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중방마을에는 별명이 있습니다. ‘학마을’입니다. 예전에는 목과 다리가 길쭉하면서 크고 하얀 새는 ‘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곤 했죠. 학은 찾아오지 않지만, 40여 년 전부터 백로가 한두 마리씩 날아들더니, 2004년에는 백로류 670여 마리가 관찰될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마을에서도 백로를 반겼습니다. 1994년에는 학마을 앞산이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요. 하지만 개체수가 늘어나니 소음과 배설물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수십 년 된 나무가 배설물 때문에 썩는다는 얘기도 나왔죠. 민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2016년 산 소유주는 백로 서식지의 나무를 베어냈습니다. 2017년 봄부터 백로를 비롯한 새들은 중방마을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로는 중방마을로만 날아드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 고양, 충북 청주, 인천 등 전국 곳곳에 백로가 찾아오고, 비슷한 민원이 발생합니다. 대개 중방마을처럼 서식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요. 대전에서는 좀 다른 시도가 있었는데, 카이스트 기숙사 근처에 찾아온 백로 집단을 연구해 습성과 생태를 파악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주택가와 떨어진 곳으로 백로를 이동시켜 보려 했는데요,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잠깐의 연구로는 백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최근 백로가 다시 학마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식지와 먹이 활동 터를 조사하고, 백로의 생태를 관찰하며 개체수를 파악합니다. 한국을 찾는 백로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될 데이터입니다. 연구가 성과를 거두면 사람과 백로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공생할 방법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학마을 일대를 누비는
사람들은 14명의 ‘시민 과학자’입니다.
Citizen Scientist
시민 과학자(citizen scientist)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린이 소방관’ 같은 ‘체험’적 의미가 아닙니다. 단순히 과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요. 전문 학위를 가진 전업 연구자는 아니지만, 과학 지식의 생성과 활용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반 시민을 의미합니다. 참여 방식은 다양합니다. 학마을의 사례처럼 관찰과 데이터 수집인 경우도 있고, 이미 조사된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제안하기도 하고요.
미국 미시간주의 플린트(Flint)시에서 발생한 ‘납 수돗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시민 과학자들의 사례가 유명합니다. 2014년 재정 위기에 처한 플린트시 정부가 예산 절감을 위해 상수도 수원지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기존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수돗물을 공급받았는데, 가까운 플린트강의 물을 사용하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돈을 아끼려고 내린 이 결정이 참사를 불렀습니다. 수돗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주민들이 피부 질환, 위장 장애 등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돗물에 납이 섞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린트시 보건 당국은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을 ‘선동가’라며 무시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결국, 시민들이 직접 나서게 됩니다. 버지니아공대의 마크 에드워즈(Marc Edwards) 교수팀과 협력해 300곳 이상의 가구에서
물 샘플을 수집했습니다. 이를 분석한 결과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는 납이 검출되었고요. 지역 병원의 한 소아과 의사는 병원을 찾은 어린이들의 혈중 납 수치가 급격히 증가한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플린트시는 상수도관 교체 등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됩니다.
곤충의 모습과 새의 목소리
최근에는 플랫폼을 이용한 시민 과학자 활동이 늘어나면서 연구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두 건의 특별한 사례가 아닙니다. 생물 다양성 관련 데이터를 한데 모으는 시민 과학 플랫폼 ‘iNaturalist’는 2008년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5000편 이상의 동료 평가(peer review) 과정을 거친 논문이 iNaturalist 기반 데이터를 활용해
작성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활용 빈도는 더 늘어나고 있고요.
