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함의 신’에 관한 오해

bkjn book review

한 스타 건축가는 현대의 도시에 즐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는 어떤 모양일까요. 종이가 있다면 종이에, 없다면 머릿속에 그려 보죠. 아마도 우리가 그린 도시의 모양은 사각형일 겁니다. 매끈한 직선으로 만들어진, 직육면체가 가득 들어찬 공간 말입니다. 이러한 도시의 모습은 현대 건축의 신, 르코르뷔지에(1887~1965)가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르코르뷔지에를 ‘따분함의 신’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죠. ‘건축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토머스 헤더윅입니다.

헤더윅이 이렇게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이 ‘스타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2010 상하이 엑스포의 영국관을 디자인했고,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베슬(Vessel)도 헤더윅의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3700억 원을 투입해 노들섬 일대를 새단장하는 ‘노들 글로벌 예술 섬’ 프로젝트를 맡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노들섬이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되는 까닭은 헤더윅이 ‘따분함’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전염병만큼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분한 건축이 얼마나 인간에게 해로운지, 어떻게 인간성을 무시하는지 저서《더 인간적인 건축》에서 역설했거든요. 이 책은 헤더윅의 작품들만큼이나 선명하고 매력적입니다.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죠.

따분한 건축의 해악

책에 흥미로운 연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재개발된 시카고의 공공 주택 단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입니다. 단조로운 콘크리트 타워 28개로 구성된 단지 안에는 회색 콘크리트 마당 전망인 가구와 녹지가 조성된 안뜰 전망의 가구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일리노이대학교의 프란시스 쿠오 박사의 연구를 통해 안뜰 전망 주민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집중력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당시만 해도 환경이나 정신 건강 같은 문제에 대해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쿠오 박사는 가난한 도심 지역에 나무 몇 그루를 심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구하고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사람의 마음을 꺾는 풍경을 만들어 내는 콘크리트의 도시는 르코르뷔지에로부터 시작된 것이 맞습니다. 20세기 초, 세계가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공장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물건이 생산되고, 자동차와 기차가 달립니다. 우리가 평생 느껴 본 적 없을, 세상이 천지개벽하는 변화를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술이 주도했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기술로 해결하고자 했죠. 도시로 몰려들어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에서 병들어 가는 사람들을 구해야 했습니다. 콘크리트와 철근이라는 신소재를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한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계와 함께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는 직선을 중심으로 한 도시 계획을 주장했죠.

현대 건축이 오래 머문 시대

그 결과가 모더니즘 건축입니다.
책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를 소개합니다. 아름다움과 대척점에 서고자 하는, 모더니즘 예술 작품으로 제시하는데요, 사실 추상화의 목적은 ‘재현’의 회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더 가까웠습니다. / 카지미르 말레비치의〈검은 사각형〉(1923), 러시아 국립 박물관 소장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은 장식보다 실용성을 중시하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등 20세기의 첨단 소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건축을 ‘기계’로 보기 때문에 효율과 합리성을 강조하죠. 그래서 이런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맨해튼의 시그램 빌딩은 건물 외부를 유리로 뒤덮은 구조가 특징입니다.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작이며, ‘커튼월(curtain wall)’ 공법을 상징합니다. / 출처: Gabriel Fernandes
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건물이 이렇게 생겼죠. 이것이 헤더윅이 주장하는 따분하며 인간적이지 않은 건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건물을 탄생시킨 신이 바로 르코르뷔지에라고 지목하고요. 그러면서 그의 건축 철학을 나열하고 비판합니다. ‘장식을 폐지해야 한다’라는 주장에는 ‘장식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건물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라는 원칙에는 ‘변주는 흥미롭고 단조로움은 따분하다’라고 응수하죠. 르코르뷔지에의 이런 잘못된 신념들이 현대 건축을 ‘따분함’에 감염시켰다며 말이죠.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 사진의 건물은 1950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2025년이고요. 회화는 모더니즘의 시대를 관통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마저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건축은 여전히 모더니즘에 갇혀 있죠. 헤더윅은 그 이유를 ‘전문가’라는 지위에서 찾습니다.

