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항로를 따라가면

bkjn review

북극이야 말로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곳입니다.

북극 항로를 따라가면

2025년 8월 21일

대항해 시대가 끝난 지 몇백 년이 지났지만, 새로운 바닷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북극 항로입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북극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멉니다. 남극보다 더 그렇죠. 하지만 북극이야말로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곳입니다. 새로운 기회와 도래할 위험이 공존합니다. 인간이란 그 상자를 열어보고야 마는 존재죠.

한국도 중요한 플레이어로 새로운 개척에 뛰어들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꽤 절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이 펼쳐져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동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일본, 오세아니아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바닷길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바닷길이 넓어지면 운신의 폭이 넓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북극을 주목하는 이유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힘의 북극

남극은 대륙입니다. 북극은 바다입니다. 평소에는 얼어 있어 배가 다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러시아가 물리적으로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강대국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는 곳이죠. 더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와 유럽 간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한 정치학자는 영국의《이코노미스트》를 통해 북극해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와 유럽이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다면, 그 발화점은 북극해의 일부인 바렌츠해, 혹은 북유럽과 중앙유럽 사이의 발트해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바렌츠해는 러시아 북해함대의 전략 핵잠수함 기지가 있고, 발트해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 간 군사적 긴장이 높은 지역입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적이 너무 가까이, 코 앞으로 닥쳐왔다고 본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 북극은 알래스카라는 미국의 최북단 국경지대입니다. 동시에 군사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사실, 북극해는 냉전 시절부터 미국과 구소련의 전략 핵잠수함과 폭격기 루트가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중국, 러시아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폭격기를 쏘아 올린다고 가정해 보죠. 최단 루트는 북극을 통과합니다. 그러니까, 북극은 폭탄을 품은 곳입니다.

녹아내리는 북극

그런데 최근 북극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얼음이 녹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해 남쪽 지역 일부를 제외하면, 북극 항로는 더운 여름에나 제한적으로 열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북극해의 얼음이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같은 계절을 기준으로 작년보다 올해의 얼음이 더 얇은 겁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입니다.

얼음은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를 늦추죠. 하지만 얼음이 녹아버리면 이 효과가 사라집니다. 더 많은 열을 흡수해 얼음이 더 많이 녹습니다. 악순환에 속도가 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얼음이 녹으면서 기회가 생겼습니다. 진짜 북극 항로를 개척할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진 겁니다.

북극 항로는 아주 오랫동안 탐험가들에게 악몽이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얼음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면, 살아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45년 영국의 존 프랭클린 제독이 이끌었던 테러(Terror)호 원정대는 120여 명이 2년 치 식량을 준비해 탐험에 나섰지만, 얼음에 갇혀 전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69년 만에 테러호 잔해가 발견되었지만 선원들의 유해는 찾지 못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출처: tvN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기술이 발전했죠. 사람과 물건을 실은 배 앞에서 얼음을 깨며 길을 열어주는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 북극 항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제한적인 항로를 한여름에 다니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얼음이 더 녹아버릴수록 길은 넓어지고 위험은 줄어듭니다. 북극 항로를 이용할 수 있는 기간도 점점 더 늘어납니다.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뱃길이 드디어 열리는 겁니다.

그 상업적인 가치가 꽤 큽니다. 해상 운송은 전 세계 무역의 핵심입니다. 우리나라 수출의 99퍼센트가 해상 운송입니다. 전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도 무역량의 85퍼센트가 바닷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길이 멀수록 비용이 많이 듭니다.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상하이에서 출발한 컨테이너선이 인도양을 거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을 돌아 다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향해야 합니다. 수에즈 운하를 통해 지중해로 질러가는 것보다 12일이 더 소요됩니다. 그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전 세계 선박들이 연간 9조 원에 달하는 통행료를 지불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합니다.

그런데 북극 항로를 이용하면 수에즈 운하보다 더 빠르게 질러갈 수 있습니다. 거리는 32퍼센트, 운항 일수는 10일까지 단축 가능합니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기준으로 아낄 수 있는 연료비만 수십억 원에 달하고요.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들 처지에서는 북극 항로를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북극

그래서 우리나라도 북극 항로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 언론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극 항로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대북 정책이 북극과 연결되는 고리는 러시아입니다. 남-북-미 관계 중심으로 전략을 짜왔던 과거와는 달리 판을 크게 보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와 북한이 급격히 가까워진 상황을 경계했습니다. 다만, 이 상황을 반전시킬 가능성을 북극 항로에서 본 것 같습니다. 북극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이용해 미국, 러시아, 북한, 한국, 일본이 함께 협력할 방법을 만들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북극 항로는 대북 전략 이상의 의미입니다. 우선, 한국 조선업의 호재입니다. 쇄빙선을 만들 기술을 가진 나라가 전 세계에 몇 안 되고, 한국 조선 업계의 기술은 최고 수준입니다. 북극을 다니는 선박이 많아질 수록 쇄빙선 수주 실적이 늘어날 겁니다.

