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5년 후인 2070년도의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늘 확률 낮은 도박이지만, 꽤 높은 확률로 맞출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인구 구조입니다. 2070년 우리나라 중위 연령은 63.2세입니다. 15세에서 64세까지의 생산 연령 인구보다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 숫자가 더 많습니다.
이 데이터를 두고 우리는 주로 ‘출생률’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를 낳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인구 절벽에 대비한 기술과 시스템을 다져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45년 후를 위해 중요한 담론입니다. 하지만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며 논의해야 할 숫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사망률’입니다.
예를 들어 2025년에 55세인 인구 집단을 살펴보죠. 1970년에 태어났고, 약 89만 명입니다. 이들은 2070년에 100세를 맞게 됩니다. 그때까지 약 70만 명이 사망해 19만 명 정도가 남습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과정을 겪을 겁니다. 흔히 ‘베이비부머’라고 불리는 세대입니다. 우리 사회는 압도적인 사망의 시대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구 절벽을 걱정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죽음입니다. 정확히는 죽음과 그 이전에 필연적으로 선행되는 의료와 돌봄의 수요에 한국 사회는 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이 언제 어떻게 삶을 마감할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대비하거나 준비할 방법이 묘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각국은 이 문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조력 사망(assisted dying)’ 얘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논의가 활발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논의를 시작해야 할 문제입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나라
조력 사망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하는 환자에 한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로 많이 알려졌지만, 해외에서는 이 용어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조력 사망이라고 칭합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 스페인 등에서는 이미 합법입니다. 벨기에의 경우에는 미성년자도 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조력 사망을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왔죠. 캐나다는 정신 질환자도 조력 사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와 영국도 합류할 전망입니다. 지난 5월 28일 프랑스 하원에서 조력 사망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영국 하원은 2024년 11월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후 추가 검토를 통해 세부 사항을 수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6월 20일 하원의 최종 결정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이들 국가에서는 ‘인위적인 죽음’을 합법화하기까지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직 법이 완전히 통과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그 논쟁이 현재 진행 중이고요. 당연한 일입니다. 인류는 인간다운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법의 테두리 안에 넣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헌법을 보죠. 헌법 34조에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보장 제도가 있는 것이고요. 헌법 31조에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명시되어 있죠. 의무 교육 제도는 이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렇게 헌법에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라는 시스템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반면, 죽음에 관해서는 다릅니다. 우리 헌법에 인간다운 죽음의 조건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제10조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언급하며 행복 추구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확대해서 해석하면 존엄하게 죽을 권리까지 포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조항 등을 근거로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는 개별 사건 단위의 판결, 법 조항의 개정 등이 있었습니다.
병원은 죽음을 허용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김 할머니 사건’입니다. 2008년 2월, 당시 78세였던 김 할머니는 폐암 여부를 판명하기 위한 조직 검사를 받다 과다 출혈로 뇌에 손상을 입고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날 가망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영양 공급은 계속하되, 스스로 호흡할 수 없을 때 보내 드리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병원 측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병원이 내세운 이유는 사전 의료 지시서나 직접적인 의사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 인공호흡기 사용 중단을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식을 잃은 환자의 의중을 파악할 방법은 없습니다. 김 할머니는 당시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할머니의 신체가 둘 중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존중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고요. 반면, 의료진은 할머니의 신체를 연명 치료를 통해 삶의 영역 쪽으로 끌어당겨 일단 붙잡아 두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막아선 겁니다.
가족도 아닌 병원이 이렇게 김 할머니의 삶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의료계 전문가들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997년 12월, 58세 남성이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실려왔습니다. 뇌출혈이었고, 수술을 받았지만 스스로 호흡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료진은 이 남성이 그래도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이라 보고 인공호흡기를 달아 치료를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퇴원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 남성은 평소 가정 폭력을 휘둘러 왔고, 하던 사업이 망하면서 경제적 기반도 무너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남성이 회복하면 다시 가정 내에 문제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보라매병원 측은 처음에는 퇴원을 만류했습니다. 퇴원하면 사망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족들의 요구에 결국 병원은 퇴원 후 환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환자를 귀가시킵니다.
이 남성은 퇴원 후 인공호흡기를 뗀 지 5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보호자인 아내와 보라매병원 의료진이 살인죄로 기소되었습니다. 1심에서는 죄가 인정되었습니다. 항소 끝에 대법원에서는 아내는 살인죄가, 의료진은 살인 방조죄가 확정되었고요. 의료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가족은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이런 판례가 있으니, 병원이 환자를 적극적으로 삶의 영역에 묶어 두고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가망 없는 퇴원’이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살인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김 할머니의 가족들은 연명 치료 중단 요구와는 별개로 할머니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것이 병원 측의 책임이라며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의료진이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죠.
