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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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텍사스 홍수로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은 아이들은 21세기에 태어났습니다.

20세기의 실패

2025년 7월 10일

텍사스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실종자가 173명, 사망자는 111명에 달합니다. 홍수는 낯선 재난이 아닙니다. 21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기엔 피해가 너무 큽니다. 거대한 물줄기가 사람들을 덮친 것은 2025년 7월 4일 새벽이었습니다. 독립기념일 연휴 첫날이었고, 계곡을 따라 캠핑객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름 캠프에 참가한 750명의 아이들도 과달루페강 근처의 오두막에서 잠을 자고 있었죠. 여자아이들만 참여할 수 있는 100년 역사의 미스틱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인간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날의 재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날씨는 물론이고 태풍의 경로까지 예측할 수 있는 시대에 물난리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했던 이유를 찾는 겁니다. 화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에게 돌아갔습니다. 정부효율부를 통해 국가 기상청(NWS)과 연방 재난 관리청(FEMA) 예산을 삭감하고 인원을 감축한 것이 원인이라는 겁니다.

막무가내 예산 삭감, 효율 제일 주의는 재난 상황에서 그 부작용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전’과 관련된 예산은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효용 없이 사라지는 돈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습니다. 분노가 백악관을 향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지 되묻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레베카 솔닛의 질문입니다.

실패의 주체는 따로 있다.

솔닛은 진보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꾸준히 글을 써 온 작가이자 활동가입니다. 당연히 반트럼프 진영입니다. 트럼프가 재선되었을 당시에는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자는 공포와 패배주의, 체념을 좋아한다”라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말고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독려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솔닛이 이번 텍사스 홍수와 그 피해의 책임을 트럼프에게 돌리는 언론을 향해서는 ‘아직 모른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솔닛은 누가, 왜 트럼프와 정부효율부를 겨냥하는지를 따집니다. 지방 정부 입장에서는 연방 정부를 탓하면 참사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또, 반트럼프 진영이 보기엔 이번 홍수는 정부 실패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다른 사실이 보입니다. 먼저, 기상청은 인력 감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예보를 했습니다. 홍수 가능성을 예측해 경고했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은 지방 정부였습니다. 큰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도 평상시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금요일 새벽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까지 캠핑 중이던 사람들은 물론 주민들도 폭우와 관련된 경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폭우 예보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기상청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있습니다. 폭우가 얼마나 심각해질지,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강물이 8미터 이상 불어났고, 9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강수량은 4시간 만에 380밀리미터를 기록해, 100년만의 기록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현대 과학 기술의 능력을 벗어난 영역이었을 뿐입니다.

20세기의 상식적인 판단

피해를 입은 지역은 원래 홍수로 인한 피해를 몇 차례 겪었던 곳입니다. 구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비구름을 과달루페강 인근으로 몰아넣어 좁은 지역에 폭우를 쏟아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근 비탈 지역의 땅은 건조하고 물을 잘 흡수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그대로 강으로 흘려보내 홍수에 이르게 됩니다. 돌발 홍수(flash flood)입니다. 좁은 지역에 짧은 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지면서 홍수가 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텍사스 쪽에 비구름을 만드는 습기는 멕시코만에서 옵니다. 올해 멕시코만은 예년에 비해 뜨겁습니다. 바다가 뜨거울수록 더 많은 습기가 만들어지고, 기온이 높을수록 공기는 더 많은 습기를 머금을 수 있습니다. 물 폭탄입니다. 이것이 차가운 공기와 부딪치면 폭발합니다. 폭우가 되어 내리는 겁니다. 이번 홍수가 그랬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 돌발 홍수가 자주 발생하는 추세입니다. 더워질수록 잦아지고 피해 규모도 커집니다. 인과관계가 엄정하게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관해 기후 변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코멘트가 달리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덥습니다. 더워지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건 지구 온난화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 돌발 홍수가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고, 강우량을 예측하는 것은 더 어렵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납니다. 태풍이나 토네이도같이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인간은 자연재해로부터 자신을 지킬 충분한 기술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마저도 예측은 가능하고요. 특히나 기반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진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를 오랫동안 겪은 세대일수록 강합니다. 1960년생에게 최근의 날씨는 ‘이변’입니다. 예외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것은 비효율이죠. 2020년생에게는 일상입니다. 현재 산업화 이전 대비 기온이 1.5°C 이상 높아져 있습니다. 여기서 멈춘다면, 2020년생의 52퍼센트가 일생 중 전례 없는 폭염을 겪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1960년생은 그 비율이 16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만약 여기서 기온이 2°C 더 높아진다면 2020년생의 92퍼센트가 역사적인 폭염을 견뎌야 하고요.

경험이 독이 되는 시대

경험이 지혜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이제 경험은 오류를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류의 주체가 정부 당국이라면, 정부 실패가 되겠죠. 이번 참사에서 정부 실패는 텍사스 지방 정부에서 발생했습니다. 20세기의 실패입니다.

피해 지역이 원래 물난리를 자주 겪는 곳이라는 사실은, 텍사스 지방 정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강을 따라 형성된 캠핑장 주변으로 제대로 된 안내 표지 하나 없었습니다. 경보 시스템에는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해당 지역 당국은 홍수가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일요일에야 모바일 경보를 발송했습니다. 그나마 국립 기상청은 소셜 미디어와 모바일 경보 시스템으로 제때 위험을 알렸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 닿을 수는 없었습니다.

피해 지역을 관할하는 텍사스 커(Kerr) 카운티 판사 롭 켈리는 “우리는 늘 홍수를 겪는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홍수를 감당하고 있고, 비가 오면 물이 불어난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켈리 판사에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홍수로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은 아이들은 21세기에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기후 재난은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며, 언제든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의 상식대로였다면, 홍수 예보가 나왔을 당시 캠핑장을 비웠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상식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은 지역 당국에, 그중에서도 20세기에 갇혀있는 의사 결정권자에게 있습니다.

제우스의 분노

기후 재난은 지구의 환경이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인이나 양태, 결과에 대해 잘 모릅니다. 현대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미 자연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복한 자연은 20세기의 것입니다. 현재의 자연은 또다시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죠.

이번 홍수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가 그렇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이 인력 부족이 예보를 어렵게 만들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questioning)”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기사입니다. 기상청의 인력 부족이 예보를 어렵게 만들었는지 확인하지 않고, 일부 전문가들의 추측으로 썼습니다. 언뜻 보면 ‘인력 부족이 예보를 어렵게 만들었다’라고 읽힙니다. 이 기사는 ‘~했을 수 있다(might have)’, ‘가능성을 제기한다(suggested)’ 같은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읽고 싶은 대로 읽기 쉬운 문장들입니다.

솔닛은 ‘사람들은 언제나 원인을 알고 싶어하며, 정치적 신념과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해석을 원할 때 더 그렇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기후 재난에 관해 우리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논쟁에 익숙하지만, 모든 문제를 그러한 프레임으로 봐서는 진짜 문제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려놓고 나면, 기후 재난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너무 쉬워집니다. 그 누군가만 없어지면 되니까요.

하지만 기후 재난에 관한 인류의 진짜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과학과 정책, 현장이 모두 어긋나 있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무지합니다. 시작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둥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제우스를 상상했던 고대인들처럼,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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