 오히려 이득이라고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소규모로 밭을 일구는 일은 여전히 고되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들인 품에 비해 남는 것이 적은 편인데, 농지를 다시 개간 전의 들판처럼 돌려놓는 대가로 따박따박 수익이 들어온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크레딧 도입 이후 영국 건설 업계에서는 ‘고품질’ 생태계 훼손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했다고 하지요.
마사이족의 퇴거
인류의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땅의 가치를 제대로 찾아갈 기회 말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오늘 한 뼘의 땅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야 한다면 그 계산을 빠르게, 확실히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생태계의 가치를 인류가 제대로 정산할 수 있을까요?
생태 다양성 크레딧보다 역사가 오래된 탄소 배출권 시장을 살펴보죠. 아프리카 대륙에는 탄소 배출권 시장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는 곳이 꽤 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아프리카는 팔 수 있는 탄소 배출권의 2퍼센트 정도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추정이 나와 있습니다. 이걸 개발해 2050년까지는 연간 1000억 달러 규모의 배출권을 판매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연간 800억 달러를 넘어선 적이 없습니다. 탄소는 아프리카에 주어진 가장 큰 기회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말라도 탄소 배출권은 마르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습니다.
구글이 아프리카 국가에 탄소 배출권 명목으로 돈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아프리카가 초원과 숲을 지킬 수 있다면 지구촌에 참 좋은 일일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을 알린 탄자니아의 선주민 부족, 마사이족이 탄소 배출권 사업 때문에 거주지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고발이 나온 겁니다.
탄자니아에는 아랍에미리트의 탄소 배출권 거래 기업인 ‘블루카본’이 진출해 있습니다. 블루카본은 잘 보존되고 있는 숲의 탄소 흡수량을 계산해 탄자니아 정부로부터 탄소 배출권을 사들인 뒤 이를 서구 시장에 되팝니다. 그런데 마사이족이 목축하며 거주하는 지역도 탄소 배출권 사업 지구에 포함되면서 이들을 몰아내려고 한다는 주장입니다.
탄자니아 정부는 자발적 퇴거를 독려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사이족이 이사를 해 실리콘밸리의 데이터 센터가 더 많이 가동되는 것이 인류의 이익입니다. 그런데 환경의 관점에서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탄소 발생량 측정을 제대로 했다면 이 거래의 결과는 현상 유지입니다. 현상 유지를 위해 마사이족이 거주지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챗GPT에 질문 하나를 더 던질 수 있을 테고요.
자연이라는 자산
탄소 배출권이든 생태 다양성 크레딧이든 환경을 파괴할 권리를 사고파는 것입니다. 애당초 개발의 불균형이 부의 불균형을 심화하고, 부의 불균형이 다시 탄소 배출권이나 생물 다양성 크레딧의 생산을 독려합니다. 즉, 개발된 지역의 환경 파괴를 개발되지 않은 지역의 포기와 갈등으로 상쇄하는 셈이 됩니다. 실제로 탄소 배출권 이슈로 투자자들이 몰린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급작스러운 부동산 가격 상승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게다가 환경 문제를 숫자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류도 생깁니다. 런던에서는 방치된 시설들이 재개발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 생물 다양성 크레딧이 지목당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마지막으로 그 수명을 다한
가스 공장과 같은 폐시설 부지가 생물 다양성 크레딧 비용 부담 때문에 재개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성적인 주택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런던의 현실을 생각하면 비합리적입니다. 게다가 폐시설 부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과연 생물 다양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따져봐야 하겠고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덜 만들고 덜 개발하는 쪽이 생태 시스템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더 만들고 더 개발하기 위해 어딘가의 땅값이 오르고 선주민이 밀려나고 농사를 포기하는 일은 앞뒤가 잘 맞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탄소 배출권이든 생물 다양성 크레딧이든 그만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시스템은 임시적인 방편일 뿐, 완벽하지도 않고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다스굽타 교수는 보고서 말미에 자연을 자산(asset)으로 보는 시각은 필요하되 충분치 않다고 경고합니다. 이 문제를 경제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중요하지만, 철학적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환경을 숫자로 환산하면 정책이 되겠지만, 환경의 가치를 이야기해야 비로소 행동이 달라집니다. 애써 고안한 제도들이 21세기의 면죄부가 되지 않으려면 더 넓은 시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