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2029년에 우리나라가 동계 아시안게임을 개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한국이 어떻게든 개최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펑크가 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2029 동계 게임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사우디아라비아가 두 손을 들어버렸습니다.
공식적인 포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우디는 2029년에는 다른 곳에서 개최하고, 2033년도 게임을 개최하는 쪽으로 일정을 바꾸고자 합니다. 대체 개최지로는 동아시아의 3개국, 한국, 중국, 일본을 꼽았습니다. 동계 올림픽과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 경험이 있어 촉박한 일정을 고려할 때 현실적이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 올해 동계 아시안게임을 개최했습니다. 상하이에서 9회 게임이 열렸죠. 2021년도에는 개최 희망지가 없었고, 2017년도 8회 게임이 일본 삿포로에서 열렸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오래전 개최했습니다. 지난 1999년 강원도에서 열린 4회 게임입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우리나라가 맡아주는 것이 가장 그림이 좋겠죠. OCA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개최 의향을 물어온 이유입니다.
사실, 아시안게임도, 동계 아시안게임도 이익을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고 황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손익 계산을 잘 해보고 대응하면 될 일입니다. 이 소식에서 눈길이 가는 곳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사우디입니다. 국제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가 약속을 뒤집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신뢰도가 걸린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사우디가 2029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를 사실상 포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파괴해야 할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스키를 즐기는 방법
사우디에서 동계 아시안게임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개최가 결정되었을 때도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돈’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불가능은 별로 없습니다. 화성도 가는 시대니까요. 다만 비쌀 뿐이죠. 여름에는 체감 온도가 40도를 훌쩍 넘는 중동에서의 동계 게임도, 돈만 들이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게임이 열릴 곳은 건설 중인 네옴 시티의 실내 경기장이었습니다. 이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네옴 시티는 현실 바깥의 상상처럼 보였지만, 실내 경기장은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동계 스포츠 중 반드시 실외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키 슬로프를 이용하는 종목들입니다.
사우디는 이 슬로프를 해발 2500미터 지역에 짓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트로제나’라는 지역입니다. 고도가 높다 보니 기온도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겨울철에는 섭씨 0도까지도 내려갑니다. 하지만 낮에는 다시 영상 10도에서 2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기 때문에, 스키 슬로프를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는 아닙니다. 게다가 사우디는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강수량이 연 100밀리미터에 불과해 눈이 내려 쌓일 일도 없죠.
이걸
돈과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무하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 ‘MBS’로 불리는 인물의 계획이었습니다. 엄청난 돈과 기술을 들여 오지에 가까운 트로제나 지역에 인공 슬로프를 만듭니다. 산의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와 철근으로 비탈길을 건설해 올리는 겁니다. 눈이 내리지 않으니 인공 눈을 만듭니다. 바다에서 물을 끌어와 담수화한 후, 인근에 인공 호수를 만들어 채워 둡니다. 더운 기후 탓에 물이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물을 계속 끌어와 채워야 합니다. 여름에는 이 호수를 고급 휴양지로 운영하고, 겨울에는 이 호수의 물로 인공 눈을 만들어 트로제나의 슬로프에 뿌릴 계획이었죠.
호날두의 두 다리에 걸린 미래
MBS에게 동계 아시안게임은 꽤 중요한 이벤트였습니다. 2016년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의 진행 상황을 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한 자리니까요. 2029년이라는 시기가 딱 좋습니다. 중동 한복판에 건설된 스키장과 비현실적인 네옴 시티의 모습으로 일단 예고편을 보여준 뒤, 2034년에 열릴 FIFA 월드컵을 통해 완성된 사우디의 미래를 전 세계에 증명할 계획이었죠.
이를 위해 투자하겠다는 돈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2017년 당시 발표했던
네옴 시티의 총사업비는 5000억 달러 수준입니다. 수도 인근을 비롯한 대규모 관광 개발 사업까지 포함하면 총 7190억 달러였고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가 굳이 관광에, 스포츠에 돈을 투자하자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피로 얼룩진 싸움에서 승리해 권력을 쟁취한 인물, MBS가 소프트 파워를 돈으로 사들여 일종의 ‘워싱’을 하려는 전략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붙었죠.
게다가 이 모든 개발 사업은 엄청난 탄소 배출을 동반합니다. 상식적으로 바닷물을 굳이 담수화한다면, 그건 부족한 식수를 위해서일 겁니다. 담수화 과정은 돈도 들고 에너지도 드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만든 비싼 물로 인공 눈을 만들어 뿌린다는 자체가 엄청난 비효율입니다. 그 눈은 하루 새에 다 녹아버릴 텐데 말이죠. 그런 비효율이 네옴 시티 전체를 휘감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화석 연료의 제왕 자리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환경 관련해서도 당연히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MBS가 멋진 사업 좀 해 보려고 돈을 뿌린 것은 아닙니다. MBS는 청년층의 지지를 받는 젊은 지도자입니다. 지금까지 사우디가 보여준 모든 행보는 석유로 먹고사는 시대가 끝났을 때 사우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즉, 탈탄소 시대의 청사진을 적극적으로 그린 겁니다. 그 청사진은 사우디 청년층에게 ‘미래’를 의미하고요.