비주류의 관점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이지만, 헤더윅은 엄밀히 말해 건축가는 아닙니다. 2018년 헤더윅은 건축가 등록 위원회로부터 ‘협박 편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누군가가 헤더윅을 ‘건축가’로 지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축가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엄격하게 면허제로 관리되는 직업입니다. ‘사칭’하면 안 됩니다. 헤더윅이 활동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일정 자격과 훈련을 쌓은 뒤 건축가 등록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정식으로 ‘건축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가에 비슷한 제도가 있죠.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건축 사무소에서 몇 년간의 경력을 쌓으면 면허 시험 응시 자격이 생깁니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건축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헤더윅은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죠. 그래서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를 운영하지만, 정식 건축가는 아닙니다. 써클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건축가 집단의 ‘폐쇄성’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들이 건축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과정, 건축 철학을 현실이 아닌 예술 철학에서 빌려 오는 관행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단에 속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면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게 됩니다. 집단의 우월성을 믿게 되고요. 그렇게 해야 나의 고군분투가 가치 있으니까요. 책에서는 ‘컬트 집단’에 비유합니다만, 좀 지나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맹신’이라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저도 전문가 집단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의정 갈등에 관해 생각해 보죠. 많은 분이 전공의들의 선택, 의대생들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을 얻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죠. 일반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성실함과 자원 투자가 전제되지 않으면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의대생과 의사 선배, 그리고 환자들뿐이고요. 자연스럽게 에코 체임버가 생깁니다. 그 안에서의 논리는 체임버 바깥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의 비대칭도 문제입니다. 의술 그 자체는 당연하고,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와 수가 구조에 관해 일반 시민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복잡하고, 굳이 알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집단과 시스템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과 의사 집단 사이에는 벽이 생깁니다.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겁니다.

건축가 이외의 문제들

헤더윅은 이런 현상을 건축가 집단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대중’의 취향과 요구를 평가 절하하는 집단의 오만함이 생겨납니다. 헤더윅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distinction)’ 이론입니다. 취향이 계급 구별의 수단이라는 겁니다. 모더니즘에 천착하여 장식적 요소를 배척하는 건축가 집단의 취향은 일반 대중의 통속적 취향과 구별됩니다. 이를 통해 건축가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되며, 건축가는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서 인정받는 미적 기준과 철학을 담아 ‘따분한’ 건축물을 만들어 냅니다. 르코르뷔지에라는 따분함의 신을 계속해서 섬기면서 말이죠.

저는 건축이 일반 시민과 유리된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책임이 오롯이 전문가 집단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지식이라는 장벽이 너무나 높았습니다. 그래서 법, 의학, 과학, 정치는 물론이고 건축까지 전문가들이 해당 영역을 완전히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특정 지식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패러다임을 바꿨고, 생성형 AI가 그 패러다임을 또 뒤집었죠. 지금 제가 형사법에 관해 알아보고 싶다면 5분 안에 관련 내용에 꽤 깊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였다면, 법전을 구하고 그 안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 해석해 내기까지 며칠이 걸렸을 텐데 말입니다.

