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선거 기간 약속했던 공약이 하나씩 현실이 될 차례입니다. 제대로 실행이 된다면 우리의 일상을 크게 바꿀 정책으로 주 4.5일제가 있습니다. 법정 근로 시간을 현행 주당 40시간에서 36시간으로 줄이는 방식입니다. 일하는 시간이 줄면 임금도 따라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임금을 포함한 근로 조건이 나빠지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이재명 대통령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나라 밖에서는 일을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996’ 문화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중국 이야기가 아닙니다. 워라밸의 본고장, 유럽 얘깁니다. 사실, 세계 경제 상황이 4~5년 전과는 너무 다릅니다. 팬데믹으로 정부가 풀었던 돈은 말랐고, 전쟁으로 물가는 오릅니다.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경기 침체를
경고합니다.
우리나라도 경제 성장률 0퍼센트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주 4.5일제라니 뭔가 말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논의를 해볼 만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말이죠.
유럽은 게으르다
노르웨이 국부 펀드의 니콜라이 탕겐 CEO가 2024년에 논쟁적인 발언을 내놨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인들은 미국인들과 비교하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라면서 유럽보다는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밝힌 겁니다.
탕겐 CEO는 유럽이 미국보다 덜 열심히 일하고, 야망도 덜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규제도 더 많고 위험을 회피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했고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럽과 미국의 직장 문화에 따르면 맞는 말 같습니다. 편견이 아닙니다. 데이터를 따져 봐도 맞는 말입니다. OECD에 따르면 미국인은 연평균 1811시간 일합니다. 유럽의 1571시간에 비해 약 15퍼센트 높은 수치입니다.
실제로 노르웨이 국부 펀드는 2015년 이후 미국 투자를 늘리고 유럽 투자는 줄였습니다. 유럽 경제 공동체의 일원인 노르웨이가 이래도 되나 싶지만, 투자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면, 자금의 10퍼센트 이상을 애플, 메타, 알파벳 등의 미국 빅테크에 투자했습니다. IT 분야의 훌륭한 인재들이 미국에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파리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신임 총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메르츠 총리가 약속한 경제 회생을 위해서는 독일이
더 오래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부도 국민에게 근무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설득이 될지라도 감정적으로는 반발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증세처럼 말이죠.
하지만 전문가들은 독일이 더 일하지 않으면 ‘유럽의 병자’ 신세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 합니다. 실제로 독일은 OECD 국가 중 가장 적게 일하는
나라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평균 근로 시간은 1872시간, 독일은 1340시간이었습니다. 독일은 한국의 70퍼센트만 일합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이 잘못된 줄 알았죠. 하지만 독일은 지금 더 일해야 한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돈만 있다고 저절로 다리나 도로가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전문가의
지적이 나올 정도로 말이죠.
일할 이유
유럽은 왜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세금과 규제 때문이라는 시각입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에드워드 프레스콧은 1990년대 이후 유럽이 복지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세율이 높아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세금이 많아지면 노동에 대한 보상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더 열심히 일할 동기 부여가 떨어진다는 것이죠. 실제로 2023년 기준 GDP 대비 세금의
비율을 살펴보면 미국은 28퍼센트, 유럽은 40퍼센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금이 낮아진다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1987년 아이슬란드에서는 1년 동안 소득세를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세제 개편을 하면서 일종의 과도기를 둔 겁니다. 세금이 동기 부여와 관련이 있다면 노동 시간이 증가했어야 맞겠죠. 실제로 1년간의 면세는 평균 20퍼센트 정도의 임금 인상 효과에 해당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습니다. 해당 기간 근로 시간은 4.9퍼센트
증가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 파트타임 등의 시간제 일자리에서 발생했습니다.
세금 때문이 아니라면, 노동 정책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유럽의 휴가 정책은 관대하기로 유명하고, 해고는 어렵기로 유명합니다. 프랑스는 주 35시간 근무제를 시행 중이며 독일의 근로자들은 1년에 20일 넘게
병가를 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문제
미국의 노동 시장은 유럽과는 크게 다릅니다. 해고는 유연하고 유급 휴가 지급도 법적 의무가 아닙니다. 미국은 극히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없습니다. 그 결과 노르웨이 국부 펀드의 CEO가 지적한 대로 미국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면, 미국 모델이 맞는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럽처럼 정책적으로 근로 시간을 제한하면 여가 시간은 자연히 늘어납니다. 우리가 카페를 방문할 시간, 미술관을 찾아갈 시간도 생기겠죠.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는 겁니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에 기회가 되고, 매출이 됩니다. 여가 시간을 보내는 행위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를 ‘사회 규범과 사회적 역할
이론’으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규범이 변하면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도 변화한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며 노동자는 일터 이외의 삶을 거의 박탈당했습니다. 일주일에 6일, 하루 16시간씩 공장에서 일해야 했죠.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는 ‘성실’과 ‘근면’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습니다.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자본, 노동, 기술이죠. 네, 노동력이 충분히 투입되어야 부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확장하고 발전하던 시대였습니다. 코피 쏟으며 일하면 칭찬받았죠.
그런데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정책적 변화가 이런 기존 가치관에 균열을 냅니다. 법적으로 오후 5시에는 퇴근해야 하고, 아프면 병가를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문화가 낯설고 불성실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가 시간의 중요성을 정책이 지지하면 자연스럽게 근로자의 사회적 역할도 그쪽으로 기웁니다. 반면, 근면함이나 생산성에 무게를 둔 규범이 여전히 지배적인 미국에서는 여가에 대한 죄책감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 있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