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흑인 전용 극장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남부의 흑인 소유 극장이 문을 꽤 많이 닫았습니다. 백인 전용 극장도 돈벌이를 위해 흑인 관객을 수용하기로 하고요. 그래서 발코니석을 ‘Colored Balcony’로 지정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유색 인종을 위한 별도의 좌석입니다. 좌석이 분리되자 경험도 분리됩니다. 발코니석으로 향하기 위해 흑인 관객들은 극장의 정문이 아닌 측면부의 별도 출입구로 들어가 발코니에 앉았습니다. 영화를 의도된 대로 자리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보게 됩니다. 화면이 시야를 꽉 채우지 않았고, 백인들의 좌석 전체가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기가 달랐습니다. 에어컨에서 나온 냉기는 바닥부터 차올랐습니다. 흑인 관객은 극장의 쾌적함으로부터 가장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에어컨이 너와 나를 분리하는 기계로 작동하는 것은 21세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용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더위를 견디는 여름은 소득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뉴욕의 경우, 에어컨이 없는 가정의 비율은 10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실제로 뉴욕시에 따르면, 매년 여름 500명 이상이 폭염으로 사망하며 그 원인은 주로 에어컨이 고장 났거나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원래 유럽의 여름은 건조합니다. 같은 온도라도 습도가 낮으면 땀이 쉽게 증발해 체온을 조절하기 쉽습니다. 에어컨 없이도 살만한 지역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최근 유럽의 여름은 예전에 비해 너무 덥습니다. 게다가 습합니다. 유럽이 겪어본 적 없는 기후가 닥쳤습니다. 그런데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에너지 절감과 오래된 건축물 보호 등을 위해 에어컨 설치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에어컨은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전히 에어컨에 부정적인 마크롱 대통령과는 달리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같은 극우 정당은 에어컨 공약으로 일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당장 더위로 숨이 막히면, 마크롱 대통령의 정책은 고집으로 보이죠.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노동당을 향해 에어컨 설치를 제한하는 규정을 철폐하라며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요. 노동당은 냉방 기능이 포함된 히트펌프
보조금 확대 및 일부 규제 완화 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전환
더위는 늘 인류를 위협해 왔습니다. 그러나 더위가 차별과 구별의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에어컨의 발명이 계기입니다. 사람을 시원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제한된 공간을 시원하게 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에어컨은 설치된 공간 안의 필요 없는 열을 바깥으로 내뿜어 버리는 기계입니다. 내 집 안을 깨끗이 하기 위해 쓰레기를 집 바깥으로 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그 쓰레기 열은 도시에 쌓이고 쌓여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에어컨을 끄거나 금지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인류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구의 온도는 인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올랐습니다. 1980년대였다면 시도할 방법을 찾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25년에는 아닙니다.
에어컨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냉방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위해 에어컨을 보급해야 합니다. 저는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 정부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더위로 사망합니다. 노약자나 환자가 40도가 넘는 체감 온도를 그대로 견뎌야 한다면, 이건 그저 정부 실패일 뿐입니다.
서울이나 뉴욕, 파리뿐만 아니라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 지역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도의 극심한 대기 오염과 더위는 ‘살인적’입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에어컨이 급속히 팔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2023년 인도의 에어컨 보급률은
10퍼센트 수준이었습니다. 한국처럼 98퍼센트의 보급률까지 올라오게 되었을 때 지구가 추가로 감당할 부담을 함께 나누어져야 합니다.
에어컨과 함께 살 방법
에어컨이 지금 지구 환경에 지우고 있는 부담은 크게 두 가지, 전력 사용과 냉매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기록적인 폭염으로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에너지 수요 증가율은 2.2퍼센트였는데, 이 중 절반은 폭염에 따른 냉방 수요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 더워질수록 전력이 더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문제는 전력 생산이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원자력을 대안으로 꼽기도 합니다. 폐기물 처리 등의 과정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탄소 배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죠. 그래서 재생 에너지와 원자력을 함께 키워 상호 보완되도록 하자는
정책도 나오고요. 그런데 사실 재생 에너지와 원자력 발전은 제로섬 게임에 가깝습니다.
재생 에너지도, 원자력 발전도 사람이 원할 때 맞춰 전기를 생산하기 힘듭니다. 비 오는 날 태양광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원전은 끄고 싶을 때 바로 끌 수도 없을뿐더러 발전량을 낮추는 것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전력은 수요와 공급을 최대한 맞춰져야 기술적으로 사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낼 곳 없는 전력을 계속 생산하다간 발전소에 탈이 납니다. 그래서 수력 발전소나 가스 및 석탄을 이용한 화력 발전소를 함께 돌려 수요의 변화를 맞춥니다. 수력 발전소는 수문을 닫으면 되고, 화력 발전소는 불을 끄면 되니까요.
즉,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발전 방식에의 의존도는 수요의 변동 폭 아래로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전을 지을수록 재생 에너지 발전의 파이가 줄어드는 겁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끄기 힘든 원전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재생 에너지보다 유리합니다.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종의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습니다. 국가 전체의 전력망을 한국전력과 같은 거대 기관에만 맡겨두지 말고, 어느 정도는 로컬로 돌리는 겁니다. 이를 ‘
마이크로 그리드’라고 합니다. 단독 주택이나 소규모 지역 단위에서 자체 발전 설비와 에너지 저장 장치를 갖추는 겁니다. 태양광 등의 재생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설비를 지역 기후 특성과 전력 사용량에 맞게 갖추고, 날씨 문제로 충당하지 못하는 전력만 한국전력과 같은 공급 업체로부터 공급받아 쓰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방식은 비효율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AI와 인류가 전력을 놓고 경쟁하는 시대에는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 될 수 있겠죠.
냉매의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프레온 가스가 퇴출된 뒤 냉매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가 끝났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 냉매로 주로 사용되는 물질은
수소불화탄소(HFCs)입니다. 소화기나 건축용 단열재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이게 엄청난 온실가스입니다.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에 비해 수백에서 수천 배에 달합니다.
2016년, 국제 사회는 수소불화탄소의 생산과 사용을 규제하는 ‘키갈리 개정서(Kigali Amendment)’를 채택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암모니아나 이산화탄소 등을 이용해 만드는 ‘자연 냉매’가 최근 주목받고 있는데, 기술 개발이 한창입니다. 독일 등에서는 일부 상용화에도 성공했고요.
단, 돈이 문제입니다. 냉매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에어컨도 바꿔야 하죠. 이 부담을 온전히 시민에게 떠안길 수는 없습니다. 수소불화탄소를 불법으로 규정한다면, 가난한 사람부터 범죄자가 될 겁니다. 결국 정책과 예산이 움직여야 합니다. 다만, 기기를 모두 교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환경 영향을 생각하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냉매를 철저히 관리하는 시스템 정비와 함께 천천히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겠습니다.
도시를 설계하는 방법에 관한 정책도 함께 변화해야겠죠. 열섬 현상을 줄일 수 있도록 녹지 확보를 늘리거나, 좁은 방에 갇힌 기후 취약층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쾌적한’ 공공장소도 더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어컨 없이 살 수 없게 된 현실을 이제 인정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에어컨의 소유와 사용이 격차와 환경 문제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는 쪽으로 전 세계가 정책을 다시 짜야 할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