한편, 영국의 일간지《가디언》의 건축 칼럼니스트 올리버 웨인라이트는 오히려 헤더윅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헤더윅이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헤더윅이 디자인하거나 참여한 몇 가지 건축 프로젝트를 예로 들며 ‘시각적 복잡성’은 강조했지만, 구조적 현실성과 사회적 책임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에 설치한 ‘B of the Bang’은 영연방 국가들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커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의 기념 조형물이었습니다. 2002년 맨체스터 개최를 앞두고 제작되었죠. 육상 경기에서 총성이 울리는 순간의 ‘빵(Bang)’ 소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56미터 높이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설치 직후부터 구조물 일부와 부품 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결국 2009년에 철거됩니다.
‘B of the Bang’ 철거와 함께 헤더윅은 한화 약 30억 원 규모의 합의금을 물어냈습니다. / 출처: George M. Groutas
헤더윅은 책에서 장인의 역할이 배제되고 건축가에게 모든 권한이 넘어간 상황을 비판합니다. 소재와 현장을 모르는 전문가 집단이 건축을 독점하면서 현실과 건축물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헤더윅 자신이 이 간극을 메우지 못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복잡했지만, 현실에 존재할 수 없었죠. 선택한 소재와 기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스타 건축가(starchitect)’ 현상입니다. 자아가 강한 일부 유명 건축가들이 건축의 목적이나 주민의 요구보다 자신의 스타일과 작품성을 우선시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냉소적으로 일컫는 말이죠. 지역적 맥락이나 사회적 기능, 일상성을 건축물이 오히려 해치는 겁니다. 헤더윅의 몇몇 작품도 마찬가지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

《더 인간적인 건축》은 재기 발랄하고 쉽게 읽힙니다. 지루한 도시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 있는 독자라면 통쾌해하며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건축가 집단을 비판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건축의 가치를 높인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축가라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르코르뷔지에를 비판하는 데에 책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고요.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혁명가였습니다. 헤더윅보다 더한 이단아였죠. 완전히 새로운 기술로 건물을 지어 올린다는 건 웬만한 각오 없이는 힘듭니다. 이전까지 유럽의 건축은 ‘조적식’이었습니다. 벽돌을 바닥부터 쌓아 올려 벽을 만들어 집을 짓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으로는 건물을 높이 올릴 수도, 많은 집을 빠르게 지을 수도 없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부어 건물을 올립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단지 아파트가 이렇게 발명됩니다.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는 늘 시행착오가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빌라 사보아’의 경우 누수 문제 때문에 엄청난 ‘하자 보수’가 발생했습니다. 빌라 사보아는 1931년 준공되었습니다. 콘크리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대응법에 관한 지식이 아직 쌓이지 않았던 시기죠. 사보아 가족을 위한 단독 주택으로 건설된 것인데, 계속되는 누수와 곰팡이 때문인지 결국 아들이 폐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건축가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단순히 집을 지어 파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건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라 사보아라는 저주받은 걸작은 새로운 시대의 건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개인의 만족이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건축을 시작하는 계기로 기능한 겁니다. 1920년대에 제안했던 ‘부아쟁 계획’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00만 명이 살 수 있도록 파리를 재구성하는 도시 계획입니다. 고층 건물을 세워 상업 시설과 주거 지역을 확보하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모두 지하화하고요. 대신 지상에는 녹지를 조성해 부자가 아니어도 자연을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100년도 더 된 계획이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현대적이며 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대도시의 삶과 주거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획은 파리에서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2차 대전 이후 산업화에 뛰어든 나라들에서 현실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포함해서 말이죠.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더 이상 ‘따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헤더윅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해 ‘야만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헤더윅이 그리는 노들섬의 모습, ‘사운드 파노라마’입니다. / 출처: 서울특별시
어떤 책은 선명한 주장을 명료하게 담아내 매력적입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죠. 하지만 그런 책일수록 비판적으로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읽어 내려가다 ‘정말?’이라는 생각이 들면 손품을 조금 팔아서라도 다른 주장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고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건축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느리지만, 즐거운 과정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며 현대의 건축은 정말 따분한지, 건축이 모더니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사유하고 찾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헤더윅의 노들섬이 매우 기대됩니다. 하지만 꽤 걱정도 됩니다. 노들섬은 보는 곳으로서 분명 가치가 높아지겠지만, 머물 곳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노을을 바라보았던 추억이 담긴 공간입니다. 헤더윅의 상상력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건축’에 다다르기를 바랍니다.
bkjn book review는 단순 서평이 아닙니다. 원전을 해체해 다른 책, 기사, 논문과 연결합니다. 매월 한 권의 책을 리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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