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창조과학부 vs 기획재정부
조 의원이 대표 발의한
단통법 초안을 보면, 당시 왜곡된 시장을 정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법안 내용은 단순하고 합리적입니다. 이통사와 제조사가 제공하는 보조금이 얼마인지 투명하게 알리라는 겁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냐’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말이죠. 이통사와 제조사에 휴대폰 판매 현황이나 관련 비용, 수익 등을 정부에 제출하게끔 하는 조항도 들어갔습니다. 실질적인 단말기 가격이 얼마인지, 소비자가 지나치게 비싸게 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상임위원회에서 논의를 거쳐 법안을 다듬습니다. 해당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국회의원들의 의견은 물론, 국회 소속의 ‘전문 위원’들의 의견까지 수렴합니다. 그런데 단통법이 미방위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던 2023년 12월, 미방위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여야가 대립하면서, 새누리당 의원들만 위원회에 참석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조 의원의 초안에는 없던 내용이 추가됩니다. 첫 번째는 보조금 상한제입니다. 정부가 이통사와 제조사가 제공할 수 있는 보조금을 얼마까지 줄 수 있는지 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전문 위원을 통해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가 밀어 넣었다는 추측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비밀 유지 조항입니다. 휴대폰 판매 관련 자료 제출 관련해 제조사의 영업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이런저런 단서를 단 겁니다.
이 두 가지가 단통법을 악법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먼저, 보조금 상한제는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경쟁을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구 밀도가 극히 낮은 지역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휴대폰이 잘 안 터지는 지역은 거의 없습니다. 통신사별로 차이는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통신 품질은 이미 갖춰진 상황입니다. 통신 3사의 요금제를 살펴봐도 마치 짜 놓은 듯 구조가 비슷합니다. 결국 보조금이 유일한 경쟁 요소였던 상황에서 그마저 없애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시장 경쟁이 사라지면 이득을 보는 것은 시장을 독점 내지 과점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현재 SK텔레콤이 40퍼센트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KT와 LGU+가 나머지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상태입니다. 이동 통신 산업은 새로운 사업자가 후발 주자로 진입해 이득을 보기 힘든 특성이 있습니다. 초기 투자 비용이 크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장을 선점한 통신 3사는 더 이상의 경쟁 없이 현상 유지를 하는 쪽을 택하게 됩니다. 이미 확보한 가입자 수에 비례해서 매월 또박또박 통신료가 수입으로 들어오니까요. 통신사 멤버십 서비스가 눈에 띄게 축소된 것도, LTE에서 5G로 기술이 진보했다는데 체감되지 않는 것도, 요금이 인하되지 않는 것도 시장에서 경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해야 할 동기가 사라진 겁니다.
이걸 밀어붙인 것은 미래부입니다. 이통 3사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했던 겁니다. 정부 정책에 맞춰 통신사 측의 협조가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때에 정부가 내밀 수 있는 ‘카드’가 필요합니다. 보조금 상한제가 그런 카드입니다. 보조금 상한을 급격히 올려버리거나 낮추는 권한을 정부가 가지면 통신사에 대한 통제력이 생깁니다.
제조사의 판매 데이터에 관한 비밀 유지 조항에는
기획재정부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이 당시 최양희 미래부 장관의 주장이었습니다. 특히, 시장을 주도하던 삼성전자의 영업 비밀에 미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신경을 참 많이 썼던
정황이 포착됩니다. 결국 국회 본회의에 올라갈 때 삼성전자는 완벽한 비밀 보장을 받게 됩니다. 아예 제조사가 얼마나 보조금을 지원하는지를 공개할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분리 공시’ 조항이 삭제되었습니다.
야당
이렇게 단통법은 이통 3사의 시장 경쟁 부담을 덜어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법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휴대폰이 얼마나 비싼 물건이고, 이것을 팔기 위해 누가 얼마나 비용을 부담하는지는 모호한 채로 남게 되었고요. 공급과 수요 사이의 정보 비대칭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그대로 남겨 둔 겁니다. 하지만 단통법에는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의 표결입니다.
야당 국회의원 중 누군가 이 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정부 여당이 아무리 밀어붙인다 하더라도 유권자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누구든 멈춰 세웠겠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기회는 있습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표결 직전까지 관련 발언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표를 던지고 피켓 시위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통법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아무도 없었죠.
단통법이 ‘패키지’ 법안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설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작동해야 하지만, 때로는 협상하기도 합니다. 여야가 패키지로 각자 법안 꾸러미를 싸 서로 맞바꾸는 식입니다. 당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미방위 법안 중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KBS 사장 후보자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받도록 하는 법안입니다. 공영 방송이 정권의 입맛에 맞춰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법을 단통법과 맞바꿨습니다. 서로 ‘퉁’친 겁니다.
국회의원들은 단통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법인지, 어떤 영향을 불러오게 될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시장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고, 소비자들의 원성이 빗발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부 의원들은 단통법에 찬성표를 던진 것에 대해
사과까지 했습니다. 법의 취지만 듣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통 3사는 고객 혜택을 포함한 마케팅비를 크게 줄였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이 골고루 적당히 비싸게 휴대폰을 사는 시대가 도래했죠.
다음 단통법
국회의 입법 과정은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단통법이 시행된 후 열린 국정감사장에서는 단통법을 두고 행정부와 입법부가 서로 ‘네 탓’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죠. 세금이 참으로 아까운 장면이었습니다. 이 법이 폐지되기까지 11년이 걸렸습니다. 그렇다고 통신 시장이 이번에는 정상화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단통법 이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