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를 끝내는 법

세계화를 끝내는 법

미얀마에서 전쟁이 나도 세계 공급망에 균열이 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세계화를 끝내는 법

2025년 6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내 한복판에 군대가 진입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법 이민자 체포와 추방 정책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 동원된 겁니다. 미국 대통령이 시위 진압을 위해 시민 앞에 군인을 세운 것은 1992년 LA 폭동 이후 33년 만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당시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주지사가 지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로스앤젤레스는 비상 시국입니다. 시민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LA를 이민자 침공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출처: CNN
당연히 비난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 비난에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관세와 함께 이민 정책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사명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미국의 문을 걸어 잠그기 위해 재집권에 나섰고, 성공했습니다. 트럼프는 시대의 부름을 받아 백악관으로 향한 겁니다. 바로 ‘탈세계화’의 시대입니다.

타이타닉이 실어 나른 사람들

한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치고 ‘벨 에포크’는 퍽 낭만적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아름다운(Belle) 시절(Époque)’이란 뜻으로,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을 뜻합니다. 무려 100년입니다. 100년 동안 유럽은 전쟁 없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평화는 생산성의 폭발이 있어 유지될 수 있었고요.

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런던 재계의 큰손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전 세계의 금광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1819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죠. 이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 미국까지 금본위제에 합류했습니다. 금이라는 공통의 화폐를 중심으로 각국의 통화 시스템이 연동된 겁니다. 금본위제 국가끼리는 안심하고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무역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물건과 돈이 오가니 사람도 오갑니다. 만국 박람회와 같은 기술적, 문화적 교류가 빈번히 일어났고 이게 시너지를 냈습니다. 예술도 기술도 폭발합니다. 사람들도 활발히 오갔습니다. 재능 있는 화가들이 파리로 몰렸고 돈과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식민지로 향했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은 대서양을 오가는 대형 선박에 올랐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잭 도슨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자본주의 역사에서 세계화의 시작을 꼽자면 아마도 이 시기일 겁니다. 물론, 유럽만의, 유럽만을 위한 세계화이긴 했지만요. 공장 굴뚝에선 연기가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은 경험한 적 없는 풍요와 혁신을 경험했습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였죠.

세계화의 맹점

우리가 겪은 1990년대 이후의 세계도 이 당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죠. 미국의 달러화를 중심으로 세계 교역 체계가 확고히 자리 잡았고,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장을 돌렸습니다. 식민지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관세 장벽을 낮춘 자유 무역 기조하에 전 세계 곳곳에서 가장 저렴한 원자재, 부품, 중간재들이 컨테이너에 실려 최종 조립 공장으로 실려 왔으니까요.

그런데 이 세계화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벨 에포크 시대에는 임금 노동자들이 불행했습니다. 잠잘 시간 없이 일해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식민지를 갖지 못한 유럽 국가도 불행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점점 벌어지는 격차를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식민 지배를 당했던 곳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고요.

이런 균열이 쌓여 러시아 혁명이 되고 1차 세계 대전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세계화 체제에서도 누군가는 부를 쌓고 누군가는 부를 잃어버립니다. 얻은 쪽은 행복하겠지만, 잃어버린 쪽은 분노하겠죠. 트럼프는 중국과 한국 등이 얻은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잃은 쪽은 미국 시민들이라고 주장하고요.

미얀마에 관심 없는 이유

사실, 중국도 우리나라도 1990년대 이후 세계화라는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벨 에포크 시대의 세계화가 제국주의와 식민 경제를 바탕으로 작동했다면, 현재의 세계화는 ‘공급망’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이 공급망 시스템에 들어와 있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일원인지 판가름 나죠.

예를 들어 미얀마에 관해 생각해 볼까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세계는 큰 관심을 가졌고 전쟁의 종식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미얀마 내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공급망의 일원입니다. 러시아는 에너지와 자원을, 우크라이나는 농산물을 담당하고 있죠. 하지만 미얀마는 공급망에 끼어 있는 국가가 아닙니다. 미얀마에서 전쟁이 나도 세계 공급망에 균열이 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공급망으로 연결된 세계는 생산과 교역에 따라 생겨난 부를 공급망을 따라 분배합니다.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어 판다면 아이폰 공급망 전체가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중국은 기본적인 부품 생산과 조립 쪽의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아이폰 생산을 담당하는 폭스콘은 대만 회사지만, 중국 선전시에 있는 공장에서 중국 노동자들이 실제 생산을 담당합니다. 우리나라는 중간재 쪽의 공급망에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아이폰 초기 모델은 삼성 칩셋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아이폰에 사용되는 부품의 30퍼센트는 한국산입니다.

그래서 애플이 아무리 아이폰을 많이 팔아도 미국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중국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이익입니다. 트럼프는 이걸 겨냥한 겁니다. 미국 시민이 미국 공장에서 일해서 부를 쌓아야 하는데, 이 세계화 시스템이 그걸 막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애플이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공장에서 일할 사람은 자신에게 표를 던진 진정한 미국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관세 장벽을 쌓고 이민자를 끌어냅니다. 그렇게 현재의 세계화를 끝내려는 겁니다.

검박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어차피 달러 패권이 공고한 상황에서 미국에 수출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 내에 공장을 만들거나 엄청난 관세를 물라고 협박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적자를 봐 가면서 달러 중심의 체제를 유지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보기엔 미국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일이었죠.

만약 세계화가 끝난다면 우리는 가난해질 겁니다. OECD는 5퍼센트 가난해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생산 기지를 다시 각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reshoring)’이 급격히 진행될 경우를 가정해 계산한 겁니다. 전 세계 GDP의 5퍼센트가 감소하고 교역량은 18퍼센트 감소합니다.

그 충격은 견디기 어렵겠지요. 팬데믹과 전쟁으로 공급망이 흔들린 것만으로도 유럽은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그 결과 각국에서는 정치권력이 흔들렸습니다. 유럽 경제를 주도하는 프랑스도, 독일도 정권이 교체되거나 그에 준하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죠.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이제 성장을 그만두고 축소 경제의 시기로 접어들거나 새로운 세계화를 도모하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축소 경제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구에 너무 큰 과부하를 걸면서 생산량을 폭발시켜 왔습니다. 인류는 너무 많이 만들어 너무 많이 버립니다. 이제는 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볼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기에 인류는 욕심이 많습니다. 저개발 국가 입장에서는 살만한 국가들이 내놓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가 성장을 멈추기로 약속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새로운 세계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지구촌 대부분이 속해 있다고 오해합니다. 중국 정도가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쟁은 그런 환상을 깨트렸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누가 미국의 편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명확해진 것이죠. 2022년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52개국이 미국의 편입니다. 인구의 45퍼센트를 차지하는 25개 국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인도나 카타르 같은 곳입니다.

당시에는 완벽하게 미국 편이었던 52개국도 현재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대표적인 우방국이었던 캐나다의 기조가 달라졌고, 독일은 군사력 증강에 나섰습니다. 미국 없이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트럼프의 안티-세계화 정책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1~2년 안에 끝날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현 체제가 정말 끝날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조정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죠. 어쨌든 평화는 끝나고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세계의 정의는 곧 바뀔 수도 있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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