법원 판단은 달랐습니다. 환자의 존엄과 자기 결정권에 기초해 김 할머니의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또, 연명 치료는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라고 보기도 했죠. 하지만, 이 사건에서 법원은 할머니가 과거 남편의 연명 치료를 반대했던 경험을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비슷한 판단을 할 것으로 ‘추정’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판결로 의료진이 환자의 생사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김 할머니 사례나 보라매병원 사례는 가족이 연명 치료 중단을 요구한 경우입니다. 이게 법정까지 가서 공방이 된 것이고요. 특이한 사례였다는 얘깁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가족이 연명 치료를 고집합니다. 환자가 거부해도 설득하고 의료진에게 매달려 가며 어떻게든 호흡을 연장합니다. 말기 암환자의 경우
간병비는 한 달에 300만 원 이상입니다. 1년이면 3600만원이고요. 사회 전체로 보면 엄청난 비용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하면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세주의’ 탓입니다. 내세를 전제하는 신앙도 한국 사회에서는 현세의 복을 비는 ‘기복 신앙’의 요소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 집착하게 된 까닭은 복합적일 겁니다. 전쟁의 경험, 유교의 영향 등 우리의 역사 전반이 삶에 대한 집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자 합니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입니다. 좋은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 삶에 채워 넣고 싶었던 것들을 챙겨 보는 시간, 그리고 나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런 논의는 한때 불치의 병이나 난치의 병을 앓고 있는 말기 환자들의 이야기로 여겨지곤 했지만, 의료 기술이 발전하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화로 인한 죽음에 대해서도 관련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잘 죽는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조력 사망 문제가 대두된 것이고요. 고통을 멈추는 방법으로, 나의 의식이 온전할 때 삶을 멈추는 방법으로 조력 사망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나라보다도 초고령 사회에 빠르게 진입한, 그래서 가장 절실하게 죽음에 관해 논의해야 할 한국만 유난히 조용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방법
현재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연명 치료와 완화 의료입니다. 연명 치료는 살기 위한 치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본적인 신체 기능을 유지해 병으로부터 회복할 기회를 기다리는 겁니다. 완화 의료는 잘 죽기 위한 치료입니다. 말기 환자의 통증, 구토, 호흡 곤란 등의 신체적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 삶의 질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줄이고, 완화 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잘 죽을 기회가 보장된다면 조력 사망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사례를 목격해 온
의료인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앞서 살펴본 김 할머니의 사례나 보라매병원 사건 때문이 아니더라도, 의사라면 사람을 일단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애당초 의사란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완화 의료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료 현장에서는 조력 사망을 논하기 전에 완화 의료 체계부터 탄탄히 세우자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영국에서도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삶을 찾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보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공포도 있었고요. 하지만 긴 논의가 있었고 시민들은 조력 사망의 합법화를 원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꾸준히 공개되었습니다. 강경했던 영국 의료계의 의견도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아직은 조력 사망 반대 의견이 더 우세하긴하지만요. 결국, 영국은 조력 사망 합법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죠.
2016년 영국 국회 보건 및 사회복지 위원회는 〈고령 환자의 병원 퇴원 문제(Discharging older patients from hospital)〉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고령 환자가 병상을 너무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어 의료 체계에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보고서는 매일 최소 1만 명의 환자가 퇴원할 수 있는 상황에도 병상을 떠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이들 중 많은 숫자가 말기 또는 만성 질환 환자, 고령 치매 환자들이며, 적절한 대체 돌봄 수단이 없어 퇴원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고 분석합니다.
고령의 갈 곳 없는 환자들이 의료 시스템의 병목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이 보고서의 내용은 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요양원의 현실을 보고 나면 잔인함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돌봄은 삶의 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먹을 기력이나 의지가 없는 환자에게는 일명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을 삽입해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몸이 더러워져도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입니다. 환자를 결박하거나 감금하는 일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삶은 잔인하지 않은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강요된다는 공포
질문들이 쌓인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조력 사망입니다. 죽을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23년 척수염으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한 환자가 조력 사망을 합법화해 달라며
헌법 소원을 냈습니다. 딸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끝내고 싶지만, 그 경우 딸은 자살 방조죄로 처벌받게 됩니다. 법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지 않으면, 이 환자의 고통을 끝낼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을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순간 죽음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습니다.
중증 장애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의료 시스템과 간병인에게 의존해 삶을 이어 가는 이들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 선택지가 훨씬 저렴한 것이라면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어떤 선택을 암묵적으로 권하게 될까요.
또한 선택지 자체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제공하는 돌봄 서비스나 완화 의료 구축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는 상황을 가정해 보죠. 조력 사망 외의 선택지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키는 겁니다. 어떤 정부가 그런 짓을 저지를까 싶지만, 조력 사망 합법화 주장의 기본 근거 중 하나는 사회적 비용 감소입니다. 영국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조력 사망 법안이 시행되면 연간 4500명 이상이 이 제도를 선택하게 될 전망입니다. 그 결과 5960만 파운드의 공공 의료 비용이 절감됩니다. 1000억 원이 넘는 금액입니다.
이런 계산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죽음을 강요했던 정권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나치당입니다. 1930년대 독일의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가 실렸습니다.
“이 유전병 환자를 살리느라 민족 공동체가 6만 제국 마르크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민족 동지여, 이것은 당신의 돈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민족을 구성합시다.”
나치는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이라는 이름 아래 30만 명의 장애인을 학살했습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바로 다음 해부터는 40만 명 이상이 유전병 등을 이유로 강제 불임 시술을 받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