지역 활성화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최근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소식이 꽤 주목받았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해 북극 항로로 진입,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닿는 경로가 활성화한다면, 부산에 경제적으로 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권 중심의 물류 구조를 전반적으로 개편해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물류 거점을 마련한다면, 주변 지역까지도 파급 효과를 기대할 만합니다.

사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도 북극권의 자원과 북극 항로 개발을 점쳤죠. 하지만 당시에는 사업성이 낮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아직 충분히 녹지 않았던 겁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점차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2025년의 북극은 다릅니다.
2013년 해양수산부의 홍보 자료입니다. / 출처: 해양수산부
생명의 북극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는 러시아로서도 북극 항로는 경제적으로 중요합니다. 러시아는 북극해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야말 LNG 프로젝트’입니다. 만약 북극 항로가 활성화하면, 운송비를 크게 아껴 이 천연가스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수출할 수 있습니다. 유럽은 물론 남미 등의 지역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북극 항로가 절실합니다. 주변에 항구는 꽤 많습니다. 다만, 노후화된 곳이 많아 현대화를 추진하고 신규 항만도 건설 중입니다.

전쟁 이전부터 러시아는 북극 항로에 공을 들여왔습니다. 2021년 수에즈 운하가 사고로 한동안 막히면서 해운 대란이 일어난 이후, 2022년에는 북극 항로를 1년에 2회 이상 운항하는 선사를 대상으로 5억6000만 루블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죠. 우리 돈으로 84억 원 규모입니다. 전쟁 중 유럽으로 깔아 놓은 파이프가 막히고 육로도 막히면서 북극 항로의 가치는 더욱 도드라졌고요.

미국으로서도 북극해가 녹으면서 알래스카에 묻힌 천연자원 개발을 타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연가스 개발은 물론이고, 희토류도 손에 넣을 수 있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나설 정도로 녹아내린 북극은 뜨거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가 북극 항로에 뛰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가치가 올라갈 테니 지분을 미리 확보해야 놓아야 손실 우려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한국인의 논리입니다. 지구인의 논리로 바라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위험천만합니다.

쇄빙선이 지나다닐수록 북극해의 얼음은 부서집니다. 큰 빙하는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작아서 열 교환이 느립니다. 천천히 녹습니다. 잘게 부서진 얼음은 표면적이 넓어 해수나 대기와 더 많이 접촉합니다. 더 빠르게 녹죠. 북극 항로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북극의 빙하를 더 빠르게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냅니다.

게다가 생태계 자체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선박의 아랫부분에는 배의 무게 중심을 낮추고 하중을 고르게 분산하기 위해 물을 채워 넣는데요, 이걸 ‘밸러스트 워터(ballast water)’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물을 항구에 정박한 상태에서 채우고 비우는 게 문제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배가 유럽에 정박해 탱크를 비우면, 아프리카 바다에 살던 생물이 유럽 해안으로 유입되는 겁니다.

북극에 외래종이 침입하게 됩니다. 반대로 북극 빙하에 갇혀 있던 알 수 없는 미생물이 부산 앞바다에 쏟아지게 될 수도 있죠. 어류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플랑크톤 수준의 생명체가 지역을 이동해 섞이는 것만으로도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 없습니다. 생태계는 우리가 예측하거나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까요.

지구인의 북극

결국 북극 항로 개척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북극 항로는 오히려 위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 길은 얼음을 깨고 생태계의 평형추를 옮기는 길입니다. 북극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개발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북극의 온난화와 생태계 파괴 등을 이유로 들어 북극 항로 이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주로 환경 단체가 주도하고 나이키와 같은 기업과 글로벌 해운 업체 등이 동참했죠. 물론 러시아와 중국 해운사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함께 숨겨져 있고요.

하지만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ESG 시대의 종말을 고했습니다. 저성장과 관세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명분은 커녕 실리를 지키기에도 빠듯한 형편이고요.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이대로 좋아진다면, 우리 지구인들은 북극 항로를 정말로 손에 넣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무엇을 잃게 될지는 아직 제대로 계산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북극이 판도라의 상자인 이유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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