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스타가 탄생했습니다. 뉴욕 증시에 블록버스터급 IPO를 성공시킨 스테이블코인 회사 ‘서클(Circle)’ 얘깁니다. 6월 초 상장 이후 주가가 600퍼센트 이상 상승했습니다. 공모가는 31달러였는데, 현지 시각 23일 기준 263.45 달러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다만, 이후로는 조정 국면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쐐기를 박은 것은 지난 17일 미국 상원을 통과한 ‘지니어스 법’입니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책을 담고 있습니다. 법으로 규제하겠다는데 왜 기대를 할까 싶지만, 지금까지 없는 자식인 셈 쳤던 스테이블코인을 정식으로 인정하겠다는 얘기라서 그렇습니다. 제도 아래에 두고 금융 시장의 공식 플레이어로 끼워 주겠다는 겁니다.
이제 하원 표결과 백악관의 승인만 거치면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자산이 됩니다.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키우겠다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입니다.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고 민주당에서도 일부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거기에 백악관은 트럼프가 장악하고 있으니 거의 확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가격 보장
스테이블코인은 말 그대로 코인의 가치가 ‘안정적(stable)’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거래 상황에 따라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지 않도록 코인의 가격을 정해 둡니다. 서클이 발행하는 USDC 코인의 경우, 1USDC는 1달러입니다. 이걸 ‘페깅(Pegging)’이라고 합니다. 그냥 무턱대고 우긴다고 페깅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인을 10개 발행했으면 10달러어치의 자산을 보유해 공개하는 식으로 가치를 보장합니다. 주로 미국 단기 채권을 삽니다.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가치를 잃을 일이 없고, 채권 이자 수익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그냥 달러를 쓰는 것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라서 갖는 특성이 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 때 제약도 없고 환차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돈을 보내려면 무조건 비용이 듭니다. 코인이라면 완전히 공짜입니다. 결제 수단으로 사용할 때도 신용카드와 달리 수수료가 없습니다. 시간도 절약됩니다. 스테이블코인이라면 몇 초 만에 처리됩니다. 은행에 계좌를 만들기 힘든 경우에도 거래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화폐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부터도 실제 돈을 들고 다니는 일은 없습니다. 애플페이와 신용카드를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죠. 가끔 현금을 사용해야 할 때에도 계좌 이체를 하면 문제없습니다. 직접 만질 수 있는 지폐나 동전 없이도 저의 자산은 숫자로 저장되어 이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한 거래가 활발해지면, 이 자유로움은 국경과 은행 계좌도 초월하게 됩니다.
달러 패권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 없다고 한들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도 대부분의 금융 거래는 충분히 편리합니다. 미국 정부가 나서 스테이블코인을 밀어주고 준화폐의 지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2024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향해 엄포를 놓았습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려 한다면 100퍼센트 관세를 물리겠다고요.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브릭스 국가 정상들 앞에서 달러화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발언을 내놓고, 중국도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이런 시도를 당장 멈추라고 경고한 겁니다.
사실, 무역이 달러에 묶여 있는 이상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정치인과 부호가 보유한 달러 자산들이 모두 동결되었죠. 이런 식으로 언제든지 미국이 제재를 걸 수 있습니다. 미국의 힘은 달러에서 나오고, 달러가 곧 미국의 힘입니다.
그러니 미국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브릭스 국가들 입장에서는 달러의 권력이 눈엣가시입니다. 특히 미국을 넘어서고 싶은 중국으로서는 더욱 그렇겠죠. 어떻게든 달러의 힘이 약해지는 틈을 노리고, 위안화를 비롯한 달러의 대체 통화 사용 비중을 늘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위안화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입니다. 중국의 법정 화폐인 위안화를 디지털 형태로 구현한 것으로, ‘디지털 위안화(e-CNY)’라고 합니다. 여기에 중국이 꽤 공을 들였습니다. 세계적으로 화폐 가치가 불안정한 나라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물가가 다르고, 환율이 다른 나라들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엘살바도르가 있죠. 자국 화폐 가치가 너무 불안한 나머지, 비트코인을 공식 화폐로 도입했습니다. 이런 나라들을 중심으로 디지털 위안화가 확산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지난 18일, 중국 인민은행은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적 사용을 가속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성공 여부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 입장에서는 이걸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수도 있으니까요. 견제구를 날려야 합니다. 그게 스테이블코인입니다.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CBDC는 각국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 화폐입니다. 지폐가 아니라 디지털 형태로 발행할 뿐, 공식적인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각국 중앙은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니어스 법과 같은 규제책으로 안정성을 확보했을 뿐, 민영 기업이 발행하는 상품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중국 정부의 디지털 위안화를 견제할 수단으로 민간의 달러 페깅 스테이블코인을 풀어놓는 전략을 택한 겁니다.