석유 종말의 날
사실, 사우디아라비아야말로 탈탄소 시대로의 전환으로 세대 간 격차가 가장 극심하게 벌어질 수 있는 국가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동의 산유국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을 국가 복지가 책임집니다. 그 복지의 재원은 당연히 원유를 내다 판 돈이고요. 그래서 정부가 예산을 짤 때 원유의 가격 추이에 따라 재정 규모를 결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보자면, 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조금만 달리 보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국가 경제 전체를 ‘원유’라는 단일 품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일 당장 샘 올트먼과 빌 게이츠가 투자한 핵융합 발전이 현실화하기라도 하면 중동의 산유국들은 경제가 흔들립니다. 화석 연료로부터 인류가 독립하는 날이 중동 산유국들에는 대공황의 시작이 되겠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유를 중동 산유국 몇몇이 독과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석유의 패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가격을 조절해 필요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 중동이 뭔가 급해졌습니다.
2015년 UAE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석유 시대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맥락이었습니다. ‘50년 뒤 우리가 마지막 석유를 선박에 실어 보낼 때’를 언급하며, 그 순간을 축하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바로 뒤이어 2016년에 MBS의 사우디 비전 2030이 발표되고요. 생각보다 오일 머니로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기간이 빨리 끝날 수 있다는 시그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셰일 붐 말입니다.
마른 땅을 짰더니 기름이
미국에서도 석유가 납니다. 그런데 중동과는 좀 다릅니다. 중동의 원유는 지하수처럼 고여 있습니다. 이걸 ‘지하 저류층’ 형태라고 합니다. 생산 비용이 쌉니다. 미국에도 같은 형태의 유전이 있지만, 최근 원유가 바위에 스며들어 있는 형태의 유전이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주로 진흙이나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셰일이나 사암층입니다. 그래서 셰일 오일이라 부릅니다. 생산 비용이 많이 듭니다.
즉, 예전에는 셰일 오일을 뽑아 사용하는 것이 비용 대비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 기회가 찾아옵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뛰어오른 겁니다. 비용을 감당하며 사업을 해 볼 만한 시장이 되었습니다. 우후죽순 업체들이 나서 바위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물론, 이후 원유 가격이 안정되고 셰일 오일 개발이 환경 면으로 해악이 많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붐은 사그라들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몇몇 업체는 살아남았습니다.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 경쟁력은 싼 가격으로 석유를 뽑아 올리는 기술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바위에 구멍을 수직으로 뚫어 내려가 뽑아 올렸지만, 그래서는 바위에 넓게 스며든 기름을 다 뽑아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구멍을 수평으로도 냅니다. 구멍 주변 암석층에 균열을 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원유를 더 저렴하게, 더 많이 뽑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셰일 혁명’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중동의 산유국으로만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가를 낮추죠. 2016년 초에는 배럴당
30달러까지도 떨어진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추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직후 일시 중지됩니다. 전쟁 이후 유가는 올랐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납니다. 셰일 오일은 저절로 마르지 않고요. 중동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기회가 도래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겁니다.
OPEC을 다시 위대하게
국가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사우디의 경우 순수하게 생산과 채굴에 드는 돈만 계산하면 원유의 원가는
배럴당 3~4달러 수준입니다. 기술 투자 비용까지 합쳐도 10달러 수준이고요. 셰일 오일은 2010년대 후반 일부 지역에서 40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원가만 놓고 보면 중동의 원유가 훨씬 쌉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원유를 팔아 이익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정부 재정에 필요한 만큼 말입니다. 이걸 ‘재정 균형 유가’라고 합니다. 사우디의 경우
90달러 수준입니다. 결론적으로 셰일 오일을 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철강 관세입니다. 미국의 제조업을 살리겠다며 5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이게 셰일 오일 업계에는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바위에 구멍을 뚫고, 거기서 원유를 뽑아내는 장비가 모두 강철입니다. 갑자기 가격이 1.5배로 뛰면, 생산비도 오릅니다. 이민자 추방 정책도 독입니다. 원유를 생산하는 작업은 고된 육체노동이 따릅니다. 일할 사람이 줄면 비용은 상승합니다.
결과적으로 미국 주요 생산지에서 셰일 오일의 손익 분기점은 배럴당
60달러 수준까지 올랐습니다.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쳤던 트럼프 대통령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결과죠. 사우디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생산량을 늘려 원유 가격을 60달러나 그 아래로 계속 유지하기만 한다면, 셰일 오일의 생산을 멈출 수 있습니다. 한 번 생산을 멈추면, 해당 유정의 시설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셰일 오일을 말려 버릴 수는 없지만,
업체들을 말릴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