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을 치운 뒤

bkjn review

탑골 공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성역화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장기판을 치운 뒤

2025년 8월 27일

종로2가 탑골 공원은 날씨와 관계없이 북적이는 곳입니다. 주로 고령자 방문객이 많고, 공원 북문 인근 담장을 따라서는 장기와 바둑을 두는 테이블이 즐비했죠. 승부를 겨루는 이와 훈수 두는 이, 구경하는 이가 한데 뒤섞여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경이 요 며칠 새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로구에서 바둑과 장기 테이블을 모두 철거하고, 주변을 단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민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즐기고 있으니, 취객들이 찾아들었습니다. 금연 구역에서 흡연을 일삼고 길바닥에 드러눕기도 했죠. 노상 방뇨에 폭력 상황까지 ‘무질서 행위’가 만연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장기판을 다 치우고 난 이후 민원이 줄었다는 것이 종로구의 설명입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요?

공원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들

공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종로구는 사람을 몰아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무질서의 이유를 인파에서 찾은 겁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2001년에도 ‘탑골 공원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용자들이 공원 바깥으로 밀려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시의 공원 정비 현황 보고 문서에는 “많은 노인이 운집하여 무료 급식을 배급받으며 소일하고 있어 공원 환경이나 분위기가 크게 훼손되어” 정비가 필요하다고 적시되어 있습니다.

원래 탑골 공원은 일종의 쇼핑 지구였습니다. 공원을 ‘파고다 아케이드’라는 상업 시설이 빙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7년 건립된 2층짜리 아케이드 건물입니다. 악기점, 양장점, 전자 제품 등을 판매하는 고급 상점이 입점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탑골 공원을 일종의 역사 유적으로 봤습니다. 3.1 운동의 발상지인 동시에 원각사 10층 석탑이 보존된 곳이니 근거 있는 관점입니다. 결국 1982년 파고다 아케이드는 철거되고 공원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1991년 탑골 공원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원 안에는 벤치와 공공 화장실 등 휴게 시설이 갖추어졌고, 입장료도 무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고령층과 실업자 등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입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공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수의 단체가 이곳에서 무료 급식을 제공했습니다.

외환 위기는 극복했지만, 한 번 바뀐 공원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시는 탑골 공원 정비 사업을 추진합니다. 당시 서울시는 공원 북문 주변으로 이뤄지고 있던 ‘무료 중식 노인 급식’ 때문에 미관이 산만하고, 공원 무료입장으로 ‘부랑자’ 이용이 많아져 혐오감을 조성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무 벤치를 돌의자로 바꾸면

그래서 성역화 사업은 누구나 올 수 있는 공원이라는 정체성을 지우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업이 마무리된 2002년 이후 공원에서는 음주가무, 바둑, 장기, 붓글씨 등 여가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자판기와 편의 시설도 철거되었으며, 벤치도 나무에서 화강암 벤치로 바꿨죠. 녹지 공간을 늘려 걷고 앉아 쉴 공간도 상대적으로 줄었고요. 오래 머물며 쉬고 즐기기에 불편한 곳으로 바꾼 겁니다.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차가운 돌의자’나 ‘한 바퀴 돌고 나가라’는 분위기에서 환대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성역화 사업 이후 탑골 공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연구한 논문 〈탑골 공원의 장소 정체성에 대한 연구 - 성역화 사업 이후 현상을 중심으로〉(한성미, 2016)는 공원의 공간적 의미가 애매해졌다고 진단합니다. 고령자를 중심으로 하루 3000명까지 이용하던 공원인데, 사업 이후에는 고령자 이용객이 50명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탑골 공원에서 이뤄지던 활동은 주변의 종묘 공원으로 이동했고요.

