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건물이 이렇게 생겼죠. 이것이 헤더윅이 주장하는 따분하며 인간적이지 않은 건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건물을 탄생시킨 신이 바로 르코르뷔지에라고 지목하고요. 그러면서 그의 건축 철학을 나열하고 비판합니다. ‘장식을 폐지해야 한다’라는 주장에는 ‘장식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건물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라는 원칙에는 ‘변주는 흥미롭고 단조로움은 따분하다’라고 응수하죠. 르코르뷔지에의 이런 잘못된 신념들이 현대 건축을 ‘따분함’에 감염시켰다며 말이죠.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 사진의 건물은 1950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2025년이고요. 회화는 모더니즘의 시대를 관통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마저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건축은 여전히 모더니즘에 갇혀 있죠. 헤더윅은 그 이유를 ‘전문가’라는 지위에서 찾습니다.
비주류의 관점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이지만, 헤더윅은 엄밀히 말해 건축가는 아닙니다. 2018년 헤더윅은 건축가 등록 위원회로부터 ‘협박 편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누군가가 헤더윅을 ‘건축가’로 지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축가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엄격하게 면허제로 관리되는 직업입니다. ‘사칭’하면 안 됩니다. 헤더윅이 활동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일정 자격과 훈련을 쌓은 뒤 건축가 등록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정식으로 ‘건축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가에 비슷한 제도가 있죠.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건축 사무소에서 몇 년간의 경력을 쌓으면 면허 시험 응시 자격이 생깁니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건축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헤더윅은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죠. 그래서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를 운영하지만, 정식 건축가는 아닙니다. 써클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건축가 집단의 ‘폐쇄성’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들이 건축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과정, 건축 철학을 현실이 아닌 예술 철학에서 빌려 오는 관행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단에 속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면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게 됩니다. 집단의 우월성을 믿게 되고요. 그렇게 해야 나의 고군분투가 가치 있으니까요. 책에서는 ‘컬트 집단’에 비유합니다만, 좀 지나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맹신’이라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저도 전문가 집단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의정 갈등에 관해 생각해 보죠. 많은 분이 전공의들의 선택, 의대생들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을 얻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죠. 일반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성실함과 자원 투자가 전제되지 않으면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의대생과 의사 선배, 그리고 환자들뿐이고요. 자연스럽게 에코 체임버가 생깁니다. 그 안에서의 논리는 체임버 바깥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의 비대칭도 문제입니다. 의술 그 자체는 당연하고,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와 수가 구조에 관해 일반 시민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복잡하고, 굳이 알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집단과 시스템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과 의사 집단 사이에는 벽이 생깁니다.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겁니다.
건축가 이외의 문제들
헤더윅은 이런 현상을 건축가 집단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대중’의 취향과 요구를 평가 절하하는 집단의 오만함이 생겨납니다. 헤더윅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distinction)’ 이론입니다. 취향이 계급 구별의 수단이라는 겁니다. 모더니즘에 천착하여 장식적 요소를 배척하는 건축가 집단의 취향은 일반 대중의 통속적 취향과 구별됩니다. 이를 통해 건축가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되며, 건축가는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서 인정받는 미적 기준과 철학을 담아 ‘따분한’ 건축물을 만들어 냅니다. 르코르뷔지에라는 따분함의 신을 계속해서 섬기면서 말이죠.
저는 건축이 일반 시민과 유리된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책임이 오롯이 전문가 집단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지식이라는 장벽이 너무나 높았습니다. 그래서 법, 의학, 과학, 정치는 물론이고 건축까지 전문가들이 해당 영역을 완전히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특정 지식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패러다임을 바꿨고, 생성형 AI가 그 패러다임을 또 뒤집었죠. 지금 제가 형사법에 관해 알아보고 싶다면 5분 안에 관련 내용에 꽤 깊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였다면, 법전을 구하고 그 안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 해석해 내기까지 며칠이 걸렸을 텐데 말입니다.
한편, 영국의 일간지《가디언》의 건축 칼럼니스트 올리버 웨인라이트는 오히려 헤더윅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헤더윅이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헤더윅이 디자인하거나 참여한 몇 가지 건축 프로젝트를 예로 들며 ‘시각적 복잡성’은 강조했지만, 구조적 현실성과 사회적 책임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에 설치한 ‘B of the Bang’은 영연방 국가들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커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의 기념 조형물이었습니다. 2002년 맨체스터 개최를 앞두고 제작되었죠. 육상 경기에서 총성이 울리는 순간의 ‘빵(Bang)’ 소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56미터 높이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설치 직후부터 구조물 일부와 부품 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결국 2009년에 철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