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시작됐습니다.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진숙 전 충남대 총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제안한 인물입니다. 서울 쏠림 현상과 과열된 입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전국 9개 거점 국립대에 예산을 집중 투입해 서울대 수준으로 육성하는 정책입니다. 5년간 15조 원의 추가 재원이 필요합니다.
지역 거점 국립대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 정책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서울대를 10개 만들겠다는 말은 서울대는 성공 모델이고, 그 성공 모델을 지방에 복제하겠다는 뜻입니다. 서울대가 선망의 대상인 건 분명하지만, 성공한 모델인지는 의문입니다. 문제는 서울대가 성공한 모델이었다 해도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수명이 다해 가는 모델을 15조 원을 추가로 써가며 복제하는 꼴이 됩니다.
서울대를 10개 만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학의 문제부터 풀어야 합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지 않은 채 대학을 국가 균형 발전의 도구로 삼거나, 입시 문제의 해결책으로 써서는 안 됩니다. 대학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왜 필요한지, 그렇다면 대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본질을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 문제 해결은 그다음입니다.
일론 머스크 같은 마이클 샌델
따지고 보면 우리는 대학의 목적에 대한 합의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돈을 벌어다 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초연하게 기초 학문 연구에만 몰두해 주기를 바랍니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해 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취업 지원 기관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혁신하는 동시에 전통을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일론 머스크에게 마이클 샌델을 요구하고, 유발 하라리에게 젠슨 황을 요구하는 격입니다.
우리는 대학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환상 혹은 낭만을 거두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대학은 국가가 공인한 온·오프라인 정보 사업자입니다. 정보를 생산하고, 가공해서 제공하고, 자격을 인증합니다. 지식 공급과 학위 발급이라는 분야의 독점적 사업자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독점 구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학 외에도 지식을 공급하는 곳이 많아졌고 학위 외에도 자격을 증명하는 수단이 많아졌습니다.
대학은 아직 학위 수여를 독점하고 있지만, 학위의 가치마저 하락하고 있습니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 네 명 중 한 명이 대학에 갔지만, 지금은 네 명 중 세 명이 대학에 갑니다. 대졸은 디폴트값이 됐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입니다. 학위가 운전면허증보다 흔해지면서 학위 소지는 더 이상 개인의 능력을 보여 주는 징표가 되지 않습니다.
팔란티어 같은 회사는 아예 고졸자를 채용해 실무를 가르치고 회사가 발급한 학위를 줍니다. “대학은 고장 났다”면서 대학에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팔란티어 학위’를 취득하라는
거죠. 대학교를 중퇴하고 창업하는 조건으로 지급하는 피터 틸 장학금, 구글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구글 커리어 서티피케이트(Google Career Certificates)도 비슷한 취지입니다.
아주 이상한 비즈니스
사실 대학은 국립이든 사립이든 운영 방식이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학 역시 돈을 벌지 못하고 적자가 누적되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립보다 국립이 좀 더 버틸 수 있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국내 4년제 대학의 연간 수입을 합하면 25조 원쯤 됩니다. 전국 193개 4년제 대학을 대형 교육 기업의 지점으로 가정한다면, 이 기업은 국내 기업 매출 순위 20위권에 들어갑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매출을 합한 것보다 많습니다.
이 막대한 수입 25조 원은 어디서 나올까요. 국립대는 절반이 정부에서 나옵니다. 사립대는 20퍼센트가 정부 지원이고요. 나머지는 등록금과 각종 수익 사업으로 벌어들입니다. 정부는 대학이라고 해서 돈을 그냥 주지 않습니다. 대학은 정부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고등 교육이라는 서비스의 가격, 종류, 수량, 품질에 대한 정부 기준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니까 매출에서 정부 용역 비중이 큰 사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은 매년 10조 원의 정부 예산을 타가면서도 재정난이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강의실에 비가 새도 고칠 돈이 없고, 교수진 공백이 생겨도 전임 교수를 뽑을 돈이 없어 강사로
대체합니다. 그러니 수요자인 학생도 교육 서비스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회사는 가난하고 직원은 무력하고 고객은 불평합니다. 대학이 완전한 민간 기업이었다면 시장에서 진작 퇴출당했거나, 대규모 구조 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고등 교육의 공공성과 보편성을 고려할 때 대학의 완전 민영화는 득보다 실이 많겠지만, 기업의 논리로 대학을 바라보면 실패 요인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발상의 전환을 해보는 겁니다.
우선, 대학은 모두 같은 제품을 팝니다. 전국 어느 대학을 가든 맥도날드 햄버거만 파는 식입니다. 스타벅스, 무인양품, 올리브영, 다이소처럼 뚜렷한 색깔이 없습니다. 대학은 의무 교육이 아닌데도 인문, 사회, 경영, 공학 등 전공 라인업이 비슷하고, 커리큘럼도 비슷합니다. 기업이라면 특정 시장에서 차별화된 상품을 내놓거나 틈새 전략을 취하겠지만, 대학은 같은 상품을 경쟁적으로 제공합니다.
