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딜레마
민주당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시선이 갈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당선 이후 민주당은 다양성, 인권 같은 의제를 강화했는데, 이스라엘의 강경한 팔레스타인 정책은 당내 진보 세력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수자 인권을 외치면서 정작 약자 중의 약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에는 눈감고 입 다물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영 리버럴(young liberal)’은 참지 않았죠. 2018년 중간 선거 때 등장한 진보 성향의 여성 초선 하원의원 4인방은 미국 정계의 금기를 깨고 이스라엘을 비판합니다. 최초의 무슬림 여성 의원 일한 오마르는 미국 정치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건 유대인 로비 단체인 에이팩(AIPAC)의 자금 때문이라고
지적했죠.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내에서도 반유대주의적 비방이라는 항의가 나왔습니다. 민주당 지도부가 나서 논란을 겨우 수습했죠.
조건부 지지파도 있습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유대계 진보 정치인입니다. 샌더스는 이스라엘의 존재 권리를 인정한다면서도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에는 비판적입니다. 샌더스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조건부 지원’ 개념을 제시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지원한 무기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조사해서, 인권 침해 요소가 발견되면 군사 원조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내 주류는 역시, 전통적인 친이스라엘 세력입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 등이죠. 트럼프만큼이나 이스라엘을 좋아하는 바이든은 “나는 시온주의자다. 유대인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했죠. 그러나 가자 지구 전쟁에서 민주당 지지층과 젊은 세대가 팔레스타인에 더 큰 동정을 느끼고 휴전을 요구하면서 바이든 정부는 복잡한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종합하면, 민주당은 이스라엘을 보는 시선에서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통적 지지파, 조건부 지지파, 공개 비판파입니다. 각 그룹의 당내 비중은 관련 표결 결과를 보면 얼추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23년 12월 5일 하원에서 ‘이스라엘 국가 비판은 곧 유대인 증오’라는 황당한 내용의 결의안이 71퍼센트의 찬성으로
통과됐습니다. 민주당 의원은 213명 중 찬성 91명, 반대 14명, 기권 92명, 불참 16명이었습니다.
공화당의 신앙
반면 공화당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성역입니다. 앞서 소개한 결의안에서 공화당 의원은 1명 빼고 모두 찬성표를 던졌죠. 2000년대로 접어들며 공화당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종교적 신념으로 진화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ity)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구약 성서의 예언을 근거로 유대인이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에 거주해야만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정치 행동으로 옮깁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중동에서 사실상 ‘문명의 전쟁’을 전개합니다. “십자군 전쟁(crusade)”이라는 말까지 했다가 중동 국가들이 반발하자 백악관은 사과 성명을 내고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죠. 또 부시는 양국 관계를 “공통된 정신, 성경의 유대감, 영혼의 끈”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전략적 동반자를 넘어 종교적, 도덕적 공동체 수준입니다.
2006년에는 TV 설교로 명성을 얻은 존 헤이지 목사가 ‘이스라엘 기독교 연합(Christians United for Israel·CUFI)’이라는 복음주의 단체를 설립합니다. 헤이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곧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합니다. 100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에게 문자를 보내 의원 압박을 요청하는데, 이런 식입니다. “상원의원 ○○○에게 연락해 ‘팔레스타인 지원 중단 법안’에 찬성하라고 요구하세요.”
복음주의 세력은 이스라엘 정책뿐만 아니라 낙태, 교육, 종교 등 보수 의제 전반에서 공화당을 지지하는 핵심 집단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이 단체의 연례행사에 참석해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경쟁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문제는 공화당 내에서 ‘신앙의 정치화’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전통 보수 vs MAGA
미국 유권자의 25퍼센트가 백인 복음주의자입니다. 그중 81퍼센트가 2016년 트럼프에게
투표했죠. 트럼프는 보답하듯 집권 1기 내내 친이스라엘 정책을 쏟아냈습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고, ‘세기의 거래’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패싱하는 평화안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신앙과도 같았던 공화당의 이스라엘 정책 기조는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균열하기 시작합니다. 트럼프의 또 다른 정치 기반 MAGA 때문입니다. MAGA 역시 이스라엘을 중시하지만, 그래도 미국이 최우선입니다. 강성 MAGA는 이스라엘 지지를 이익의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그들은 미국이 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야 하며, 그 대가를 왜 평범한 미국인이 치러야 하는지 묻습니다.
MAGA 지지자들은 공화당 주류인 전통적인 보수 세력(네오콘, 복음주의)의 개입주의를 해체하라고 트럼프에게 표를 줬습니다. 트럼프는 외국 전쟁에 미군을 보내지 않겠다고 수백 번 넘게 공언했죠. 그랬던 트럼프가 제 발로 또 다른 외국 전쟁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MAGA 지지자에게 시급한 건 이스라엘의 안보가 아니라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공장 재가동이고 이민 단속인데 말입니다.
미국의 공습을 받은 이란은 “이제 모든 미국인과 미군은 합법적 표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은 “이란이 미국인이나 미군 기지를 공격한다면 파괴적 보복으로 대응하겠다”라고
했고요. 전선이 확대되면 전통 보수와 MAGA의 충돌 역시 격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충돌은 ‘공화당은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이스라엘은 불과 몇 년 전까지 공화당을 하나로 묶던 강력한 접착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수 내부를 균열하는 해체 인자가 되고 있습니다. 전통 보수는 백악관과 상원 군사·외교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고, MAGA는 미디어와 일반 여론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둘 중 누가 승리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더는 공화당의 성역이 아니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