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이 어려운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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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약 대단한 자산가라면, 은행은 아주 쉽게 돈을 빌려줄 겁니다.

대출이 어려운 진짜 이유

2025년 8월 6일

빚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2024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평균적으로 버는 돈의 1.7배 정도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자영업자, 가계와 민간 비영리 단체까지 포함해 집계한 수치입니다. 이걸 ‘처분 가능 소득 대비 금융 부채 비율’이라고 합니다. OECD 32개 회원국 중 6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국가들을 보면 스위스, 네덜란드, 호주, 덴마크, 룩셈부르크 등입니다. 호주를 제외하면 주로 유럽의 복지 국가들입니다. 세금 부담이 커 소득이 낮게 잡힙니다.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할 때도 상대적으로 사회 안전망이 튼튼한 경우가 많고요.

우리 정부와 언론이 가계 부채를 ‘시한폭탄’이라 말하는 이유입니다. 경제 상황이 어려워져 대출 상환이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우리 경제가 바닥부터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폭탄이 터지지 않더라도 문제입니다. 빚이 많을수록 이자 부담도 커집니다. 좋게 말하면 절약하게 되고, 나쁘게 말하면 지갑을 닫게 됩니다. ‘내수 침체’를 유발합니다.

그래서 가계 부채 증가세가 가팔라지면 정부에서는 빚을 내기 어렵게 만듭니다. ‘대출 총량 규제’라고 해서, 각 은행이 빌려줄 수 있는 돈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죠. 그러면 은행들은 대출 심사 기준을 더 까다롭게 하거나, 대출 신청 자체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그 총량을 맞춥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계 부채를 관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제언이 나왔습니다. 국책 연구 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의 보고서 내용인데, 대출을 세대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빚을 지는 이유

우리는 왜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게 될까요? 지금까지는 자산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가계 부채가 증가한다고 봤습니다. 재산이 많은 집에서는 은행에 저금을 합니다. 재산이 부족한 집에서는 은행에서 돈을 빌립니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한쪽은 더 많이 저금하고 다른 쪽은 더 많이 빌리니 가계 부채가 증가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보고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주요 국가에서 불평등이 크게 확대되지 않았는데 가계 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죠. 그러면서 불평등 이외의 요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구 구조 변화 같은 것 말입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기대 수명은 OECD 평균보다 2배 빠른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2003년 출생아 기대 수명은 77.3세였지만, 2023년에는 83.5세가 되었죠. 하지만 퇴직 연령은 제자리걸음입니다. 은퇴 후 소일거리 등을 제외하고 보면, 대략 50세 안팎에서 정체 상태입니다.

안정적인 소득 없이 버텨야 할 노후가 너무 깁니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자산을 축적해 둬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생기는데, 이게 연령대에 따라 방법이 달라집니다. 먼저, 50세 이상의 중년과 고령층은 잔여 수명이 짧고 이미 내 집 마련을 해 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금융 자산 위주로 돈을 모아 둡니다. 쉽게 말해 은행에 저축해 두는 겁니다. 저축이 늘면 시장에 자금 공급이 늘고, 시장에 돈이 많아지면 돈의 가격, 즉 금리는 낮아집니다.

반면, 30~40대의 청장년층은 잔여 수명이 길고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자산 축적은 주택 구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의식주 중에 가장 큰돈이 들어가는 주거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소득만으로 내 집을 마련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 주택 담보 대출을 받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금리는 하락하고 가계 부채는 증가하는 경향이 지속됩니다.

시간 문제

고령층이 저금한 돈을 청장년층이 빌려 집을 사는 구조 속에서 가계 대출이 증가했으니, 인구 구조가 변화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더 나이 들 예정이고요. 보고서는 가계 대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기대 수명과 인구 비중에 주목합니다.

기대 수명이 1세 증가하면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약 4.6퍼센트포인트 증가합니다. 노후에 대한 압박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청장년층 인구가 1퍼센트포인트 감소하고 65세 이상의 고령층이 1퍼센트포인트 증가하면, 부채 비율이 약 1.8퍼센트포인트 감소합니다. 빚을 내 집을 살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산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Gini coefficient)’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고, 금융 정책으로 인한 영향도 결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론적으로 가계 부채 비율 증가는 불평등의 심화보다는 인구 구조 변화에 더욱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를 정책으로 교정하고자 하지만,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계산을 토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추산할 수 있습니다. 기대 수명의 증가세는 점차 둔화합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려는 청년층의 비율은 줄어듭니다. 그 결과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곧 꺾입니다. 정점이 가까워졌다는 얘깁니다. 가계 대출은 집을 살 사람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안정된다는 것이 이번 KDI 보고서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대출 총량 규제와 같은 방식의 정책은 지양하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고령자의 안정적인 수입 확보를 돕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를 벌리는 범인

그런데 대출과 불평등, 그리고 연령의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2025년 7월 17일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평균 순자산은 2억 5000만 원입니다. 미성년자가 없는 4인 가구의 경우 부채를 다 갚고도 자산이 10억 원은 되어야 평균입니다. 입맛이 좀 씁쓸해지는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 숫자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평균의 오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딱 중간인 사람의 소득인 ‘중위 자산’을 추정해 보면 1억 40만 원으로 떨어집니다. 평균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죠. 소수의 부자가 자산 분포의 평균값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산 불평등이 역대급으로 확대된 겁니다.