수요 예측도 하지 않습니다. 수요가 줄고 있는데 공급은 줄어들지 않는 기이한 시장입니다. 학령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대학은 과잉 공급 구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원은 유지한 채로 입학 정원 미달을 감수합니다. 서울대도 미달이 나옵니다. 기업은 수요가 위축되면 공급을 줄이거나 과감한 구조 조정이나 상품 개편을 단행하는데, 대학은 유사 전공을 중복해서 공급하며 상품 포장지만 조금씩 다르게 붙이고 있습니다.
가격 전략도 실패했습니다. 등록금은 사실상 정부가 상한을 정하고 대학이 거기에 최대한 맞춥니다. 가격은 고정되어 있는데, 졸업장이라는 상품의 프리미엄 가치는 꾸준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학위의 가치와 수업료의 가치, 둘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질 겁니다. 기업이라면 학위의 가치를 올리거나 가격을 낮출 텐데, 대학은 두 방법 어느 것도 택하지 않습니다.
고객 개념도 없습니다. 대학은 학생을 고객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상품으로도 삼지 못합니다. 학생은 수업료를 내는 소비자인데, 대학은 학생을 평가 대상으로만 취급합니다. 학생을 인재로 잘 키워서 기업에 공급하겠다는 공급자 마인드도 부족합니다. 졸업 후 진로 추적 같은 고객 피드백을 상품 개선에 활용하지 않습니다. 고객 정의가 되지 않으니, 브랜딩도 마케팅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대학은 혁신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학과를 신설하고 커리큘럼을 변경하는 등 모든 변화가 느리고 복잡합니다. 정부 허가 없이는 정원 한두 명도 바꾸지 못합니다. 플립 러닝이나 디지털 기술 도입은 일부 교원의 반대로 지연됩니다. 기업이 실시간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업데이트하는 세상인데, 대학은 몇 년 단위의 승인을 기다립니다.
대학은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야 합니다. 대학만큼은 20세기 중반의 비즈니스 모델을 고수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지식 산업에 있는 방송과 신문과 출판이 지난 20년간 겪은 일을 대학도 필연적으로 겪게 될 겁니다. 권위 상실, 영향력 감소, 매출 하락, 구조 조정, 그리고 폐업입니다. 대학이라고 파괴적 기술 혁신의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대학의 미래
의대 정원을 정할 때도 2050년 의사 수를 추계해서 지금 의대생을 얼마나 뽑아야 하는지 살핍니다. 하물며 고등 교육 자체를 개혁한다면 적어도 20~30년 후 대학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고민해 방향성을 잡아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지식 전달 기관으로서 대학의 기능은 소멸해 있을지 모릅니다. 지식 축적과 강의 제공은 AI에 대체될 수 있겠죠. 단순 지식 습득을 위한 4년간의 수업은 비용 대비 효용이 현저하게 떨아져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학을 질문하는 장소로 재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AI는 답을 주는 존재이지만, 무엇이 중요한 질문인지 판단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 사회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이 인간적인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인간만 제기할 수 있습니다. 대학은 지식의 끝이 아닌 시작점이 되어야 하겠죠. 문제를 정의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장이 되는 겁니다.
미래 대학은 사회적 실험의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보다 실행, 수동적 수강생보다 능동적 활동가를 위한 플랫폼이 되는 겁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협업과 충돌을 경험하는 사회적 훈련의 장, 실제 프로젝트와 창업, 커뮤니티 실험을 수행하는 현장 기반 실습의 장,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적 실험실(living lab)의 역할을 대학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AI는 학위 없이도 역량을 증명하는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미래 대학은 사라져 가는 학위의 발급처가 아닌 지속적 연결망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학교와 학생의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가는 지적 공동체로 진화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특정 대학의 졸업장은 계급장이 아니라, 그 대학 특유의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가졌다는 사회적 신호로 해석될 수 있겠죠.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연간 1조 3000억 원의
보조금을 받는 서울대가 미래 대학의 모습을 갖춰 나가고 있을까요? 저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내년과 내후년에는 미래 대학의 모습과 거리가 더 멀어지겠죠. 서울대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너무 빠르게 달아나고 있어서입니다. 기존 모델의 수명이 다했다면 복제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미래 대학의 모습에는 여러 시나리오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전제는 같습니다. 대학은 실패할 권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정부가 대학에 보조금을 준다면 ‘복제’가 아니라 ‘위험 감수’를 보상해야 합니다. 지금 대학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자금 부족이나 인구 감소, AI가 아닙니다.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구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