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조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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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은 전 세계에 1조 9000억 달러 이상의 기후 피해를 입혔습니다.

전설의 조별 과제

2025년 7월 24일

기후 재난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모호한 문제입니다. 책임질 주체가 모호하니 해결도 어렵습니다. 먼 미래의 모두를 위해 당장의 나, 우리를 희생하겠다는 결정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사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과도 맞지 않죠. 그런데 만약 그 책임의 주체가 명확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가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기후 피해를 본 국가는 책임이 있는 국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모든 정부 기관의 화석 연료 소비, 생산에 대한 허가, 보조금 등이 국제적으로 부당한 행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ICJ는 기후 변화의 ‘긴급하고 실존적인 위협’에 대처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ICJ의 판단은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일종의 권고나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합니다. 각국의 사법부가 실효성 있는 판결을 내릴 때 ICJ의 법적 해석을 참고하게 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있습니다. 명확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기후 재난은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자연이 만드는 ‘현상’이었죠. 이제 기후 재난은 인간이 저지른 일의 결과이며, 문제를 만든 책임의 주체와 피해를 당한 주체가 나뉩니다. 그 결과, 기후 재난으로 피해를 당한 국가는 책임이 있는 국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진전입니다. 그리고 이 진전은 한 대학교 강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사자의 힘

2019년, 피지 남태평양대학교(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의 로스쿨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기후 정의 촉진’이라는 주제의 과제를 받아 들었습니다.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 ICJ에 자문 의견을 요청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자문 의견은 특정 주제에 대해 법원이 공식적으로 견해를 밝히는 문서입니다. 사실,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 미주 인권 법원(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 등의 다른 국제 재판소들도 비슷한 요청을 받아 판단을 내린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환경 단체도 아니었고, 정부나 산하 기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법대생 몇 명이었을 뿐입니다. ICJ는 UN의 6대 주요 기관 중 하나로, 가장 권위 있는 국제 사법 기구입니다. 역사가 깊고, 상징성도 크죠. 수업 시간에 나온 아이디어로서는 괜찮았지만, 학생 몇이 현실로 만들기엔 너무 담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냥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당사자였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바다에 잠기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기후 문제는 ‘인류의 숙제’가 아니라 ‘나의 생존’이죠. 이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27명이 모여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태평양 섬 학생들(PISFCC, Pacific Island Students Fighting Climate Change)’이라는 단체가 설립됩니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절박한 당사자와 손을 잡습니다. 바누아투 정부입니다.

물에 잠기는 나라들

세계 지도를 보면 호주 오른쪽, 뉴질랜드 위쪽에 작은 섬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 섬들은 몇 개의 국가로 묶여 있습니다. 태평양 도서국들입니다. 기후 위기의 상징이 된 투발루를 비롯해 솔로몬 제도, 피지, 바누아투 등이 태평양 도서국으로 분류됩니다.
지난 2021년 투발루 외교부 장관의 연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출처: 연합뉴스TV
대부분 개발도상국입니다.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고 도시화되지 않았습니다. 식민 지배를 겪었고, 공업이 발달하기에 불리한 환경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각종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토네이도와 태풍, 허리케인은 점점 잦아지고 강해집니다. 게다가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영토가 물에 잠깁니다. 투발루의 경우 매년 0.5센티미터씩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이들 도서국의 목소리가 전 세계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21세기가 되면서입니다. 바닷속에 묻힌 광물 자원, 호주와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위치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후 재난의 당면한 피해자들에게 발언권이 생겼습니다. 당장 영토가 바다에 잠기며 이재민이 생기고 있는 태평양 도서국들이 국제 사회에서 피해를 호소하고, 이미 개발의 시대를 거친 국가들에 책임을 요구하고 나선 겁니다.

