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함정
주류 경제학에서 인구 감소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죄악으로 보는 이유는 노동 인구가 감소하면 GDP가 줄어서입니다. 2010년 4월 20일 영국 석유 회사 BP가 미국 루이지애나주 앞바다 멕시코만에서 운영하던 석유 시추 시설이 폭발했습니다. 딥워터 호라이즌 폭발 사고입니다. 이 사고로 유정에서 기름이 터져 나오면서 5개월간 원유 7억 7800만 리터가 바다로 흘러들었습니다. 한반도 면적이 넘는 바다가 기름띠로 덮였습니다. 해양 생태계가 파괴됐고, 어업과 관광업이 멈췄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오염 사고에도 그해 미국의 국내 총생산(GDP)은 올랐습니다. GDP는 한 나라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 가치를 합산해 계산하는데, 기름 유출 사고로 단기 고용과 경제 활동이 늘었거든요. 오염 정화 인력이 투입됐고, 방제 장비의 생산이 증가했고, 피해 보상을 위한 법률과 보험 서비스 활동도 늘었습니다. 연방 정부도 긴급 자금을 지출했고요.
1968년 당시 미국 대선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는 캔자스대학교에서 GDP가 측정하지 못하는 가치에 대해
연설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물질적인 것을 축적하느라, 개인의 탁월함과 공동체의 가치는 포기해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연간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거기에는 대기 오염과 담배 광고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노는 기쁨, 시(詩)의 아름다움, 공론장의 지성, 공직자의 청렴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 간단히 말해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GDP는 성장 그래프가 우상향하는 게 당연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지표이자 일종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기술 진보와 탈성장 담론이 교차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생산성은 인구 증가 없이도 높아질 수 있고, 삶의 질은 축소를 통해 향상될 수 있습니다. 줄어드는 숫자는 위기가 아니라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번영의 척도
GDP는 결함이 많은 지표입니다. 고통을 유발하는 성장과 삶의 질을 높이는 감소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전쟁, 질병, 재해조차 경제 활동으로 환산되니까요. GDP 일변도의 사고방식을 버리면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인구를 어떻게 늘릴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GDP는 양적 지표이지 질적 지표가 아닙니다. 지금이 전후 복구 시기도 아니고 양보다 질이 중요한 시대가 됐으니, GDP 말고 다른 지표가 필요합니다. 대안은 많습니다. HDI(인간개발지수), GHN(국민행복지수), BLI(더 나은 삶의 질 지수), GPI(참진보지수) 등이 있습니다. 이 지수들의 공통점은 소득 격차, 건강, 교육, 예술, 생태계, 커뮤니티처럼 GDP가 담지 않는 삶의 조건까지 포괄한다는 겁니다.
물론 지표 하나 갈아 치운다고 현실이 곧바로 달라지진 않겠죠. 그러나 국가가 중심에 두는 수치가 바뀌면 사회 인식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을 평가하는 방식이 점수 중심에서 성장률 중심으로 바뀐다면,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을 경쟁이 아닌 성장 과정으로 인식하게 될 겁니다. 사회 인식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1인당 GDP 5만 달러 달성 같은 것이 국정 목표가 되면 도시는 경제 규모로 서열화되고, 지방은 인구수로 평가받고, 출산은 노동 인구 재생산의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같은 항목을 성과로 정의하기 시작한다면, 사회 인식과 정책 설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뉴질랜드는 2019년 세계 최초로 ‘웰빙 예산(wellbeing budget)’을 도입해 정부의 목표를 국민 삶의 질 향상으로 삼았습니다. 뉴질랜드의 실험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성장 수치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경제를 수단으로 돌려놓고 인간을 목적에 두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고,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인구 감소는 죄악이 되지 않습니다.
지방 소멸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지방 소멸’이라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무시무시한 말이 GDP적 사고에서 파생됐다고 생각합니다. 인구가 감소한다고 그 지역의 공간이 증발하는 건 아닙니다. 관공서가 철수한다고 그 지역의 시간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요. ‘소멸’이라는 단어는 존재의 종말을 암시하는데, 실제로는 존재의 형태 변화입니다. 줄어드는 건 지방의 인구이지, 지방에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이 말의 원조는 일본입니다. 2014년 마스다 히로야 전 총무상이 낸 ‘마스다 보고서’가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2040년이면 일본에서 896개의 지자체가 소멸한다는 내용이었죠. 이때부터 지방 소멸 담론이 생겼고, 한국이 이걸 정책적·정치적으로 수입합니다. 고도 성장기 인구 팽창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총량 유지를 전제로, 사람을 다시 늘리고 지방을 다시 살리는 성장주의적 해법을 강구합니다.
노르웨이, 핀란드, 캐나다 같은 나라 역시 인구 증가가 멈췄거나 줄고 있고, 인구 밀도는 한국보다 훨씬 낮습니다. 수도를 벗어나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도 도시 하나를 발견하기 힘듭니다. 어쩌다 도시가 나와도 인구가 수천 명 수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읍이나 면 단위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지방이 ‘소멸 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들에서 지방 인구 감소는 실패가 아니라 조건 변화입니다. 애초 인구 밀도 낮은 나라여서 사람이 없는 공간을 비정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인구가 감소한 도시에서도 사람이 계속 잘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책 목표가 됩니다. 인구 유입 정책보다는 지역 사회의 서비스 접근성을 늘리는 정책을 씁니다. 예산 배분에도 지리적 불이익과 사회적 취약성을 반영하고요.
서울에서 바라볼 때, 지방이 과거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지방이 소멸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지방이 소멸하고 있다고 말하고, 지역의 모든 문제를 인구 문제로 치환합니다. 인구수가 일정 수준을 찍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니 당장 전입 신고를 유도할 수 있는 정착 지원금 지급 같은 일시적 유인책에 예산이 집중됩니다.
줄어드는 세계
우리는 감소를 소멸의 징조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건 숫자이지, 삶이 아닙니다. 인구 감소는 재난이 아닙니다. 인구는 증가하고 도시는 커져야 한다는 믿음은 무한한 팽창을 당연시한 20세기 산업 문명이 남긴 착각입니다. 역사의 산물이지, 자연의 법칙이 아닙니다.
‘인구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에서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로 질문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삶의 질은 인구 규모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규모의 축소는 불필요한 확장을 멈추고, 더 밀도 있고 지속 가능한 생활 양식을 설계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압축 성장기에 만들어져 줄어듦을 견디지 못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줄어드는 세계에 맞는 운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과거의 확장 모델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숫자 뒤에 가려진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엉뚱한 답변을 쏟아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