참여 방법은 간단합니다. iNaturalist 앱을 설치하고 계정을 등록한 뒤, 관찰한 동식물, 곰팡이 등의 사진과 소리 파일을 업로드합니다. 이때 날짜와 시간, 위치 정보도 함께 기록됩니다. 플랫폼 사용자들과 AI가 어떤 종인지 식별해 주는데요, 평가에 참여한 사람 중 3분의 2 이상의 의견이 일치하고 일정 심사까지 통과하면 해당 데이터는 ‘연구 등급(research grade)’으로 분류됩니다. 학술 논문에 ‘iNaturalist 데이터 분석 결과, 북한산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하늘소가 다수 서식하고 있다’는 식의 기술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조류 관찰 플랫폼 ‘
eBird’나 ‘
Merlin Bird ID’, 밤하늘을 관측해 빛 공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프로젝트인 ‘
Globe at Night’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시민 과학자들이 허블망원경 등의 이미지에서 은하 형태를 분류하는 작업에 자원하여 태양계 너머의 우주를 탐구하는 기초 자료를 만들고 있는 ‘
galaxy zoo’ 프로그램에도 참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기여도 가능합니다. 분산 컴퓨팅 기술을 이용한 ‘Folding@home’ 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스탠퍼드대학이 주도해 시작된 것으로, 참여자는 자신이 가진 개인용 컴퓨터의 자원을 단백질 접힘 연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게 됩니다. 단백질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3차원 구조로 접히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어딘가 잘못 접히면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프리온 질환 등과 같은 중대한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의 수를 컴퓨터가 일일이 계산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참여자의 컴퓨터 자원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일종의 거대한 글로벌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죠.
이 프로젝트는 2020년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참여자 수가 급증하면서 당시 어떤 슈퍼컴퓨터보다도 빠른 연산 성능을 제공했죠. 그 결과 SARS-CoV-2 스파이크 단백질에 관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는 등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관한 기초 데이터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 과학자들의 관심이 감염병 기초 연구의 속도를 끌어 올린 겁니다.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사건이었죠.
과학의 시야각
시민 과학자 개념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는 1989년 미국에서 진행된 산성비 모니터링 프로젝트였습니다. 225명의 시민 지원자가 산성비 샘플을 수집하고, 산성 정도를 수집해 미국의 환경 단체인 내셔널 오듀본 협회(National Audubon Society)에 보고했습니다. 비전문가인 시민이 과학적 데이터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죠.
과학은 오랫동안 전문가의 영역이었습니다. 박사는 물론, 박사 후 과정까지 오랫동안 공부하고, 학위를 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몰두해 앞으로 나아가는 분야 말입니다. 물론, 깊은 지식과 특별한 사고 과정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과학자만의 것일 때에는 연구되지 않는 분야가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과학이 정말 필요한 순간, 과학이 그 자리에 없을 때도 있고요. 연구실과 멀리 떨어진 지역의 수질 오염이나, 연구자들이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한 생명체의 발견 같은 것 말입니다. 시민 과학자들은 학계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전통적으로 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진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위치는 그렇지 않죠. 정책 결정의 핵심 근거가 되었고, 과학적 주장에 대해 정치적, 윤리적 판단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함께 들여다본 ‘배아 선택’ 같은 사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시민 과학자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해 나갈 것인지에 관해 시민이 발언권을 획득하는 기본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시민 과학자 개인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인간 존재 바깥으로 눈을 돌려 세계관을 확장할 기회 말입니다. 인스타그램만 들여다봐서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를 인류라는 종으로 확장해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거울만 들여다보는 나르시시스트와 다를 바 없는 겁니다. iNaturalist 앱을 들여다보고 업로드 할 생명체를 찾아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 관해 관심을 두고 고민하게 됩니다. 곤충이나 잡초를 인간의 일상에 침범해 들어온 침입자로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지요. 코로나19 당시 Folding@home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컴퓨터로 무엇을 하게 될지 살폈습니다.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쏟아졌던, 쉽지만, 잘못된 설명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인류가 이 바이러스에 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생각할 수 있었죠.
지식 생산 과정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 많은 혁신이 발생합니다.
찰스 다윈도 전 세계 아마추어 자연 관찰자들과 교신하며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사회도, 기술도 그 경계를 더 지우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은 전문가가 아닌, 모두의 소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