논문은 성역화 사업이 고령자 이용은 줄였지만, 일반 시민과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기념 공간도, 생활 공간도 되지 못한 채 시민의 삶과 유리된 공간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름만 공원이지, 사람은 품을 의도가 없는 장소로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고령자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공원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기념물은 가치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그 무엇도 기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역화 사업 이전의 탑골 공원은 다채롭고 활력이 있는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 출처: KBS 다큐
송해길과 성수동의 차이

그럼에도 고령자들은 탑골 공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미 형성된 장소의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공간에 담긴 기억과 추억은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탑골 공원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애당초 고령자에게 매력적이었던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인 고령자들에게 접근성이 좋습니다. 무료 급식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요. 무엇보다, 공원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이 고령자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탑골 공원에서 종로3가역 방향으로 조금만 나가면 ‘송해길’이 나옵니다. 수표로와 낙원상가 사이의 거리입니다. 〈전국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34년 동안 진행한 방송인 송해 씨의 사무실이 있던 곳입니다. 3000원, 5000원을 내면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고령층이 마음 편하게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이발소도 많고요. 모든 것이 저렴하고, 옛날식입니다. 고령층에게 익숙한 가격과 맛, 분위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리입니다.

같은 시기에 성장한 세대는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다른 세대와 구분되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일정 정도 공유하게 되는데요, 일종의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고령층이 겪는 코호트 효과는 문화적 소외로 악화하곤 하죠. 사회적 규범과 예의, 경제적 관념이나 문화적 감수성 등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와 크게 달라 일종의 고립을 경험하는 겁니다.

사회에 막 진입하는 청년층도 비슷합니다. 다만, 이들은 향후 경제적 활동을 활발하게 할 잠재적 소비자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따라서 청년층을 겨냥한 상권으로 각종 문화적 자원과 마케팅 요소가 집결합니다. 반면 고령층, 그중에서도 소비 역량이 낮게 평가되는 고령층의 상권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비에는 보수적이고, 상권의 수명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령층의 상권은 존중받기 힘듭니다. 젊은이의 거리와 고령자의 거리는 그 가치가 서로 다릅니다.

고급스러운 현대화

탑골 공원에 주목한 또 다른 연구, 〈종로 탑골 공원 경계부를 이용한 노인복지시설 계획안 - 2001년 서울시 탑골 공원 성역화 사업 이후 현상을 중심으로〉(2019, 윤승혜, 유현준)는 고령자가 공원에서 밀려난 이후 공원 경계부로 모여 체류하는 현상을 목격합니다. 외곽 담장 주변이나 인도 공간 등입니다. 실제로 장기와 바둑이 이루어졌던 테이블도 공원 외곽 담장을 따라 주로 배치되어 있었지요.

이 연구는 이에 착안해 대안을 제시합니다. 경계부 공간에 노인 복지 기능을 부여하자는 겁니다. 의자나 그늘 등을 조성해 쉼터 공간을 확보하면 고령자의 체류권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소규모 복지 센터나 상담소, 주간 돌봄 센터 등도 공원 주변에 분산하여 배치하면 이용률을 높일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하면 공원 내부의 기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계부의 일상성과 복지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안은 현실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용자에 의해 자연스럽게 점유된 공간의 속성을 행정 주체가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행정력은 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효율성과 질서를 극대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가독성 있는 질서(legibility)로 변환하려 하죠. 쉽게 말해, 노숙자는 보이지 않는 시설에 수용하고자 합니다. 판자촌은 밀어내고 개발하고자 합니다. 공원 주변의 장기판을 노인 복지 센터 안의 장기실로 옮기려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이와 같은 속성을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으로 정의했습니다. 정부가 사회를 완전히 통제하고 재구성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무질서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장기판을 치우면, 공원과 그 주변의 복잡성은 줄어들고 관리하기 쉬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원이 자연적으로 획득한 공간의 목적성은 잃게 됩니다.

다른 방법을 상상할 수는 없었을까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규칙과 유대감을 파악하고, 이를 최대한 존중해 주변의 규칙을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장기와 바둑을 즐기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고령층이 아니었습니다. 감시의 눈을 피해 술에 취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폭력적인 행동으로 해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공원 주변의 공간을 소비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게 진짜 문제였죠.

우리 사회는 보기에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내는 선택을 해왔습니다. 그렇게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서울을, 도시를 세워 올렸습니다. 2025년 탑골 공원에서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또다시, 도시 한복판에 사람을 품을 수 없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성역 말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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