하지만, 요구가 관철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실제로 2024년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9)에서는 선진국의 분담금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사실, COP 회의가 매년 거듭될수록 회의장에서 협상하고 토론하는 것만으로는 기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만 굳어가는 분위기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번영의 비용

2024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 연구팀은 흥미로운 계산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기후 위기를 촉발한 국가들에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지 돈으로 따져본 겁니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은 전 세계에 1조 9000억 달러 이상의 기후 피해를 줬습니다. 뒤를 이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도 같은 기간 총 4초 1000억 달러 규모의 경제 손실을 초래했고요. 상위 5개국이 입힌 손실을 합하면 전 세계 GDP의 약 11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물론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 등은 할 말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결과로 산업화 시기가 늦어진 국가들에 기후 책임을 똑같이 물으면, 사다리 걷어차기가 된다는 겁니다.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연구는 분석 시작 연도를 1960년으로 앞당길 경우, 유럽 등 선진국의 책임이 400퍼센트 이상 증가한다고도 지적합니다. 고위도의 부유한 국가들에 기후 위기의 누적된 책임이 확실히 집중되어 있습니다.

책임이 몰려 있듯 피해도 몰려 있습니다. 미국이 배출한 탄소로 인한 피해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저위도에 있는 저소득 국가들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들 국가는 GDP의 약 1~2퍼센트씩을 손해봤습니다. 미국의 탄소 배출 탓이었습니다. 반면 캐나다나 러시아, 북유럽 등 고위도 국가들은 탄소 배출 과정에서 오히려 경제적 이득을 취했고요. 즉, 기후 위기는 전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COP와 같은 국제 협의체는 필연적으로 돈이 곧 발언권입니다. 이미 부유한 국가들, 즉 기후 위기의 용의자들이 장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COP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의 결의안은 매년 나오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습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약속은 해도, 기후 변화의 책임을 돈으로 지라는 얘기에는 난색을 보입니다. COP29에서는 2035년까지 선진국이 3000억 달러의 기후 재원을 확보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이 기후 변화 영향에 적응하고 에너지 시스템을 탈탄소화하려면 매년 최소 1조 달러가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도서국들은 사법적인 판단에 국가의 존립을 걸어보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학생들이 올라탔습니다. PISFCC는 학생이 과제 하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무작정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했죠. 바누아투의 랄프 레겐바누 기후 변화 장관이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미 화석연료 기업과 책임이 있는 국가들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의견을 밝힌바 있었던 레겐바누 장관 입장에서는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계획이었을 겁니다.

바누아투 정부가 UN 등 국제 무대에서 외교적 역할을 담당하고 PISFCC는 전 세계 청년 단체와 함께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린 기후 관련 회의장을 찾아 피켓을 들었고 발표를 했죠. 활동과 함께 지지도 쌓였습니다. 그리고 2023년 UN 총회에서 ICJ에 공식적으로 자문을 요청하기로 결의합니다. 바누아투는 바로 그해, 심각한 태풍과 허리케인으로 두 차례나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PISFCC의 대표를 맡았던 신시아 후니우히(Cynthia Houniuhi)는 솔로몬 제도의 마키라(Makira)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ICJ 공청회 자리에 선 후니우히는 마키라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가 이어지는 영원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세대 간의 신성한 계약은 지키기 어려워졌습니다. / 출처: PISFCC
성공한 조별 과제의 비결

PISFCC는 영리하게 움직였습니다. 기후 정의란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목표를 위해 필요한 영향력을 포섭할 줄 알았습니다. 또, 지치지 않았습니다. 로스쿨 학생들에게 5년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기꺼이 전 세계의 회의장으로 찾아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습니다. 멈추지 않았습니다. 커리어를 위해서였다면 불가능했겠죠. 당사자였기 때문에 진심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기후 소송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2024년 한 해에만 226건의 소송이 시작되었죠. 대부분은 전략적 소송입니다. 법정에서 결과를 얻겠다기보다는 사회의 인식과 정책의 변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데 2024년 글로벌 사우스로 묶이는 남반구의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한 소송의 절반 이상은 정부나 공공 기관이 원고로 나섰습니다. 기후 위기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곳에서는 기후가 곧 안보입니다.

협상과 선의로는 기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방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이라는 기준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요. 이번 ICJ의 판단으로 순식간에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 아닌 솔로몬 제도의 언어로, 바누아투의 언어로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원’이 아니라 ‘배상’의 문제를,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논의하게 되는 겁니다. 남태평양의 한 강의실에서 멋진 조별 과제 발표가 있었습니다. COP 회의장에 모인 각국 정상들보다는 좋은 성적을 받을 겁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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