만약 제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고 가정하죠. 지금까지는 달러로 송금해야 했습니다. 외화 송금 수수료를 내고 가족 통장에 입금하고 나면, 이걸 현지 화폐로 바꾸는 데에 가족들이 또 수수료를 내야 했습니다. 손해가 적지 않습니다. 디지털 위안화로 보내면 이런 손해가 없으니 달러 대비 디지털 위안화가 이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안정성이 보장된 달러 페깅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선택지가 추가된다면 이론적으로 저는 달러 페깅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르헨티나 안에서도 위안화보다는 달러가 더 폭넓게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채
스테이블코인이 세력을 확장하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의 화폐가 멸종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아프리카 대륙이나 남미 지역, 그 밖의 분쟁 지역 등에서는 자국 화폐의 가치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법정 화폐가 유명무실해지고, 그 자리를 스테이블코인이 대신하게 되는 겁니다. 달러 패권은 더욱 강해집니다.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는 더 늘어나겠죠.
강해지는 것은 달러 패권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국채의 기세가 살아납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움직임 중 하나가 바로 미국 국채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흔히 미국 달러화는 기축 통화고, 미국은 유동성이 필요할 경우 달러를 찍어내면 되기 때문에 망할 일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달러를 진짜로 막 찍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채권을 발행하죠. 빚을 지는 겁니다.
미국 국채의 75퍼센트는 미국 정부와 미국 시민들이 갖고 있습니다. 나머지 25퍼센트는 수출됩니다. 각국 정부가 달러 비축용으로 많이 사는데, 일본과 중국이 큰손입니다. 각각 미국 국채 보유량 1, 2위를
수성해 왔죠. 그런데 최근 중국이 미국 국채를 내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국채 보유량 2위 자리를 영국에 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제 시장에서 미국 국채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국채를 너무 많이 발행했다면서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미국 정부의 신용 등급을 떨어트리고 있는데, 중국까지 이러면 트럼프는 사면초가입니다. 중국이 채권을 덜 사는 만큼 미국 정부가 채권을 사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에는 더 큰 부담이 가겠죠.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이 세력을 확장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코인을 발행하는 만큼 달러화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냥 돈으로 들고 있는 것보다 국채, 그중에서도 단기 국채로 들고 있는 편이 낫습니다. 이자가 붙기 때문입니다. 즉, 스테이블코인 회사들이 떨어지는 국채 수요를 받쳐줄 수 있는 겁니다.
이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중국보다 더 많은 단기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는
추산이 나옵니다. 모건스탠리는 그 규모를 2000억 달러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향후 성장 속도에 따라 2년 이내에 보유량은 4000억 달러에서 최대 1조 6000억 달러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시장의
전망치입니다. 일본의 보유량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은행이 망하면
이런 변화가 현실이 되어도 전체 금융 시스템이 잘 굴러가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100만 원을 은행에 넣어 두면, 그 돈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시장을 돌아다닙니다. 은행이 그 돈을 누군가에게 대출해 줄 테니까요. 즉, 은행에 넣어 둔 돈은 살아 있는 돈입니다.