지니계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득이나 자산 분배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수치로 나타내는 지표인데, 0일 때엔 완전 평등한 상태, 1에 가까워질수록 불평등한 상태입니다. 2017년 우리나라 자산 지니 계수는 0.584였습니다. 이것이 2023년에는 0.612까지 확대됩니다. 미국의 0.75에 비하면 아직 낮은 편이지만, 일본의 0.54, 벨기에의 0.45 등과 비교하면 높은 편입니다.

그럼 2017년과 202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부동산 가격 폭등입니다. 2024년 말 기준으로 한국인의 순자산 중 부동산 비중은 74.6퍼센트에 달합니다. 가계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습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기준 가계 대출 잔액은 1810조 3000억 원입니다. 이 중 주택담보대출이 62.6퍼센트를 차지하고요.

즉, 불평등이 가계 대출을 늘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관계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계 대출은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부동산 가격 상승은 불평등을 심화하는 관계로 얽혀 있는 겁니다.

대출의 조건

은행이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는지 생각해 보면 이 불평등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드러납니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 금융 당국이 금리를 낮추고 정부가 재정을 풉니다. 실제로 돈이 풀리면 활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풀린 돈을 시장에 분배하는 주체가 은행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보신 분이라면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돈 빌리기 정말,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만약 1000억 원 상당의 자산가라면 어떨까요? 은행은 아주 쉽게 돈을 빌려줄 겁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할 확률이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즉, 불황일 때 소득이 적은 사람들은 생활비가 쪼들리고 사업장이 위기에 처해 은행으로 향합니다. 돈 빌리기 어렵습니다. 자산가가 불황에 은행을 찾는 이유는 낮아진 금리로 돈을 빌려 투자를 하기 위함입니다. 돈 빌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린다면 어떨까요? 신용 대출보다 주택 담보 대출은 상대적으로 낫습니다. 제가 돈을 갚지 못하게 되더라도, 은행이 손해를 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담보로 잡힌 부동산을 팔면 되니까요. 불황일수록 은행은 담보가 확실한 대출 쪽으로 기웁니다. 그렇지 않은 대출은 떼일 확률, 즉 부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가 집을 통한 불평등 확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경향에 관해 2025년 4월 한국은행이 보고서를 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은행을 비롯한 금융 기관들이 부동산 부문에만 치우쳐 대출해 줬다는 겁니다. 전체 민간 신용의 절반 정도를 차지합니다. 기업 부문의 부동산 대출만 떼어 보면 632조 원 규모인데, PF 대출을 중심으로 최근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의 직무 유기

그런데, 떼일 걱정 없는 부동산 쪽으로만 대출이 이루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려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대출 상환 계획까지 세워 은행에 가도 대출이 안 됩니다. 그런데 집을 사려고 하면 대출이 됩니다. 우리나라 경제 전체로 보자면 제가 가게를 열어 종업원을 고용하고 매출을 발생시키는 쪽이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은행으로서는 제 사업 아이디어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위험을 평가해야 합니다. 부동산 담보 가치 측정보다 복잡하고 실패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업 전반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조업이나 IT 등 혁신 산업 분야는 부동산 및 건설업에 비해 생산성이 높습니다. 미래 혁신의 기반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분야에 대출해 주려면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전문성도 필요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듭니다. 부동산 PF는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투입 자본 대비 생산성으로 볼 때 부동산은 좋은 투자 분야가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결과적으로 은행을 비롯한 금융 기관이 대출에 있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아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돈 벌 방법이 빚을 져 부동산에 투자하는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겁니다.

KDI의 보고서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계 부채 문제를 인구 구조 변화라는 구조적 요인 중심으로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더 살펴야 할 점이 많습니다. 가계 부채와 불평등 심화에 깔린 본질입니다. 부동산이 격차를 벌리고 있으며, 그 과정에는 게으른 금융 기관의 대출 관행이 있습니다. 

적당히 벌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빚내서 집 사고 빚내서 부동산에 투자하는 현재의 자산 증식 시스템을 아예 바꾸지 않으면, 은행의 게으른 대출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가계 부채 문제의 본질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구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자산 증식의 욕망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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