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의 위기‘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2025년 8월 4일, 기업회생절차를 시작했습니다. 왓챠가 선택한 일은 아닙니다. 신청은 왓챠에 200억 원 규모를 투자했던 벤처 캐피털 ‘인라이트벤처스’가 채권자 자격으로 진행했습니다. 기업회생 결정은 법원이 내렸습니다. 즉, 채권자와 법원이 ‘이대로는 힘들다’라고 판단했다는 얘깁니다.
왓챠의 성장 과정은 ‘무신사’와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영화에 관해 코멘트를 남기고 별점을 메기는, 일종의 커뮤니티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무신사가 패션 커뮤니티에서 웹 매거진으로, 이커머스로 사업을 확장했듯 왓챠도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2016년 OTT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마니아층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리지널 콘텐츠의 성공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왓챠는 무신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죠.
콘텐츠 유통 구조를 해킹한 스타트업
왓챠를 만든 창업자들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취향을 분석하고 계산해 대중의 평균이 아닌, 내게 맞춘 평균을 찾아 주는 서비스를 구상했던 겁니다. 아이템은 영화가 아니라 맛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업 멤버들이 대부분 영화를 좋아하기도 해서 영화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커뮤니티에 데이터가 쌓일수록 왓챠는 내 취향에 맞춘 영화를 훨씬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OTT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커뮤니티에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장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콘텐츠를 골라 수급해 오는 방식입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전략입니다. 10만 원어치 팔릴 콘텐츠를 만 원 주고 사 오는 방식이니까요.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당시 여러 면에서 꽤 유효했습니다. 먼저, 개인의 취향을 파악해 저격한다는 점부터 그러했죠. 지금은 너무 당연한 얘깁니다. 언젠가부터 유튜브와 넷플릭스,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의 알고리즘이 나 자신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왓챠가 커뮤니티의 형태로 처음 문을 연 때가 2012년입니다. OTT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16년이고요. 아직도 ‘멜론 TOP 100’ 플레이 리스트가 유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콘텐츠 수급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2010년대 초중반 한 케이블 채널 방송국을 상상해 보죠. ‘킬러 콘텐츠’ 확보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수백 개 채널 중 우리 채널에 시청자가 멈추고, 주기적으로 찾아오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영화 및 해외 시리즈를 수급할 때는 무조건 해당 시즌의 최고 기대작을 쟁탈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이를테면 〈왕좌의 게임〉 같은 대작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작은 하나만 사 올 수 없습니다.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규모가 작고 흥행 가능성이 적은 작품들도 함께 사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잘되기 어려운
미국 정치 시트콤 같은 것이라 해도 말이죠. 그래서 당시에는 판권을 구매해 놓고도 몇 년 동안 편성조차 하지 않는 영화나 해외 시리즈도 있었습니다. 자막 등 후작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창고에서 먼지만 쌓이는 겁니다. 그게 이득이었습니다. 킬러 콘텐츠를 3방, 4방째 다시 편성하는 쪽이 훨씬 높은 시청률과 광고 수익을 보장했으니까요.
OTT의 정의를 바꾼 팬데믹
반면, 왓챠는 처음부터 킬러 콘텐츠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죠. 시청자는 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가성비 작품 리스트를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모범 답안을 들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OTT라는 플랫폼의 특성이 그런 ‘취향’의 영역과 참 잘 맞아 보였습니다. 편성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우니까요. 그런데 그 정답지의 유효 기간이 너무 빨리 끝나 버렸습니다.
2019년까지만 해도 왓챠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임원이 직접 나서 구글플레이 매출상으로는 넷플릭스를 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죠. 하지만 자신감의 더 큰 근거는 ‘추천’의 정확성이었습니다. 플랫폼은 늘 이용자에게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콘텐츠를 클릭하고 끝까지 플레이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왓챠는 이 부분에서 넷플릭스를 앞선다고 자평했습니다. RMSE 값(평균 제곱근 오차, 예측한 값과 실제 값 사이의 오차가 얼마나 되는지 측정)을 기준으로 30퍼센트 이상 넷플릭스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명했죠.
근거는 왓챠의 뿌리인 커뮤니티입니다. OTT 론칭 이후 ‘왓챠피디아’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여전히 건재합니다. 왓챠의 기업회생 진행 결정 소식이 전해지면서는 왓챠의 OTT 서비스보다 왓챠피디아의 존립이 더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죠. 왓챠피디아에 영화 감상평과 별점을 오랫동안 쌓아 둔 유저들이 적지 않은 영향입니다. 실제로 2025년 1월 기준 왓챠피디아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400만 명에 달합니다. 왓챠는
50만 명대고요.
하지만 곧 OTT 시장은 취향이 아니라 물량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팬데믹 이전부터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에서 잘 될만한 IP를 열심히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 돌았습니다. 2019년 오리지널 시리즈〈킹덤〉이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 후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투자 시장에 돈이 몰렸죠. 극장은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던 시절, OTT는 가장 매력적인 투자 종목이었고요. 넷플릭스는 확보해 뒀던 IP를 차례차례 터뜨렸습니다. 오리지널 콘텐츠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여기에 디즈니플러스라는 글로벌 경쟁자와 웨이브, 티빙 등 국내 방송사 및 대기업의 OTT가 합세했고요.
〈시멘틱 에러〉와 〈오징어 게임〉사이의 간극
시장 환경의 변화는 왓챠의 전략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마니아층이 원했던 독립 영화, 스타 배우는 없어도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해외 시리즈 등에만 집중하기엔 각 플랫폼이 쏟아내는 대작이 너무 많았습니다. OTT에 편성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청자에겐 시간 자원이 한정적입니다. 〈오징어 게임〉을 정주행하면 왓챠를 열어 볼 시간은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21년 HBO와의 콘텐츠 계약이 종료되면서 왓챠라는 플랫폼과 결이 잘 맞았던 〈왕좌의 게임〉, 〈체르노빌〉 등의 콘텐츠를 상실하게 됩니다.
왓챠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2021년 말 490억 원의 전환 사채(CB)를 발행합니다. 일종의 투자 방식입니다. 채권자는 만기가 도래했을 때 원금과 이자를 회수할 수도 있고, 투자 금액에 비례해 회사의 지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이번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인라이트벤처스가 200억 원을 투자합니다.
이 돈으로 왓챠는 오리지널 콘텐츠에 힘을 실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외에 웹툰과 웹소설, 음원, 게임 등 멀티 콘텐츠 플랫폼으로 거듭나는 ‘왓챠 2.0’ 계획도 발표했죠. 의미 있는 결과를 냈습니다. BL 시리즈〈시멘틱 에러〉가 주목받았고, 〈좋좋소〉같은 콘텐츠는 유튜브와 OTT 사이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사회적 밈이 되었습니다. 〈조인 마이 테이블〉 같은 따뜻한 예능 프로그램도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