반면, 제가 100만 원어치 네이버 포인트를 갖고 있다고 해보죠. 그 돈은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네이버가 만약 제 돈으로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고 쳐도, 그 돈은 그냥 미국 국채에 묶여 있는 돈이 됩니다. 즉, 시장 전체에 살아 있는 돈의 규모를 줄이는 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은행에 5000만 원을 예금해 두면 그 돈은 예금자 보호법으로 보호받습니다. 그러니까, 은행이 망해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사게 되면, 코인 발행사는 고객들의 돈을 모아서 어딘가에 예치하게 될 겁니다. 돈의 크기가 커지면 예금자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은행이 망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2023년에 은행이 망하는 것을 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입니다. 당시 SVB 주요 고객 중에는 서클도 끼어 있었습니다. 30억 달러 이상이 물려 있었죠. 뱅크런이 발생하자 서클은 돈을 인출하려 했지만, 인출이 완료되기도 전에 규제 당국이 SVB의 지급을 중지했습니다. 이 여파로 당시 USDC의 가격이 1달러 이하, 약 0.85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이지만, 재난급 변동에는 안정적일 수 없는 겁니다. 물론, 정부가 SVB 예금을 전액 보장하겠다고 발표한 뒤에는 가격을 다시 회복했지만요.
게다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채권을 너무 많이 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불안 요소입니다. 특히 대량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계기가 생기게 되면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코인 발행사들이 미국 국채를 사들일 때는 상황을 봐가면서 차근차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빠져나갈 땐 다릅니다. 즉각 준비금을 매각해야 하니 시장이 흔들립니다. 대규모 국채 환매가 발생하면 단기 국채 시장이 출렁여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고 미국 국채의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 국채를 들고 있는 전 세계 중앙은행에까지 그 여파가 미칩니다.
원화의 미래
미국이 쏘아 올린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공은 이제 전 세계로 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튀었습니다. 만약 올리브영, 다이소, 무신사에서 USDC를 받는다고 가정해 보죠. 면세점에서도 USDC를 받고요. 한국을 찾는 관광객으로서는 원화로 환전을 해올 이유가 작아집니다. 즉, 한국 돈의 수요가 줄어듭니다. 만약 작은 무역 회사를 운영한다면, 역시 USDC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겁니다. 자금을 외화 통장에 달러로 넣어 두는 대신 USDC로 보유하는 편이 기록도 남지 않고 거래에도 편리하겠죠.
이걸 막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관한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집권 여당이 적극적입니다. 자본금 5억 원에서 10억 원 정도면 누구든 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마트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이걸로 장을 보면 혜택을 주는 식으로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마트는 카드 수수료도 아끼고, 결제 시스템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정치권에서 드라이브를 걸어 추진하기에는 고려할 점이 많습니다. 갑자기 이마트 코인, 쿠팡 코인, 삼성 코인 같은 스테이블코인들이 난립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우리는 ‘와일드캣’ 시대로 회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은 공식적인 법정 통화가 없어 지역 은행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화폐들이 난립했습니다. 와일드캣 은행들은 당시 주 정부 규제의 허점을 노려 마구 대출을 내줬습니다. 찍어낸 화폐 가치만큼의 금을 준비하지도 않고 말이죠. 주로 외딴 지역에 지점을 냈습니다. 은행까지 찾아오는 길을 최대한 힘들게 만들어 화폐를 금으로 바꾸어 가는 일을 막으려 한 겁니다. 사기입니다. 결국 부실이 터지면서 대규모 뱅크런이 발생해 1837년 대공황을 촉발했죠.
게다가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활발해지면 달러 기반의 코인 사용도 함께 촉진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원화를 방어하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활성화하겠다는 정책의 취지가 무색해집니다. 즉,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되 이걸 추진하는 주체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 당국과 시장이어야 합니다. 자본금을 어느 정도로 맞춰야 코인이 난립하지 않고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규모를 어느 정도로 맞춰야 금융 시장에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세밀한 계산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러가 아닌 원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할 동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난제겠죠.
이제 돈이 쉽게 이동하는 시대가 옵니다. 해외에 돈을 보내기 위해 외화 사용 용도를 중앙은행에 적어 내야 했던 일은 이제 곧 과거가 될 겁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국경은 무의미해지고 돈의 국적은 흐릿해졌습니다. 트럼프는 그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